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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361 추천 수 0 2013.08.08 21: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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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1:5-1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sermon/700991 

jys.jpg 정용섭 목사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 11:5-13, 성령강림절후 제10주, 2013년 7월28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저는 몇 년 사이에 기도를 주제로 한 책을 두 권 썼습니다. <주기도란 무엇인가>(홍성사, 2011)와 <매일 기도하라>(한들출판사, 2013)입니다. 앞의 책 머리말에서 저는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설득시키는 영적 태도입니다.” 2012년 한 해 동안 매일 쓴 기도문을 담은 뒤의 책 머리말에서 저는 기도문을 책으로 엮어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동안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수도원 영성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 말고 저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으실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기도 생활을 하시는지요?


복음서는 예수님도 틈틈이 날이 밝기 전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분이 무슨 기도를 드리셨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가 전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 내용만은 나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짐을 가능하면 물리쳐 달라고 하셨고, 이어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체포당하기 전에 드린 기도를 17장에 기록했습니다. 상당히 긴 기도입니다. 이런 몇몇 자료를 놓고 볼 때 예수님이 평소에 드린 기도는 당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과 제자들의 운명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적도 있습니다. 그게 “너희는 ... 이렇게 기도하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주기도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 구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곧 이어서 눅 11:5-8절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친구의 간청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이웃에 사는 친구에게 와서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식구들이 먹으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손님이 왔는데 먹을 게 없었습니다. 요즘이야 24시간 편의점에 가도 되고, 냉장고에도 어느 정도 먹을거리가 저장되어 있으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2천 년 전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은 아마 멀리서 하루 종일 걸어왔겠지요. 피곤하고 배도 고팠을 겁니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야심한 시각에 이웃집 친구를 찾아간 겁니다. 이건 예의가 아닙니다. 친구는 이미 문을 걸어 잠갔고, 모든 식구가 잠이 들은 상태입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떡을 찾아서 준다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절)


이 결론은 우리의 예상과 다릅니다. 우리는 옆집 친구가 부탁을 하니까 그 우정을 생각해서 귀찮지만 일어나 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런 예상과 달리 집주인은 친구의 간청으로 인해서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겁니다. 이런 것만 본다면 이 비유의 가르침은 ‘간청’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간청은 헬라어 ‘아나이데이아’의 번역으로 shameless persistence(부끄러움을 모르는 고집)이라는 뜻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 중에서 이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법 됩니다. 간청기도, 또는 강청기도라는 말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제목으로 된 책도 있습니다. 그런 책은 쉽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그 책의 저자들은 몇몇 성경 본문과 몇몇 개인적인 간증을 곁들여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간구하라고 닦달합니다.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예수님의 비유가 눅 18:1-8절에도 나옵니다. 그 대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과부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에게 갔습니다. 처음에 재판장은 과부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과부가 계속해서 찾아오자 어쩔 수 없이 과부의 요청을 해결해주려고 마음을 바꾸었다는 겁니다. 요즘처럼 기도 냉소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치 부모를 완전히 신뢰하는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그리고 간청의 방식으로 간구하는 신앙적인 태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바람직하고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런 성경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식으로 기도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주여, 삼창’으로 기세를 올리는 식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의 어떤 목사님은 해외 선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설교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승합차의 크기와 색깔까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응답받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런 분위기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청년들 중에는 결혼 대상자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방식으로 기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키, 연봉, 취미 등등, 마치 결혼정보 회사의 요구와 비슷한 항목을 놓고 기도합니다.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도가 부족하다고 자책합니다.


본문에서 아나이데이아(간청)에 초점을 두면 곤란합니다. 염치없이 무조건 매달리는 것은 당연히 잘못입니다. 야밤에 옆집 친구 집을 찾아가서 떡을 빌려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걸 잘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본문에서 핵심은 떡을 빌리러 온 사람이 아니라 집주인입니다. 집주인은 무례한 친구의 ‘요구대로’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에서 집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비유에서 무례하게 간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에 초점이 있습니다.


간청 기도나 그걸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나, 결국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 그렇게 생각해도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철없이 간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니까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즉 기도의 영성이 무엇인지는 알고 기도해야겠지요. 자식들도 철이 없을 때는 부모에게 떼를 쓰듯이 무언가를 요구하지만, 그래도 부모들은 지는 척하고 들어주지만, 철이 들면 부모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신앙적으로 철이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 알고 기도하고, 제대로 알고 예배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적 철이 들려면 성경을 바르게 읽고 배워야 합니다.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

야밤에 찾아온 친구에게 떡을 주었다는 사람에 대한 비유가 끝난 뒤에 예수님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풀어주십시오. 그것을 잘 읽으면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9절과 10절에는 똑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대로 주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멋진 표현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기도하는 자세를 이것보다 더 멋지게 표현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이 표현은 앞에서 친구 비유에서 나온 간청이라는 단어와 그 느낌이 비슷하게 들립니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리듯이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뭔가 자신감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뭔가를 얻은 경험을 하기도 하고, 또한 그런 경험을 통해서 신앙적으로 풍성해지기도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본문 말씀을 좀더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라는 말씀을 하신 뒤에 이렇게 보충해서 설명하십니다. 생선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뱀을 줄 아버지는 없고, 알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전갈을 줄 아버지는 없다는 겁니다. 결론 13절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 핵심입니다. 사람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줍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신뢰가 기도의 토대라는 겁니다.


이런 표현이 너무 상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좋은 것만 주는 게 아니라고 느낄 때도 많습니다. 우리 자신과 주변에 불행이 일어납니다. 삶 자체가 힘들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게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좋은 것이라는 판단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판단은 일시적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뭐가 좋은 것인지 잘 모릅니다. 우리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런지는 잘 모릅니다. 목회자인 저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작은 불행이야 지나가면 좋을 일이 될 수 있겠지만, 정말 큰 불행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선천적 장애라거나 자식들이 부모 먼저 죽는 참척의 고통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일 앞에서 저도 더 이상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그분으로부터 대답을 들으십시오. 다만 저는 오늘 본문 13절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찾은 하나의 대답을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을 하면서 ‘성령’을 거론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절) 이 대답은 좀 뜬금없는 듯이 들립니다. 문장 흐름에서 볼 때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을 준다고 합니다. 성령이 좋은 것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성령은 바로 앞에서 제가 대답하기 어렵다고 말씀드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까지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영적으로 뚫어보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견딜 수 없는 고난과 불행까지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자기합리화나 말장난은 아닐까요?


지난 대구샘터교회 수련회 때의 주제는 ‘팔복, 깊이 읽기’였습니다. 마 5:1-12절에는 나오는 팔복 문장은 헬라어 성경에서 각각 ‘마카리오이...’로 시작됩니다. ‘복되어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운명은 실제로는 복된 운명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울고, 배고프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복된 이유는 그들의 실제적인 운명이 복지의 차원에서 잘살게 된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의 힘에 결탁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생명의 힘은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부활의 능력이고 종말의 힘입니다. 그런 생명의 힘에 대한 인식과 경험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생명의 능력인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과 삶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본문의 말씀은 옳습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처럼 하나님께 투정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구하라

이제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구해야 할 것, 찾아야 할 것, 두드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로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성령이여, 오소서.”(Veni Sancte Spiritus)라고 기도하고 노래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이 임한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그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각각의 경험이 다를 겁니다. 성령 운동을 하는 분들을 보면 뭔가 비현실적인데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령을 주술적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무당들이 초혼제를 올리듯이 우리가 성령을 마음먹은 대로 불러내는 건 아닙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입니다. 당신 자신의 자유로 활동하십니다. 성령이 오시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거룩한 영, 생명의 힘에, 즉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니 그런 염려를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그러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명령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31-34).


그 명령과 약속은 오늘 본문에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즉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러면 그 나라가 우리에게 올 뿐만 아니라, 그때서야 우리 삶에서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설명이 막연하게 들리시나요?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우리가 곧 죽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전념하십시오. 그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예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겁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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