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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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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관점과 입장의 차이
본문: 삼상 16:7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용모와 신장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라. 이 사람은 내가 말하던 자가 아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관점과 다르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
사람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 수 있는 한 과학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과학자는 로봇을 통해 기쁨을 얻기 위해 여러 로봇을 만들었다. 그런데 A라는 로봇은 다른 로봇들에게는 너무 잘하는데 자기를 만든 과학자에게는 전혀 무관심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욕을 한다. 그런데 B라는 로봇은 다른 로봇들을 때리고 싸움을 하는 데. 이 과학자에게는 만들어주심에 감사하고 찬양을 하여 이 과학자를 기쁘게 한다고 하자.
로봇 사회에서는 A 로봇이 착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A 로봇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로봇이고, B 로봇은 비록 로봇들을 괴롭혔어도 사람들이 권투나, 소싸움, 개 싸움을 즐겨보듯이 만든 목적에 부합한 로봇으로 착한 로봇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중심, 인본주의 입장에서 착한 사람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악한 자가 얼마든지 있음을 알 수 있다. 최후 심판 때에 재판관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55:8)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어떤 입장에서 살아야 하는 가를 살펴보자
1. 하나님의 관점
이찬수 목사의 간증이다. 아버지는 정말 교회를 사랑하셨다. 조그만 개척 교회 담임 목사였는데, 교회를 위해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시다가 그만 17일째 되던 날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교회를 불같이 일으켜 세워 주시기는 커녕 담임 목사를 데려가시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당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분은 하나님도 아버지도 아닌 어머니였다. 목사 남편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는데, 보통 사람 같으면 '목사'라는 직분에 회의가 들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네가 커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나님이 네 아버지를 너무 빨리 부르셔서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셨지. 그러니 자식인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막내인 나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이 견딜 수없이 싫었다. 그러나 끈질긴 어머니의 기도로 서른 살 때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기도만 하고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교회를 향한 그 기도 열매를 자식인 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놀라운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거두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 앞에 굴복시켜야 한다. 나의 관점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퍼즐 조각 맞추듯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하나님이 모두 옳으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롬11:28)
어떤 사람이 약속시간에 늦어 과속을 하며 차를 몰고 있었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단속 카메라가 눈에 들어 왔다. 깜짝 놀라 재빠르게 속도를 줄였는데, 자신의 차가 지나가자 “찰칵” 하며 촬영 음을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속도를 기준이하로 낮췄는데 카메라에 왜 찍혔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호기심 많은 이 사람은 다시 돌아가 속도를 낮춘 다음, 그 앞을 다시 지나갔다. 그런데 단속카메라에 자신의 차가 또 “찰칵” 찍히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이번에는 속도를 최대한 낮춘 다음, 그 앞을 다시 지나갔다. 그랬더니 또 “찰칵”소리가 들렸다. 며칠 후 이 사람에게 고지서 석장이 날아 왔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안전벨트 미착용“
나는 목회를 하면서 이 썰렁한 이야기를 마음에 자주 떠 올린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자신의 기준이 있다. 그러고는 자신은 그 기준에 맞춰 속도를 줄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과속하는 것을 보면 비판하고, 정죄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 하나님의 관점은 속도가 아니라 안전벨트 착용의 여부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잘못된 관점으로 인한 오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2. 관점과 시각의 차이
한 어머니가 출가한 딸의 집에 갔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은 자고 있는데 사위가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식사를 해먹고 출근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딸을 아껴주는 사위를 보며 대견스럽게 생각하였다. 다음날 아들집에 갔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며느리는 자고 있는데 아들이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식사를 해먹고 출근을 하였다. 어제와는 달리 아들이 측은하게 보였고 며느리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느낌과 평가는 전혀 달랐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사람은 어떤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모습을 보면서도 정반대의 느낌과 생각을 가지게 된다. "대견스럽게 보이던 사위, 측은하게 보이는 아들, 기특한 딸, 괘씸한 며느리…" 왜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될까? 자기 입장에서 보기 때문이다. 사위가 집안일 하는 건 기특하고 아들이 집안일 하는 건 못 참는 것이다. 딸이 딸 낳으면 살림밑천이고 며느리가 딸 낳으면 그래도 듬직한 건 아들이라고 말한다. 아들이 살찌면 부은 것이고 사위가 살찌면 딸이 잘 한 것이다. 딸네 시어머니 오실 땐 어른이 주책이 없는 것이고 자신이 아들집에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딸에게는 옷 좀 사 입으라고 하고 며느리에게는 옷 많다고 구박한다. 딸이 애 맡기면 스트레스 풀고 오라고 하고 며느리가 애 맡기면 늦지 말고 들어오라고 한다. 어떤 입장에서 보냐에 따라 말과 태도가 달라진다. 관점의 차이이고 시각의 차이다.
19세기 미국 유아 교육에 가장 큰 업적을 세웠던 ‘피바디’ 여사의 일화이다. 피바디 여사가 초등학교 교사 시절, 반 학생들의 박물관 견학을 위해 박물관 사전 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물관을 지키던 수위는 여사를 줄곧 이상한 눈으로 살펴봤다. 여사가 하루 종일 무릎 꿇은 채로 박물관 여기저기를 다녔기 때문이다. 수위는 그저 딱한 사람으로 여기며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답사를 마친 여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박물관을 나가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수위는 박물관을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고 사연을 물었다.
“무슨 이유로 종일 무릎 꿇은 채로 박물관을 다닌 건가요?”
“저는 교사입니다. 우리 반 아이들은 키가 매우 작아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설명해 준다면 아이들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사의 말을 듣고서야 박물관 수위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경쟁의 논리에 잠식되어 있다. 그리고 아이들의 인격은 성적표로 대신 평가된다. 교육의 본질은 이해와 사랑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그 어떤 지식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며, 이것을 체험으로 보여주는 것이 기성세대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점과 시각이 다르고, 아버지와 자식의 관점과 시각이 다르며, 교사와 학생의 관점과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고 눈높이를 같이 하고 이해하고 가르치자.
3. 상대방의 입장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이는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相對方)의 처지(處地)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다는 옛말이 있다. 사람마다 자기 입장이 있기 때문에 사연을 들어보면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같아 누구의 말을 들어야할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는데 그 입장이란 것이 매우 주관적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채 대화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 대화의 문은 막히고 관계에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대화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인격을 인정해주는 사랑이 없을 때 그 대화는 무위로 끝나게 된다.
어떤 아내의 불평이다. “제 남편하고는요, 도대체 말이 안 통해요. 그렇게 많이 말해줘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니 정말 답답해요.” 이 경우 답답하기는 남편도 마찬가지 일것이다. 아내가 자기의 입장만 고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대화에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고려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제부터는 남편이 하는 말을 남편의 입장에서 들어보라. 남편 역시도 아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아내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들어주는 것이다. 이처럼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주는 사랑의 마음, 이것이 바로 부부 관계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방법이다. 성령의 열매인 이 사랑하는 마음을 선물로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그대로 순종해 보라. 그때 당신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한없이 내려주시는 그 은혜에 당신은 목을 놓아 울게 될 것이다.
과부가 과부의 심정을 안다고 한다. 자기가 고난을 당해 보아야 남의 고난을 이해하고 돌보아 줄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고난 당하는 자를 알기 위해 먼저 고난을 당하셨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수년 전, 해외에 나갔다가 어느 호텔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앞뒤좌우는 물론이고 바닥과 천장까지 거울로 되어 있었다. 거울 속에 또 거울의 형상이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거기에서 수많은 '나', 서로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 보지 못했던 나의 옆모습, 뒷모습은 물론이고 위에서 본 나의 모습, 그리고 아래에서 본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벌거벗은 모습을 말이다. 다양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나의 모습이란 늘 거울에서 바라본 정면의 모습, 그것도 좌우가 바뀐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들에게 비친 나의 앞뒤, 옆모습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상의 사물이나 현상은 대부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인다. 고정관념이란 말은 유연하지 못한 사고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도 가리킨다. 고정된 시각이란 정말 위험하고 진실이 아닐 때가 많다.
어떤 형제가 있었다. 형이 성공해서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멋진 자동차를 선물해 주었다. 새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알고 지내는 어린 아이를 만났다. “아저씨 새 자동차 사셨네요?” “아니 내가 산 것이 아니고, 형이 선물로 사주었어.” “정말 부러워요.” “너무 부러워하지마. 너도 장차 크면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을 날이 올거야.” 아이가 말했다. “아니예요. 저는 선물받은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동생에게 자동차를 선물해 줄 수 있는 형님이 부러운거예요. 나도 커서 동생에게 좋은 것을 선물해 주는 형이 될거예요.” 무엇을 부러워하는가에 따라서 그릇이 달라진다.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있다. 받는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고, 장학금을 주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 부러워하는 관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는 달라지는 것이다. 편협한 사람은 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억울함과 분노 속에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입장을 달리해서 보는 사람은 더 큰 섬김을 위해 나가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내게 희망을 주는 것들에 감사하며 오늘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 기도: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 하나님의 관점과 믿음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큰 믿음을 주옵소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게 하소서. 나의 평생에 선함과 인자하심이 항상 같이 하게 하시고 내 마음 속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게 하소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갈릴리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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