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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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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세 가지 이적(출 4:1-9) - 4강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세상보다는 주님의 십자가를 더 사모하고, 관심을 두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보다 나 자신의 육신에 더 관심이 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이 단지 말로만 들려지지 않고 요한의 외침으로 선지자들의 외침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열매가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세상에 보내진 것은 단지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모세만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보낸바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용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죄인된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순종하는 인간과, 하나님의 일에 거부하는 인간으로 구분되어서 보내어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다 똑같은 인간인데 단지 하나님이 누군가를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 편에서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극복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이 자리하시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누구도 동일하고 자신을 자랑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어졌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을 증거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면서 일의 가능성을 판단하며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일에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쉽사리 벗어버리지 못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바라보면서 일의 가능성을 판단하고 거부할 것과 받아들일 것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믿음을 앞세우고는 있지만 결국 믿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의 여건과 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인간의 힘이고 능력이지, 절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세는 아직까지 자신의 힘과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모세나 성경의 인물들만이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해서 세상에 보낸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야 할 신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이든 어디든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자신의 힘과 가능성을 보고 살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어떤 일속에서 먼저 걱정과 염려를 앞세운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지를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어려운 일을 해결 받는 가운데 보여지는 것보다는 어떤 여건 속에서도 걱정하기보다는 기도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든 그 일에 동의하겠다는 그 모습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신자가 세상에 보여지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모세가 자기의 가능성이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오직 하나님만 믿고 애굽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신다면 먼저 모세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타지 않는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심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은 자신의 힘이나 가능성을 보며 주인이 시키는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러한 종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애굽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시는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철저하게 잘 드리고 봉사 에 열심이 있는 그런 백성으로 만드시려고 모세를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보냄 받은 애굽에 갇혀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거기서 벗어나게 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 이후에 이스라엘로 보냄 받는 선지자들이 할 일과도 동일합니다. 선지자들도 이스라엘로 보냄 받았을 때 그들이 처하고 있는 애굽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보냄 받은 것입니다. 때문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열심은 전혀 강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종교적인 열심만을 보이고 있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전혀 행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는 선지자의 역할을 하면서 세상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보이기가 힘들고 대부분이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 자신의 소망하는 것을 이루어 보고자 힘쓰는 사람들만이 보여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내 생명이라고 말하기를 꺼려하는 세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모세로서 서는 것은 거부하고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으로 서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고 살아가는 세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세상에서 자리잡고 잘 살기를 바라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으로 나가자는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상에서 나가는 것보다는 그냥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심기자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는데 굳이 세상에서 나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내가 나가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어려움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일의 가능성을 핑계삼아 그 일을 거부하고자 했습니다. 1절을 보면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고 합니다. 옛날에 젊고 힘이 있을 때에도 자신을 믿지 않았는데 지금 나이 들고 힘없는 그런 자기를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세가지 이적을 보이시게 된 것입니다. 세가지 이적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시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첫 번째 이적은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2절)고 묻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니이다"(2절)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했을 때 땅에 던지자 지팡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모세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의 차이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팡이가 땅에서 뱀이 된 것은 지금 세상은 뱀, 즉 사탄에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도록 하는 것은 단지 종의 신분에서 풀어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세상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이 땅은 사탄에게 붙잡혀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결국 심판 받을 땅으로 보시는데 정작 우리는 세상을 내 꿈을 이루고 성공하고 출세해서 재미있게 살 장소로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부터 세상을 뱀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야 할 이유를 확실히 알아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세상은 뱀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탄에게 붙들려 있는 심판의 자리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 나올 것을 외쳐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난처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무엇을 외쳐야 할 것인가를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 대한 소망을 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뜻을 따라가는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아라고 하십니다. 뱀은 머리를 잡을 때 꼼짝을 못합니다. 그런데 머리가 아닌 꼬리를 잡아라는 것은 머리를 잡아서 뱀을 정복할 분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창 3:15의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입니다. 즉 그리스도입니다. 머리를 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보면서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모세에게 '너는 네가 머리를 칠 힘을 보고 있는데 너는 꼬리만 잡으면 된다. 머리를 치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너는 다만 내가 하는 일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설득해서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도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감화시켜서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치고 알게 할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문제입니다. 이것만큼은 신자가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꼬리를 잡을 뿐입니다. 내가 이것을 해가지고 어떤 효과를 가져오겠다는 발상은 이미 내가 머리를 잡겠다는 잘못된 의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단지 꼬리를 잡을 뿐입니다. 이 말은 내가 원하는 어떤 결과를 원하고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적은 손이 문둥병이 걸렸다가 다시 낫는 이적입니다(6,7절). 문둥병은 더러움의 표시이고, 저주받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세의 손이 문둥병이 걸렸다는 것은 모세, 즉 이스라엘도 문둥병자와 같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과 뭔가 달라서 애굽에서 인도하려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애굽과 똑같은 저주받은 모습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이적은 하나님께서 애굽을 침과 동시에 애굽과 똑같이 저주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하시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두 번째 이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이 땅의 사람과 뭔가 달라서가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동일한 사람입니다. 저주 아래 있고 멸망 받아야 할인간입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함 받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표는 하나님이 뱀으로 보시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미련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적은 하수를 떠다가 땅에 붓자 하수가 피가 된 것입니다(9절). 물이 땅에서 피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은 심판 받을 땅이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 받을 땅으로만 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세상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 자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노아 홍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선한 문화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문화까지 멸망시키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저주받을 땅으로 보신다면 우리 또한 저주받을 땅으로 보고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할말은 하나님이 정하셨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가르쳐준대로 말할 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의 반응은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는 세가지 이적을 보고 나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또 다시 자기의 힘을 걱정하고 결과에 대해서 걱정합니다.
모세는 자신은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요, 벙어리, 귀머거리, 눈 밝은 자, 소경이 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10,11절). 이 말은 내가 어떤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니까 자기의 모습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시킨 대로만 살아가면 된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주받을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건짐받은 것을 감사하며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떤 말을 해야 할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걱정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 주어질 결과에 대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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