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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2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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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sermon/697725 |
정용섭 목사
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성령강림절후 제8주,
2013년 7월14일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기쁘고 위로가 되지만 도전을 받으면 좀 불편합니다. 그래서 도전이 되는 말씀은 자기도 모르게 피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0:25-37절도 도전적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불편한 이유는 그 말씀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율법이 이에 대해서 뭐라 말하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율법교사는 신 6:5절과 레 19:18절을 인용해서 대답합니다. 온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답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교사는 자기가 율법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투로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내 이웃이 누군지를 알아야 이웃을 사랑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율법교사다운 질문입니다. 오늘의 신학자처럼 율법을 전공한 이 사람은 누가 이웃인지, 또 누가 원수인지를 식별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이웃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고, 원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예수님이 한번 더 정확하게 인정해주기를 기대한 겁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잘난 척 한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모든 걸 빼앗고, 옷을 벗기고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구타한 뒤에 길에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뜸한 광야입니다. 산적들이 출몰하기에 맞춤한 환경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방치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죽게 될 겁니다.
마침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일을 다 마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제사장이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끔찍했겠지요. 피범벅이었겠지요. 독수리들이 시체를 쪼아 먹을 기회를 노리느라 높은 곳에서 배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제사장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보면 누구나 측은한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도울 생각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사장은 시체에 손을 대면 율법을 어기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강도들이 아직도 이 부근에 남아있을지 모르니까 빨리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의 생각이 실제로 어땠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이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라고 했습니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제사장은 외면한 겁니다. 그 다음에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제사장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레위인도 제사장보다는 못하지만 종교적으로 상위 계급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 모두 그 위급 상황에 처한 사람을 나 몰라라 했습니다.
세 번째로 그곳을 지나간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율법교사나 다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간 뒤에는 당연히 일반 유대인이 등장해야만 합니다. 사라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아주 짧게 한 마디로 끝냈습니다. 그들은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아주 상세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그 사람을 치료하고 돌봐주었습니다. 34절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뿐만 아닙니다. 하룻밤을 거기서 보내고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다친 사람을 더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가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큰 감동을 받으십셨습니까? 그래서 나도 그 사람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십니까? 우리 주변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렇게 극단의 휴머니즘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본인이 직접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오지에 들어가서 원주민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기도 합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라는 단체에 속한 의사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돌아가면서 의료시설이 없는 지역의 사람들을 찾아가서 의료 봉사를 합니다.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 이태석 신부 등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이런 분들을 손에 꼽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분들만이 아니라 숨어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을 베푼 이들도 많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고 하더라도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칭찬 받고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개인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의 후예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무조건 비난받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들과 비슷하게 행동했을 겁니다. 예수님도 이 비유를 통해서 누가 잘하고 누가 못했다는 것을 말씀하려는 게 아닙니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의 삶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갈 수도 없습니다. 복음서에는 이것과 견해가 다른 이야기도 나옵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일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듣더라도 휴머니즘이 넘치는 발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8) 가난한 이들, 즉 강도 만난 이들을 돕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상대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휴머니즘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강도 만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한 질문이 중요합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당연히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싫어한 것 같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교사의 관심은 누가 자기의 이웃인가를 규정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웃이 되어주는 데에 있었습니다.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자기가 중심이 된 관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강도당한 사람이 중심이 되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율법교사와 비슷한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내 관점으로 상대를 봅니다. 주관적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내 편과 너의 편을 나눕니다. 조폭의 의리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어울립니다. 이게 우리의 숙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편이 아닌 대상은 부정하든지 무시하든지 배척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국제 정치나 사회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일상에도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원당리로 들어간 우리 가족은 요즘 곤충과 벌레에 휩싸여 살아갑니다. 특히 모기가 많습니다. 꽃밭이나 텃밭에서 일할 때 모기에 많이 물립니다. 모기가 얼마나 귀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잡풀도 그렇습니다. 정성스레 심은 채소는 잘 자라지 않고 심지도 않은 잡풀은 잘도 자랍니다. 잡풀이 보기 싫어집니다. 이런 게 다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귀찮은 벌레도 없고, 보기 싫은 잡초도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 지구에 기대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입니다.
조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율법교사 수준으로 살기만 해도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에 대한 관심이 그 생각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인용한 두 번째 성경구절인 레위기 19:18절을 보십시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렇게 살기도 힘듭니다. 유대민족이 주변의 막강한 제국 틈바구니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내부의 결속입니다. 내부의 결속은 자기와 통하는 게 많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율법은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등을 사회가 책임지도록 명령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냐?’ 하고 물은 것은 자신들의 이웃 사랑이라는 전통을 자랑하고 싶었던 데에 있습니다. 그런 정도라도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누구에게만 인정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삶은 아무리 고상해도 일정한 대상을 부정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 세 번째로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유대인들도 사마리아 사람은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고착된 세상에는 왕따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과 미워해야 할 대상이 구별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웃이 누군지를 고르지 말고 참된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입니다.
예수가 사마리아 사람이다
율법교사는 이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꿨을까요? 본문은 말하지만 않지만, 바꾸지 못했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눅 18:18-30절에는 어떤 부자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도 오늘 본문의 율법교사와 똑같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잘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근심했다고 합니다. 그게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왜 나름으로 성실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윤리 도덕적인 짐을 지우시는 분이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시어 모든 짐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신 예수님이 또 다른 짐을 맡기실 리는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 본문은 더 궁극적인 어떤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곧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영생을,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웃이라고 생각한 어떤 누구도, 심지어는 가족도, 또한 자기 자신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본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강도 만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은 온갖 상처로 가득합니다. 겉으로는 세련되고 웃고, 뭔가 있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강도 만난 사람과 똑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유일한 이웃으로 경험하셨는지요. 그래서 구원의 빛을 보고 따라가시는지요?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한 교회 안에서 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의 참된 이웃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경험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이미 답이 나왔습니다.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이 있듯이 참된 이웃을 경험한 사람은 세상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습니다. 강도 만났다가 사마리아 사람에 의해서 구원받은 그 사람이,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그 뒤로 어떻게 살아갔을지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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