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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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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성소(출25:1-9) - 19강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는 말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느냐는 물음을 던진다면 분명 '살아 계시다'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를 보여보라고 할 때는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겨우 하는 말은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분이니까 우리가 증명할 수 없다'라고 얼버무리고 말게 됩니다. 즉 신자 자신부터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그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고 있다면 그 증거를 무엇으로 내세울 수 있습니까? 증거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안믿는 자에게 믿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시고 나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느냐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모습을 꿈에서 본다거나 어떤 큰 기적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가장 큰 증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십자가를 말합니다.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어떤 큰 능력과 기적의 표적을 구했는데 그것이 곧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모습임을 책망하시고서 표적은 오직 십자가가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십자가를 표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표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으로 바뀐 것이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삶은 버리지 못합니다.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기심이 있는 인간이 자기를 도외시하고 누군가 제 삼자를 위해서, 그것도 보이지도 않는 분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이 남기신 말한마디를 가지고 자기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십자가를 알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무엇입니까? 나의 변화입니다. 나의 삶이 주님을 알기 전과 주님을 알고 난후 변화되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이러한 증거를 안고서 세상을 사는 신자라면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저히 이렇게 바뀌어질 수 없는 내가 변화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신다. 살아계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다스리신다. 나를 봐라 내가 그 증거다.'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자가 신자 아니겠습니까?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하냐? 악한 사람들이 잘살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받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냐? 라고 반문을 합니다. 또 신자들 가운데도 열심히 신앙생활했다고 자부하고, 남들보다 부지런히 앞장서서 신앙생활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믿음을 살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보다 더 힘들게 살고,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발생할 때 당장 쏟아지는 불평은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신앙생활 열심히 한 사람을 더 잘되게 해야지 왜 더 힘들게 하시느냐?' 이러한 원망을 많이 하게 됩니다. 결국 신자라고 하지만 불신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좋게 만드셔야 하고, 참된 신자를 잘살게 만드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뭔가 자기의 일이 잘되어야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우리의 육신을 편안하게 만드시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세상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손으로 불태워 버릴 곳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가득찬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봐야 또 다시 악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기 좋은 세상인 에덴을 만들어 주셨지만 인간이 그것을 파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세상에 악한 사람, 즉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사기 치고 하는 사람들만 없애버리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그 어떤 인간도 선한 인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선한 인간만 남기기 위해서 악한 사람을 없애버린다면 우리 모두가 다 죽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새하늘과 새땅에 있으며, 우리가 그 나라에 거할 참된 신자되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신에게 조금만 손해가 되는 일이 발생해도 하나님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님의 길에 더 관심을 두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기뻐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살아 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우리에게 뭔가 영향을 입혀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게 하는 것입니까? 기도 열심히 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옛사람이 다 허물어지고 새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내 모든 인생을 맡기는 삶으로 변화된 모습, 그것이 곧 기적이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증거입니다. 이 증거를 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증거가 있습니까? 있다면 참으로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세상에서 어떤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낙심이 먼저가 아니라 그 일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여러분의 중심에서 일하시는 것, 그것을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지을 것을 명령하시는 내용입니다. 성소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삶속에서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이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장차 성소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가 있고,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들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표준을 우리가 정해서 그것을 기준 삼아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혹 아직까지 여러분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힘들 때 짐을 나눠져 주는 그런 함께 하심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를 때리고 힘들게 하셔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바꿔놓고야 마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시도록 나를 내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뀌어진 인생입니다. 내 인생을 내 계획대로 내 뜻대로 못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끌어가시는 대로 감사하고 끌려가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어느 누가 이런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사람이 신을 찾는 것은 자기 인생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찾는 것인데 오히려 포기하라는 말에 반발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목사님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야하는 인생인 것 다 아는데 또 힘들게 말합니까?'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신자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살아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여러분의 삶속에서 여러분을 다스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성막을 만들어서 그들을 다스리고자 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삽니까? 여러분들 안에 성막이 세워져 있습니까? 성막의 규례를 보면 인간의 생각이 갈 수 없도록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의 지시가 내려져 있습니다. 크기, 길이, 재료의 종류, 갯수, 모든 부분에 걸쳐서 인간의 판단은 전혀 개입될 수 없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는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은 전혀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습입니다. 어느 것은 하나님께 양보하고 어느 것은 양보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나에게 별 손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하나님께 양보하고, 손해가 될듯 싶으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워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종교행위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판단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신자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무조건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해주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면서 책망하고 이 땅에 생명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리는 사랑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만드시기 위해서 죽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는 오직 생명 되신 주님을 알리기 위해서 힘씁니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모방하는 사람은 단지 사람을 좋게 할뿐입니다. 사랑을 가장하고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할말을 하지 않아 버리고, 고쳐줘야 할 것을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에는 관심 두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해야 할 일, 주님을 전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일에 힘쓸 뿐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날마다 말씀에 지배를 받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은 내면서 어려운 자가 보이는데도 한푼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다는 것을 모르고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즐거운 일이 있으면 반대로 슬픔에 빠진 이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냥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소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자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오전 설교대로 여러분의 종교적인 열심, 스스로의 믿음을 믿지 말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여러분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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