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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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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구원의 방식(출 2:11-15) - 2강
마태복음에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은 누구를 인해서 기뻐하시느냐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바가 없는 99마리 양보다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더 기뻐하십니다. 눅 15:3-7절에서는 99마리의 양을 회개할 것이 없는 스스로 의인된 자로 말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회개한 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종교 행위를 믿고, 자기의 의를 믿고 있는 자보다도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더 기뻐하신다는 애기입니다.
신자는 자기가 무엇을 함으로서 그것을 의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자가 극히 조심할 것은 이것입니다. 남들이 안하는 구제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의로 여깁니다. 그래서 나는 남보다 낫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남들은 소홀히 여기는 성경공부나 예배시간에 열심히 참석할 때 그것이 나의 의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신앙 생활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큰소리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양의 모습이아닙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목자가 아니라 자기가 목자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목자로 삼는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만이 나올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을 때 자신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눌 본문은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 받은 모세가 어릴 때 어떻게 생명을 건졌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의 명령에 의해서 남자아이를 다 죽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어머니가 그 명령을 어기고 모세를 갈 상자에 넣어서 하숫가에 버리게 됩니다. 여기서 모세는 버림받은 아이로 등장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버림받은 모세가 어떻게 살아나게 됩니까? 5,6절에 보면 바로의 딸이 버려진 모세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그를 살렸다고 말합니다. 즉 버림받은 자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방식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인 것을 모세를 통하여 보이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모세를 통하여 그러한 구원의 방식을 보이십니까? 그것은 모세를 구원하신 방식이 곧 이스라엘을 향하신 구원의 방식이고, 오늘 우리들을 구원하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입니다. 자기의 힘을 지키기 위해서 남자아이를 죽이라는 명령 때문에 버림받게 된 모세와 같이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의해서 버림받은 사람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당신은 세상에 의해서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는 말로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모세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당한 일이 전부의 일이 되어야 하고, 한 사람의 고통이 전부의 고통이 되어야 하고,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전부에게 일어난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물에서 건짐 받은 것 같이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도 모세의 운명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적으로 물에 빠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사건은 신약의 우리들에게 구속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똑같은 실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재연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물에서 건짐 받은 것이나 홍해에서 건짐 받은 사건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다같이 물에 빠져 죽을 자리에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오늘 우리에게 존재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우리가 살아났다는 그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기까지는 수많은 실패가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모세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신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자기 포기입니다. 자기를 포기한 자가 성공한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신앙적이든 세상적이든 자기의 힘을 기르는 것을 성공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믿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병들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은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든지 내 믿음과, 내 양심과, 내 노력으로 신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여러분에게서 밀려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힘이 없다고 여겨질 때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이 잘 사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어하고, 초라하게 못사는 모습은 수치로 여기고 감추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부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람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무 거리낌없이 남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힘으로 사는 자의 모습이 본문에 나옵니다. 모세는 장성한 후에 어느 날 자기 민족이 애굽 사람에게 맞는 것을 보고는 그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게 됩니다. 그때 모세는 자기의 힘으로 자기 민족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튿날 모세가 자기 민족이 서로 싸우는 것을 말릴 때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같이 나도 죽이려느냐"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모세에 대한 반감입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왜 그것에 반감을 가집니까? 그것은 모세가 가진 힘에 대한 반감이었습니다. 항상 약한 자는 힘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때문에 모세가 자기들을 구원한다고 해도 자기들이 힘이 없는 이상 또 다시 모세의 힘에 지배를 받게 된다는 생각 아래 모세에게 반감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으로 건짐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40년간 애굽의 모든 학문을 다 배웠으면서 자기가 건짐 받은 하나님의 자비를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자비보다는 힘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힘을 내세웠기 때문에 모세는 비록 이스라엘 편으로서 다가갔지만 이스라엘은 모세에게서 애굽의 힘을 보았기 때문에 그 힘을 거부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았으면서도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자비입니다. 신자들이 세상의 힘에 눌리지 않기 위해서 힘을 얻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욕심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복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지를 못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여야 할 것은 사랑과 자비이지 힘이 아닙니다. 힘을 나타낼 때 힘없는 약한 자들로부터는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부자가 빈민촌에 들어가 그들을 전도한다고 할 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은 할 수 있지만 그들과 하나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없는 자는 있는 자의 힘에 반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할 일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만족하고 열심히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신자는 사랑과 자비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것이 없어도 사랑과 자비로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함께 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 속에 사랑과 자비의 자리가 만들어 질 때입니다. 아무쪼록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는 신자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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