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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삿18: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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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사사기(41) 실패 앞에서 정직하십시오 (사사기 18장 1-10절)
< 바른 분별력을 가지십시오 >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 단 지파는 스스로 자기들의 살 길을 찾아서 거주할 땅을 찾고 있었습니다(1절). 원래 단 지파는 여호수아 때 거주할 땅을 분배 받았지만 분배 받은 땅에서 원주민인 아모리 족속에 의해 쫓겨나 타 지파의 땅에 분산해서 거주하거나 왕이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거주지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결국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거주지를 찾아 5명의 정탐꾼을 북쪽 라이스로 보냈습니다.
라이스 사람들은 염려 없이 평온하고 안전하고 부유하게 살면서 주변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으며 살고 있었습니다(7절). 그런 라이스의 상황을 정탐한 후 돌아오자 소라와 에스다올의 형제들이 물었습니다(8절). “그곳 상황이 어떤가?” 정탐꾼들이 말했습니다.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그 땅을 보니까 매우 좋았다. 가만히 있지 말고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다(9-10절).”
그들의 말을 보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던 것처럼 라이스 땅을 자신들의 손에 넘겨주신 것처럼 믿음의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단 지파의 전쟁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정욕을 쫓아 행한 전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기업으로 받은 땅조차 지키지 못하고 또한 우상숭배에 깊이 젖은 상태에서 마치 성전을 수행하듯이 하는데 얼마나 앞뒤 상황이 맞지 않는 분별력 없는 태도입니까?
가끔 보면 자기 정욕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라고 자주 말하는 사람들은 봅니다. 분별력 없는 공허한 말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나중에 단 지파는 라이스를 정복하고 그 성공적인 정복을 자축하며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성공했다.”고 자축했겠지만 외적인 성공이 하나님 편에서도 성공은 아닙니다. 복된 삶을 살려면 바른 성공을 잘 분별해내야 합니다.
< 실패 앞에서 정직하십시오 >
요새 사람들은 경제문제로 성공여부를 따질 때가 많습니다. 물론 경제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문제는 더 중요합니다. 경제문제에서 성공했어도 인간문제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 성공은 허무한 성공입니다. 요새 지도자가 경제 문제에서 성공을 이루면 성공적인 지도자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경제 문제로 인간 문제를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성공해도 후유증이 큽니다. ‘성공적인 지배자’와 ‘위대한 지도자’는 다릅니다.
헤롯은 사악하고 못된 왕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헤롯은 당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장본인이었습니다. 옛 도시를 복구했고 항구를 손질했으며 원형극장과 화려한 목욕탕을 만들었고 또한 군사 요새를 만들고 증축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우입니까? 건설과 번영의 명분 아래 잔인한 전횡을 일삼으며 그것을 비판하면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폭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제가치를 생명가치보다 앞세우면 나중에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헤롯의 삶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로마의 주구 헤롯은 여우처럼 왕좌를 훔치고 호랑이처럼 다스리다가 개처럼 죽었다!”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이름입니까? 인간 가치가 무시된 경제 가치는 큰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가치가 무시된 경제적 성공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입니다. 그런 과거의 역사를 ‘실패의 본보기’로도 삼을 줄 알아야 새로운 도약과 차원 높은 복된 성공이 가능하게 됩니다.
성경이 왜 위대합니까? 인간의 실패 앞에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위인들의 잘못이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인류의 중시조인 노아가 술 먹고 취해 벌거벗은 얘기도 그대로 적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로 속인 사실도 그대로 적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이란 다윗의 비겁한 모습과 수치들도 여과 없이 기록합니다. 성경은 위인들의 위대성을 증폭시키려고 그들의 수치를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성공의 본보기’만큼 ‘실패의 본보기’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독재자는 하나같이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미화하여 없는 사실까지 있는 사실로 둔갑시키고 자신을 우상화합니다. 그런 맹목적인 미화와 맹목적인 긍정주의는 역사적 발전을 후퇴시킵니다. 바른 긍정주의는 필요하지만 부분별한 긍정주의는 수많은 후유증을 낳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현재의 반면교사로 삼으려는 노력이 없다면 고난과 질곡의 역사 속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고 또 다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는 사람들만 늘어날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후대에게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기성세대의 의무입니다. 그런 의무에서 야무진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역사를 너무 감상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역사의 왜곡을 돕게 됩니다. 현실을 직시한 상태에서 칭찬과 격려는 필요하지만 현실을 왜곡하게 하는 지나친 미화는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은 실패 앞에서 정직할 때 무한한 가능성도 생기게 됩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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