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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1:1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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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sermon/699422 |
정용섭 목사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성령강림절후 제9주, 2013년 7월21일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3)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우리는 매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찬송가를 부릅니다. 찬송가도 주제에 따라서 종류가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새찬송가>의 제목 분류에 따르면 15개로 나뉩니다. 예배, 성부, 성자, 성령, 성경, 교회 ... 영창과 기도송으로 이어집니다. 전체 645장 중에서 1-62장까지만 예배 찬송입니다. 예배 때 이 찬송가를 부르라는 뜻입니다. 다르게 분류된 찬송가를 부르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예배의 본질에 바로 서려면 예배 찬송을 부르는 게 좋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고 그것을 찬양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찬양을 가리켜서 송가, 또는 송영(doxology)이라고도 합니다.
송영은 일종의 기도문, 또는 신앙고백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런 송영이 많이 나옵니다. 복음서에도 나오고 편지에도 나옵니다. 예컨대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부른 노래가 그런 것들입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49,50) 바울도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읽은 골로새서를 쓰면서 당시 교회가 부르던 송영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송영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 1:15) 이런 송영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각적인 차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간혹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오해의 소지가 큽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은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걸 적나라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큰 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병을 낫게 해주시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병이 나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걸 하나님 경험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사업이 망했다가 다시 좋아졌다거나, 말썽 피우는 남편이나 자식들이 변했다거나, 또는 자기의 죄가 용서받은 확신이 들었다는 경험이 그런 것들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태를 가리켜 성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는데 복잡할 게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입니다. 보통 형상이라는 단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 형태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말을 오해하면 하나님도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헬라어 ‘에이콘 투 데우’의 번역입니다. 에이콘 개념이 중요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에이콘은 likeness(닮음), image(인상), form(형상), appearance(외관), statue(조각상) 등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그는 ...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그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 하고 생각하겠지요.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믿고 있으니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못 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으로 여깁니다. 옳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신학적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나가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초기 기독교에 만연했던 가현설입니다. 여기에 빠졌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만 강조하고 인성은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인간의 모든 모습들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딜레마에 빠진 겁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신이라는 사실과 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에서 인간적 한계를 안고 살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은 실제가 아니라 하나의 그림자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도케티즘’, 즉 가현설입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가현설을 이단으로 배격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삶은 가현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었습니다.
이것으로 가현설주의자들의 문제 제기가 완전히 해결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현설적인 신앙에 물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신과 같은 초능력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물 위를 걷기도 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물론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걸 문자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신과 같은 초능력자라고 한다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질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사람들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을 한 순간에 지상 낙원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 교육도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원하지 않으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역사적 한계를 가현설주의자들처럼 교묘하게 비틀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는 기독교의 믿음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이것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라도 골로새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골로새서의 이 내용과 비슷한 것을 말하는 신약성서의 다른 구절을 몇 군데 보겠습니다. 1) 눅 9:28-36절에는 소위 ‘변화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하고 옷에서도 광채가 났고,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제자들이 ‘예수의 영광’을 보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영광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했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미합니다. 변화산에서의 사건은 예수님에게 신적인 영광이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2) 고후 4:6절은 이렇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얼굴은 단순히 실제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운명 전체를 가리킵니다. 3) 빌 2: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라는 단어는 헬라어 모르페의 번역입니다. 모르페는 nature, form이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신약성경 세 대목과 더불어 오늘 본문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일치하시는 분으로 선포합니다. 그래서 초기 기도교인들은 예수님께 송영을 바친 겁니다.
그 송영의 내용이 오늘 본문 15b절부터 20절까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에 의해서만 근거가 주어집니다. 만물보다 먼저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킨 분이십니다. 송영의 내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전달이 되었지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근원이며 미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죽음이 극복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뚫어본 초기 기독교인들은 만물의 구원을 예수님이 이루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 사실을 송영으로 노래했습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의 지극하고 거룩한 태도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런 송영이 어떤 분들에게는 절실하게 다가올 것이며, 어떤 분들에게는 멀리 느껴질 것입니다. 또는 상투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억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삶을 실질적으로 대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본문 20b절에 나오는 ‘화목’에 대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지를 보십시오. 만물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만물이 하나님과 불화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나 불화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근원이 파괴되었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즐겨도 참된 만족이 불가능합니다. 돈을 벌어보십시오. 사업에 성공을 거둬보십시오. 고상한 취미생활에 전력해보십시오. 세상을 조금만 깊이 성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삶이 얼마나 지루한지 잘 알 겁니다. 거기에 열광적으로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마치 숙취했다가 빠져나온 사람처럼 더욱더 심각하게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느낄 겁니다.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화해되는 걸 경험한 겁니다.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생명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존경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바쳐져야할 송영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쳤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일상의 송영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다 동의하실 겁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믿고 그분을 찬송합니다. 문제는 이런 믿음이 일상에서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골 1:16b절을 읽어보십시오.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런 차원으로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왕권과 주권 앞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당시 로마 황제 체제 아래서 일종의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돌아보십시오. 관공서 앞에 세워놓은 황제 신상 앞에서 절하지 않으면 공무원이 될 수 없었고, 그곳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가 많은 황제들에 의해서 정치적 희생양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어서 카타콤으로 피신해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 송영을 부른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로마 시대와 다르긴 하지만 그리스도 송영을 삶으로 살아내기는 여전히 어려운 시절입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이 오늘의 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두려울 겁니다. 어떤 신자들은 옆에서 보기가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힘들어 합니다. 삶에 지쳐 있습니다. 실제로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건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송영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부자가 되는 것에만 마음이 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물질에 대한 두려움과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돈이 운명을 지배하는 이런 세상에서 당신은 그걸 초월하며 사냐, 하고 묻는다면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가난하면 장마철인데도 위험한 배수관 설치 현장에 들어가서 일하다가 죽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와 같은 나라에서는 부과 가난이 세습되는 실정입니다. 갑과 을의 숙명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이런 나라에서 그리스도 송영의 태도로 사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저도 압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겁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믿음은 이미 손 안에 들어온 것을 믿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여전히 황제가, 즉 자본주의가 왕권을 행사합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사실이 아직은 현실로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전혀 다른 현실을 이미 보고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 그것입니다. 위선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송영을 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사실이 완성될 순간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모여서 그 사실을 찬송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그리스도 송영의 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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