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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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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듣지 않음(출 6:2-9) - 7강
출애굽기는 세상을 고발하고 있는 책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면 나는 어떻게 사느냐는 걱정부터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립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세상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일하시는데 우리는 오히려 세상에서 떨어지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누리기를 원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겠습니까?
예수님보다는 자신이 더 소중하고, 신앙으로 사는 것보다는 우선 돈버는 것이 더 바쁘고, 주님의 이름을 나타내기보다는 내 이름이 나타나기를 더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상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살고자 애쓰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우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돈을 주고, 힘을 주는 권력자를 무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교회 목사가 무섭고, 직장 사장이 더 무서운 존재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고 말을 못하고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냐며 어물쩍 넘어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강한 자의 비위를 거슬려서 자기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신앙을 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끄집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특징은 나를 끄집어내신 분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만 듣고 삽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삽니다. 바로와 같이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하면서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무시해 버립니다. 성경에서 노아언약 때문에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힘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양심도 적당히 팔아가면서, 강한 자에게는 머리를 숙이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자로 사는 것을 지혜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뭡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신자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것이 신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우리들부터 성경을 말씀으로 믿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면 세상은 심판 받을 장소임을 알아야 하며,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 후에 사라져버릴 안개요, 풀의 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힘이라면 세상 것은 없어도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며 기뻐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심판의 장소인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에 집착해 있고, 사라져 버릴 것에 지나지 않은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법은 하나님이 끄집어내신 백성들을 통해서 나타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모르는 애굽에 모세와 아론을 보내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자기의 힘과 자기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느냐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구약에서는 그것을 성전으로서 보여주셨습니다. 희생 제사가 있고 그 희생의 피가 뿌려지는 지성소가 있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만나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전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예수님이 오신 이상 이 땅에는 형태화된 성전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며 피를 흘리시므로 이 땅에 교회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예배도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세상에서 건짐 받은 존재로서 이 땅을 의지하지 않고 장차 주어질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겠습니다'라는 고백과 뜻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예배며, 그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만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우리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면서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인다고 말하면서도 교회의 모임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겨버린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세상에 보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배라고 하는 것은 장차 주어지는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자는 세상 것을 붙드는 모습을 보이면 안됩니다. 오직 생명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의 나라가 주어지고 세상이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세상 것에는 관심을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이런 삶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자들이나 자기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돈이 없으면 세상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혹 돈이 없어 세상을 못살고 그 자리에서 죽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예 이런 생각은 하고 싶은 않은 것은 아닙니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세상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과 타협해서 세상의 좋은 것을 나도 누려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는 신자는 세상과 싸우게 되어 있고, 언제나 갈등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할 관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걱정되는 것은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보다는 애굽의 미움을 받아서 고역이 가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이라면 절대로 자기들을 이렇게 고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땅에 그들을 들여보내시겠다고 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와 아론 때문에 현재 자기들의 삶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졌다는 것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고통과 어려움이 더 가중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심판이라는 말보다는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말을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왜 꼭 고통이어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을 살짝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바꾸어 가지고 구약의 복을 언급합니다. 구약에는 물질적인 복도 나오는데 왜 물질적인 복은 말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굳이 고난과 어려움을 강조하면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복은 장차 참된 복으로 오실 분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할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거하는 땅의 소산물을 통해서 보여줘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잘살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장차 올 하늘의 복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에 와서 구약의 눈에 보였던 약속의 땅의 의미가 그리스도안으로 완성된 것 같이 복이라는 것도 세상 물질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것입니다. 때문에 구약의 복을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복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은 예수 그리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 곧 최고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상 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고 망해도 괜찮다는 것이 진짜 복을 누리고 있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복을 깨닫기 위해서는 좁을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단지 자기들의 일이 더 가중되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끄집어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편안함이 더 관심의 대상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할 때는 하나님을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편안함을 건들지 않을 때 얼마든지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등을 돌리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삶의 목적을 영생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천국을 소망하신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주님의 백성으로 여호와를 알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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