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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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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여호와가 누군관대(출 5:1-9) - 6강
신자는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직장을 다닌다면 왜 직장을 다녀야 하는지, 공부를 한다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결혼을 한다면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종교적인 행위로서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모든 행위에 왜? 라는 물음을 하고 거기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왜 이 모임에 오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무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단지 예배드리는 날이어서 왔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성경을 배우고 싶어서 왔다고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내가 왜 이 자리에 와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주일 오후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나오신 분도 있을 것으로 압니다. 만약 주일이니까,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주일을 안지키면 죄가 되니까 나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그 생각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요구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뭔가를 지키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주일을 지키니까, 십일조를 하니까, 봉사를 잘하니까 '나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깊이 가지고 있습니다. 또 사실 그것이 자신의 신앙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생각은 자신의 행위를 앞세우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게 하는 것이므로 결국 사탄의 생각이라는 것을 규정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증거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구제도하고, 금식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내세웠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철저하게 아주 철저하게 부정하시고 무시하셨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왜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물음에 '신자니까 해야 한다'는 답을 많이 내릴 것입니까? 예배? 신자니까 드려야 한다. 십일조? 신자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 봉사? 신자니까 해야 한다라고 한다면 공부는 왜 하는 것입니까? 직장은 왜 다니는 것입니까? 그것도 '신자니까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단지 '신자니까 한다'라고 한다면 결국 그런 행위가 있는 사람은 모두 행위 때문에 신자가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경에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자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무엇을 하고 안하는 문제가 우리를 신자되게 하고 신자 안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신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십일조를 하는 것이 신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헌금의 행위를 금지시키는 말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한다고 해서 그것이 또 신자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그 전통과 정서가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나 주일 성수라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할 때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반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자의 표, 교회의 표를 십일조와 주일성수에 두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듭 말씀드리건대 십일조, 주일 성수 그 자체는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의미도 아니고, 안식일도 주일 성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이 신자됨의 증거를 성경에 대한 자세한 고찰도 없이 앞서 말한 대로 전통과 종교 정서에 따라서 규정하고 그것을 지키자고 노력해 왔을 뿐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노력과 열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사실 바리새인들의 열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말할 때 꼭 반발하는 말은 '그러면 십일조도 하지 말고 주일에 예배당에 나오지도 말라는 얘기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반발을 하나님을 사랑해서, 진심으로 예수님이 피 흘리셔서 세우신 교회를 사랑해서 하는 말로 들려지지 않고 자신의 종교를 지키고, 자기의 고집을 지키고, 자신의 전통을 지키고, 교회라는 인간 조직체를 지키기 위한 반발로만 들려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발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십일조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책망은 하고 있지만 헌금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단 하나님이 제물(헌금)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특정한 날(주일)을 지키는 것은 금지하셨지만(갈 4:10,11)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을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하건 나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렇게 하니까 신자다'는 생각은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헌금을 해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앙 생활은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이 되면 안됩니다. 그런 신앙생활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고자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절기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때는 아직 유월절, 맥추절, 추수절, 나팔절 등 여러 가지 절기가 제정되지 아니한 때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제외한 모든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는 지키지 못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야 지킬 수가 있었던 절기입니다. 때문에 이때의 절기는 3:18절의 말씀이나 5:3절의 말씀대로 희생이 있는 제사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희생 제사의 의미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제정된 유월절로 인해서 자세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절기가 오늘날 예배를 가리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지금 우리들이 드리고 있는 것 같이 순서가 짜여져 있는 형식으로서의 예배를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희생이란 결국 어린양의 희생을 말하는 것이고, 어린양의 희생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예배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을 제사로 드리는 것, 즉 내가 제물되는 것이 예배다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제물 되신 것같이 나의 삶이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배를 드리는 자와 드리지 않는 자로 구별됩니다. 이 또한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가지고 구별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일 성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를 물을 뿐입니다. 직장도 누구를 위해서 나가느냐. 공부도 누구를 위해서 하느냐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의 생계를 위해서 직장에 다니고, 나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공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위한 삶을 버리지를 못하고 하나님께 나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제사와 제물을 거부하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는 주님 때문에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주님 때문에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 모습이 바로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을 내 보내달라고 했을 때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바로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여호와란 칭호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거나 여호와란 신이 있다는 것도 들어보지 못한 상태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서 살았기 때문에 바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라도 여호와란 신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1:8절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이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즉 애굽이 하나님의 은혜로 강성하게 되었음을 모르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을 압니다. 예수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사람에게 가서 '당신이 성공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누군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렇게 성공했지 하나님이 누군대 하나님이 나를 성공하게 했느냐?'라는 반응을 보일 것은 뻔합니다. 바로가 바로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마치 목사가 자신의 교회가 커질 때 그것을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 때문이라고 교만해지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모르는 모습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했다고 말은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은 교회가 망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겠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가 부흥한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호와를 아는 목사는 눈에 보이는 조직체인 교회가 관심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만 관심을 두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 가르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여호와를 아는 자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되는 것은 하나님은 왜 굳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벗어나게 해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인가? 입니다. 애굽에서 예배를 드리면 안된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즉 애굽의 사고 방식 안에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사고방식은 이 땅에서 될 수 있으면 성공해서 편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목표입니다. 이러한 삶의 목표를 가진 자가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떤 식으로 찾을 것 같습니까? 모두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장해 가면서 하나님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부름에 속지 않으십니다.
세상 사고방식 안에서는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은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죄악된 문화와 문명으로 가득차 있는 이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때 가인의 문화와 문명을 모두 수장시켰고, 또 지금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이 땅을 불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해놓고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모순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죄로 보고 심판의 대상으로 보시는 것 같이 우리 또한 세상을 심판의 자리로 보고 그 자리에서 떠나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벗어나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다른 영원한 세상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에서 주어지는 것을 미리 이 땅에서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하고, 모여서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고 다시금 우리는 천국백성이지 이 땅의 사람이 아닌 것을 확인하면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이 예배를 애굽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드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로는 천국을 사모하고 소망하며 산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살아가는 모습이 천국을 위해서 세상을 포기하는 모습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절대로 천국을 소망하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고, 편하게 살아보는 것이 소망인 사람에게는 여호와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이 쓸데없는 소리로만 들려지게 마련입니다. 마치 바로와 같습니다. 바로는 불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세상에서의 나의 성공과 번영을 방해하고, 부정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바로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사고방식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신약에는 십일조가 없다는 말이나, 주일성수가 성경에 없다는 말이나, 건물로서의 예배당을 부정하고, 목사에 대한 권위를 부정하는 말에 그토록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런 것이 자기를 지키고, 자기 교회를 유지하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교회가 안된다는 두려움이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바로의 신을 하나님이라 이름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지키기 위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무시해 버리고 자기의 힘을 가지고 그들을 핍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애굽의 특징은 '여호와가 누구냐'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모릅니다. 이 세상도 여호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세상은 어떤 모습입니까? 돈버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애굽 밖으로 나가겠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는 예배를 노동력의 손실로 보고 있고, 노동력의 손실은 곧 자신에게 손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이 누리자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신앙생활 열심히 해서 복을 누리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자는 자기의 편안함과 손익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의 사랑에 이끌려서 나올 뿐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모든 것이 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경제력이 곧 힘이기 때문입니다. 가족 관계도 돈으로 인해서 깨어지고, 친구 관계도 돈으로 인해서 원수가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교회도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선도의 관계를 돈에다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는 이유가 뭐냐면 여호와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돈이 있기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만 바라고 살아야 할 피조물이 돈을 바라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돈을 제공하는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9-2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을 더 심하게 받게 되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을 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벗어난다는 문제보다는 바로에게 잘보이고 아부를 해서라도 어쨌든 편한 삶만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애굽 사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어떤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천국과는 상관없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애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선물로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하나님의 노동을 아는 자들로 모여서 하나님의 일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이 하신 일을 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삶이 곧 영적예배입니다. 그것을 함께 찬양하고 확인하며 천국의 삶을 서로를 통해서 나타내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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