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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19:2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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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3.7.10 http://www.john316.or.kr |
사사기(49) 상황논리에 빠지지 마십시오 (사사기 19장 26-30절)
기브아의 불량배들에 의해 레위인의 첩이 죽자 레위인은 그녀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자기 거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칼로 첩의 시체를 열두 덩어리로 만들어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냈습니다(29절). 그 시체 조각을 본 각 지파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고 그 일에 대해 강력히 대처하려고 전체 이스라엘 총회를 소집했습니다(30절). 기브아 사건이 주는 여러 교훈들이 있지만 그 중에 2가지만 생각해보겠습니다.
1. 역사의 교훈을 받으십시오
기브아 사건은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 사건을 재현한 것 같습니다. 과거 소돔인들은 호모섹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절했고 그래서 사해가 생겼습니다. 사해는 기브아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기에 기브아 사람들은 자주 사해를 지나치면서 역사적인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중에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전 지파가 거의 멸절되는 심판을 받은 것은 그들의 호모섹스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결국 기브아 사람들의 역사의식은 거의 빵점이었습니다.
흔히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많이 언급되는 사회일수록 역사적인 전환기의 시대입니다. 사사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처럼 역사의식을 가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자세가 오늘의 삶의 태도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역사의식은 미래 역사의 성패를 좌우하고 더 나아가 개인 축복의 성패도 좌우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에 실패할 때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팔자소관이지!”란 숙명론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실패의 원인이나 의미를 성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업을 할 때는 한 번 더 행운을 붙잡으려고 운명과 팔자 앞에서 자기의 내일을 걸고 도박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 실패는 그 부분의 잘못 때문이야!”란 성찰적인 역사인식을 가지고 다시 사업을 할 때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자기 성찰적인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아무리 성찰을 잘해도 내일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섭리적인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이 실패가 주는 교훈을 잘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 실패를 통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줄 믿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역사의식을 가지고 실패가 주는 교훈을 성찰하면서도 그 실패를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새롭게 결단하고 나갈 때 그의 미래는 복된 방향으로 현저하게 달라지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2. 상황논리에 빠지지 마십시오
기브아 사건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충실하게 살려고 했었던 친절한 노인이 레위인을 보호하려는 선행을 위해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불량배들의 능욕 대상으로 내주려는 악행을 저지르려고 했었던 점입니다. 아마 그 노인은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논리를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믿고 끝까지 불량배들과 대항했어야 합니다.
살다 보면 그런 상황논리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이 주일예배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주일을 잘 지키고도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물질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그런 상황논리들이 많이 얘기됩니다. 실제로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어요.”란 말로 물질적인 문제에서 불의와 타협하는 상황을 변명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난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면 가장 큰 이유는 가난이 배고픔의 고통을 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난을 새로운 창조의 기반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가난을 불평하고 한탄하며 비굴함이 몸에 배인 모습으로 사는 강우도 많이 목격합니다. 그러나 가난해도 비굴하게 살면 안 됩니다. 가난해도 바르고 진실하게 살려는 거룩한 오만이 있어야 합니다. 결코 상황논리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물론 지속적인 가난의 공격을 받으면 비굴하게 되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보통 인간의 한계 밖에 있는 성인의 영역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난을 탈피하려는 실제적인 지혜를 구하고 실제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굳이 하나님의 축복을 억지로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로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살 수 있다면 그 부는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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