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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1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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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 http://www.john316.or.kr |
이단 신앙의 4대 특징 (마태복음 7장 15-23절)
어느 날, 한 목회자가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꿨습니다. 모 세처럼 구름 떼와 같은 거대한 무리를 이끌고 신천지로 가는 꿈이었습니다. 그 장엄하고 신비한 장면이 너무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느껴져서 꿈에서 깨어나서도 흥분이 한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그 꿈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당분간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꾸 그 얘기를 하면 스스로 자기우상화의 착각에 빠질 수도 있고 듣는 사람들도 미쳤다고 여기거나 돈키호테처럼 여길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얘기에 푹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여러 비정상적인 행태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노파심 때문에 그 목회자는 입에 자물쇠를 달고 몇 년 동안 그 꿈 얘기를 감추고 있다가 몇 년 후에 설교할 때 바른 신앙을 도전하면서 처음 그 꿈 얘기를 꺼냈습니다. 얼마나 조심스런 모습입니까? 사람은 본능적으로 우상을 찾고 우상을 만드는 경향이 있기에 그런 우상화본능을 우상숭배자나 우상숭배 대상자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뒤따르게 됩니다.
어느 날, 한 미국인이 천국 가는 꿈을 꿨습니다. 상당히 생생한 꿈이어서 그 얘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했습니다. 그때 대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는데 몇 명은 그 얘기에 푹 빠져서 남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대중들이 천국을 봤다는 그 사람을 우상화하고 자기들 등에 태우면서 그는 마치 호랑이 등에 탄 ‘기호지세(騎虎之勢)’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호랑이 등에 타니까 힘이 있어 보이고 기분도 좋아지면서 도취에 빠져 속으로는 내려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리기 싫었습니다.
결국 자기우상화의 맛에 들려 점점 그는 본격적으로 집회를 다니며 자기가 본 천국 간증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와 자기 상상까지 더해서 천국을 더 자세히 묘사해주자 사람들이 더 몰려왔습니다. 그렇게 미혹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몰려오자 교회도 안 다니던 그가 교회를 차리고 책도 내고 외국까지 가서 천국 간증 집회를 했습니다. 그 집회에 벌떼처럼 모인 세계 유일한 국가가 있었는데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냉철해졌지만 한때 우리나라는 엉터리 외국인 간증집회자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이걸 훈장으로 여겨야 합니까? 자기 나라에서는 지진아나 돈키호테로 취급되던 사람이 한국에 와서 “21세기의 신사도! 천국의 증거자! 능력의 치유자!”로 띄워진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최고로 공부를 하고도 최고로 영어를 못하는 우리 민족이니까 영어를 하는 사람이 간증집회를 하면 무조건 대단한 사람이 설교하는 줄 알고 열심히 집회에 몰려왔습니다.
결국 한국을 숙주로 삼아 명성도 얻고 헌금도 챙겨서 자기 나라인 미국, 남미,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진짜로 뜬 벤처 간증자와 벤처 치유자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 거짓 능력자들의 숙주 역할을 하는 우리 민족의 신앙형태를 좋게 봐주어야 합니까?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되고 그런 사람들의 실체가 전해지면서 잘못된 벤처 간증자나 벤처 치유자이나 벤처 신사도들을 분별해내는 검증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작동되고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런 집회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결국 그런 벤처 간증자들과 벤처 치유자들과 벤처 신사도들이 교회를 차립니다. 그리고 우상화본능을 이용하는 재미를 맛보았기에 자신을 우상화하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계속 대중을 모으고 점점 교회를 키웁니다. 게다가 그 큰 교회 담임목사란 타이틀이 주는 권력과 금력의 꿀맛까지 체험하니까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계속 그런 식으로 호랑이 등에 타고 달리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불장난입니까?
그때는 호랑이 등을 예비한 자도 망하고 호랑이 등에 탄 자도 망합니다. 그처럼 우상화의 본능을 버리지 않으면 다 망합니다. 진정으로 복된 존재가 되려면 호랑이 등을 예비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태우는 나귀 등을 예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느 날, A 목회자가 병자를 위해 기도해주는데 병자가 기적적으로 낳았습니다.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때는 겸손하게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게 무슨 소문날 일입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누구나 그런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A 목회자는 사람들이 몰려오자 점점 자기가 기도해주면 낳는다고 본인도 착각하고 그런 식으로 선전까지 했습니다. 그런 선전에 미혹되어 몰려가면 결국은 같이 파멸의 길로 가게 됩니다.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날 때부터 발을 못 쓰는 사람을 걷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들을 신으로 경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무리 가운데로 뛰어들며 옷을 찢고 소리쳤습니다. “여러분들! 왜 이런 일을 하시오.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오.” 그들은 자신들이 숭배되는 것이 얼마나 큰 신성모독의 죄인지 잘 알았던 것입니다.
호랑이 등에 타면 기분이 좋습니다. 게다가 호랑이가 내달리면 더 기분이 끝내줍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내리고 싶어도 그때 내리면 죽을 것 같으니까 계속 타고 달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무서운 심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호랑이 등에서 빨리 내려와야 합니다. 한참 달리는 상황이라서 그때 내리면 죽을 것 같아도 그때라도 내려야 합니다. 그러면 신나는 일이 적고 대중들로부터 멀어져도 그때부터 다시 복되고 안전한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 원리를 알았기에 우상화를 조장하면 전도가 훨씬 쉬워질 것을 알았어도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우상화의 본능을 억제하고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면서 자기들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과 오늘날 “치유의 종! 능력의 종! 21세기의 신사도!”라고 선전하는 사람들과 비교해보십시오. 진지하게 비교했다면 앞으로 영혼을 파멸시키는 그런 곳에는 절대 가지 마십시오. 사람을 우상화하는 곳으로 가는 것은 죽음과 심판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의 손길을 통해 주어지는 기적을 너무 바라지 마십시오. 자신 안에 기적의 원천이신 성령님이 있기에 결국 자신이 기적의 도구이고 기적의 통로입니다. 매일 작은 암세포가 3백 개 생겨도 자기 몸이 알아서 다 기적적으로 치유합니다. 잘못된 식사와 스트레스로 위에 상처가 생겨 체증이 생겨도 식사를 줄이고 평안 가운데 몸의 자정능력을 신뢰하면 어느덧 기적적으로 상처가 아물게 됩니다. 그런 숨은 기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기적이 이미 몸 내부에서 일어났기에 건강한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건강이 최고의 기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든 후에 능력자의 기도로 나아야 기적인 줄 아는데 그 기적은 2급 기적입니다. 오히려 병들지 않는 것이 1급 기적입니다. 그런데 미신적인 사람들은 미신적인 습성 때문에 분별력을 잃고 영적인 가치관이 전도되어 1급 기적을 2급 기적으로 여기고 2급 기적을 1급 기적으로 여깁니다. 그런 잘못된 분별력 때문에 기적 장사와 치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이용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누구나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기적은 수시로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된 후 그 기적을 팔아 돈을 모으고 우상화를 조장하는데 써먹지 말아야 그 기적이 하나님이 주신 바른 기적입니다. 기적으로 돈을 모으고 우상화를 조장하는데 써먹으면 그 기적은 사탄의 기적입니다.
사탄은 기적으로 예수님까지 유혹했습니다. 그 사실을 늘 기억하고 기적을 준다는 집회를 너무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특히 기적을 크게 선전하는 곳에는 절대 가지 마십시오. 그런 태도는 눈앞에 것만 얻어내려고 자기 영혼을 황량한 벌판에 내던지는 불행한 선택입니다. 이제 사탄의 기적을 추구하는 본능과 그런 대중들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는 결단을 내리고 오직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보십시오. 그때서야 진짜 하나님의 기적이 주어지고 반전의 축복이 시작될 것입니다.
< 이단 신앙의 4대 특징 >
우상숭배는 공허하고 무익한 일입니다. 생산성도 없고 윤리적 유익이나 사회적 유익도 없고 영적 유익도 없습니다. 정신건강에도 해롭습니다. 불안 때문에 점집을 찾았다가 수천 만 원을 날리고 자살을 시도한 주부를 보십시오. 이단의 계속된 협박과 공갈에 재산을 다 빼앗기고도 두려워서 그 이단을 떠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단은 처음부터 멀리하십시오. 어떻게 멀리합니까? 먼저 이단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이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 겉과 속이 다릅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단들은 겉으로는 선한 양처럼 보여도 사실은 양을 잡아먹으려고 노리는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늑대가 사슴을 사냥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치밀하고 집요합니다. 계속 사슴 떼를 바라보며 공격 기회를 엿보다가 약한 것이나 무리에서 이탈한 것 등 공격대상을 찾으면 일제히 달려들어 숨통을 끊어놓습니다. 그처럼 이단들은 치밀하고 집요하게 영혼 사냥감을 찾습니다.
특히 이단들은 기존 교회의 틀을 비판하며 공격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기존 교회의 틀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보수주의(保守主義)에는 보수(補修)할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단들의 목적은 보수와 시정에 있지 않고 기존 교인들을 빼앗아가려는 것에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짜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동기에서 나온 비판은 겸손히 수용해야 하지만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을 빼앗으려는 비판은 그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리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비판해도 교회를 존중하는 기본 틀은 지켜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 기도 시간에 같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았지만 성령 충만하다고 해서 기존의 성전 중심적인 틀을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그 점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은사와 능력을 받았다고 해서 기존의 특과 질서를 무시하고 무조건 새로운 것만 내세우면 안 됩니다. 그런 태도에 영합해서 이단의 미혹에 넘어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보지 말고 내면의 모습과 의도와 동기를 잘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2. 열매가 나쁩니다
본문 16-1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열매가 참된 성도 여부를 나태는 핵심요소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0절에서도 한 번 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또 강조했습니다.
이단 리더들을 보십시오. 대개 보면 성령의 열매를 무시하고 엉터리 논리와 교리에 집착합니다. 또한 사고도 대개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헛된 논리가 탄로 나지 않도록 다른 말씀은 전혀 못 듣게 하고 경건서적도 못 보게 합니다. 김일성은 독재자라고 제일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은 김일성처럼 행동합니다. 또한 이단들은 재산을 다 털어 바치게 하고 지켜야 할 비밀도 많고 비밀 모임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만 봐도 “여기는 정상적인 곳이 아니구나!”라고 깨달아야 하는데 그 깨달음이 우상화의 본능에 매몰된 것입니다.
또한 이단들은 땀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성도가 언제 들림 받습니까? 밭에서 일하다가 들림 받고 집에서 맷돌 갈다가 들림 받습니다(마 24:40-41). 그처럼 일상의 삶도 잘해야 하는데 이단들은 일상의 삶이 정상이 아닙니다. 삶이 정상이 아니면 신앙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처럼 이단들은 입으로는 누구보다 잘 믿는 것처럼 고백하고 선전하지만 중요한 것은 삶의 열매입니다. 그런 열매가 없다면 그가 주장하는 믿음과 은사는 쇼맨십이고 착각일 뿐입니다.
3.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단들은 말로만 “주여! 주여!” 하고 행동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의 고백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입술의 고백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짜 고백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이 없는 그럴듯한 말에 속지 마십시오.
또한 누가 영해라고 해서 신기한 성경해석을 해도 거기에 빠지지 마십시오. 어떤 이단 교주는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제자들이 잡은 153마리의 고기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러분! 그 153의 뜻을 아십니까? 마가다락방에서 몇 명이 기도했습니까? 120명이죠. 예수님이 몇 년을 사셨습니까? 33년이죠. 그 두 숫자를 더해보십시오. 153이 되지요? 그 153은 예수님이 세상에 사신 후에 마가다락방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이어질 것을 뜻합니다.”
언뜻 들으면 신기한 해석 같으니까 마구 박수를 치면서 웅성거립니다. “야! 신기하다! 어디서 저런 깊은 영해가 나왔을까?” 그것을 영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문제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그게 억지로 뜯어 맞춘 얘기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지 무슨 영해입니까? 다락방의 120명과 예수님의 33년 생애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일단 숫자가 맞으니까 신기하게 여기고 아멘과 박수가 터지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그런 성경 해석을 성경을 잘 쪼갠다고 표현하는데 그러다가 성경을 진짜 쪼개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잘못된 해석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물론 이단도 때로는 진리를 말하고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속입니다. 영혼을 노략할 수만 있다면 성경도 인용하는 존재가 바로 사탄입니다.
거짓 선지자도 얼마든지 설교를 잘할 수 있습니다. 개그에 탁월한 사람이 부흥사들의 비디오 설교를 보고 자기 설교로 재단한 후 탁월한 웃기는 재능으로 설교하면 어느 목회자보다 더 재미있게 잘 설교할 것입니다. ‘입의 설교’보다 ‘삶의 설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내세워 신기한 말을 해도 그가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가를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이단에 넘어갈 확률을 현저히 줄일 수 있습니다.
4. ‘예수 이름’을 남발합니다
본문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 구절에서 “주의 이름으로!”란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종말의 날이 되면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이 창궐해 “예수 이름으로!”를 입버릇처럼 수시로 내세우면서 선지자인 척 하고 치유자인 척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라고 하며 사탄을 쫓아내고 치유를 일으킨다고 하면서 크게 성공하니까 나중에는 동네 장삼이사(張三李四)들도 다 흉내 내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란 말을 습관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귀신을 쫓아내는 일종의 주문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도 행한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한국 교인들은 얼마나 체험에 약합니까? 체험만 있으면 장땡인 줄 알고 분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체험이 진짜 하나님이 주신 체험이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사울 왕도 선지자처럼 예언해서 이런 속담까지 생겼습니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었어?”(삼상 10:11) 가룟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파송되어 주님의 이름으로 각종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예수 이름으로!”란 말을 주문처럼 남발하게 유도하는 사람을 특히 주의하십시오.
< 자신의 영혼을 지켜내십시오 >
이단 신앙에 미혹된 결과는 비참합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단 신앙에 빠지면 그 동안의 모든 신앙생활이 헛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결국 이단에 빠지는 것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저주하는 행위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이단과 점쟁이와 거짓 선지자는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아서 사라져줬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은 스스로 지켜내야 합니다. 지금도 각종 이단과 예수 점쟁이들이 영혼을 노략하려고 정직한 성도들의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얼마나 기발하게 접근합니까? 그들로부터 자기 영혼을 지켜내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점치는 예수 점쟁이들을 멀리하고 성경의 기초 지식도 없는 교주가 멋대로 풀어 놓는 말을 신비한 영해인 줄 알고 따르는 부주의도 없게 하십시오.
지금 한국 교회를 ‘이단의 무리’인 이리가 무섭게 공격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단자와 거짓 예언자와 거짓 신사도들이 자기를 우상화시키는 말과 거짓 능력으로 유혹할 때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그들을 멀리하십시오. 멀리해야 할 사람은 멀리해야 합니다. 사도들도 원수는 사랑했지만 이단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그랬고 ‘사랑의 사도’란 별명을 가진 사도 요한도 이단만은 단호하게 정죄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보고 “어떻게 사도들이 그럴 수 있어!”라고 사도들에게 시험 들지 마시고 그렇게까지 하는 모습이 주는 메시지의 엄중함을 느끼십시오.
어느 날, 사도 요한은 제자들과 공중목욕탕에서 목욕하다가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 이단자가 목욕탕으로 들어오자 깜짝 놀라면서 외쳤습니다. “제자들아! 이단자가 들어온다! 속히 이곳을 떠나자!” 왜 사랑의 사도가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이단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의 서신에는 이단을 무섭게 질타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특히 요한이서 10-11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단자는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원수는 사랑해도 이단자는 사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단자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지나친 영적 호기심을 가지고 이단 집회를 찾아다니지는 마십시오. 그 결과는 영혼의 파멸밖에 없습니다.
느헤미야 6장에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의 무리들이 느헤미야를 해치려고 계속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내가 이 큰 역사를 어떻게 중단하고 가느냐?”고 하면서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갔으면 성벽 재건도 못 이루고 암살되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이단자에게 가지 말고 자기 영혼을 힘써 지키십시오.
어떻게 이단으로부터 영혼을 잘 지킵니까?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에 관한 본문 말씀을 한 후 바로 이어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산상수훈을 끝냅니다. 즉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되 특별히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많이 보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기를 힘쓰십시오. 이단이 자꾸만 논쟁하려고 하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많이 보십시오.”라고 한 마디만 해주고 그와의 논쟁을 피하십시오.
은혜를 소낙비처럼 받겠다고 너무 밖으로 나다니지 마십시오. 특히 예수님이 말씀한 본문에 나온 이단자의 특징을 반면교사로 삼으십시오. 그래서 내면의 진실함을 보는 시각을 세심하게 기르고, 좋은 열매를 맺기에 더욱 힘쓰고, 말만 앞서는 신앙을 주의하며, 특히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주문처럼 사용하거나 사칭하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을 최대한 높이는 삶을 통해 자기 영혼을 지키고 교회도 지키면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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