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겔1:1-22 |
---|---|
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3.7.29 ⓒhttp://www.john316.or.kr |
성도에게 저주란 없습니다 (에스겔 18장 1-22절)
얼마 전에 한 온라인 새벽기도 회원이 전화로 상담 요청을 했습니다. 저는 전화상담의 경우에는 보통은 최대한 정중하게 사절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식의 부족 때문입니다. 형편과 사정을 잘 모르면서 말 몇 마디만 듣고 쉽게 결론을 내려주는 것과 같은 피상적인 상담은 잘못된 결과를 낳을 때도 많습니다. 상담을 가볍게 요청하거나 가볍게 요청에 응하는 것은 가벼운 인생을 만들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 부족도 문제입니다. 개인적인 상담을 다 받으면 거룩한 비전을 향해 나가는 길에서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부실해질 때가 많습니다. 또한 상담의 효과에 대해 그렇게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이유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과의 상담보다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귀를 기울이면 확실히 더 좋은 지침을 얻습니다.
자세히 보면 상담 요청자가 스스로 이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아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용서하면 된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해결책이다!”라는 것을 본인도 압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런 처지에서 용서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이유를 대보세요!”라는 식으로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고 상담을 받는 것은 해결을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러다가 상담 중독까지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는 사실을 마음을 열고 실천하는 삶’이지 ‘아는 사실을 마음에 들게 분석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처럼 상담을 피하고 싶은데 그분은 꼭 제 의견을 듣고 싶다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교회는 십일조가 차고 넘칩니다. 구약 시대에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레위 지파가 평균수준의 삶을 살도록 나머지 지파들이 10분의 1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십일조가 차고 넘치니까 자꾸 불필요한 곳에 재정을 쓰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개척교회들은 사역자의 기본 생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저는 얼마 전부터 십일조를 다른 곳으로 보냅니다. 잘못하는 것입니까?”
난처한 질문이었습니다. 나누려는 마음은 칭찬 받을 만합니다. 한쪽은 너무 풍성하고 한쪽은 너무 부족하니까 자기 십일조를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 작은 도구’로 삼아 뜻 깊게 사용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때 그분은 “잘했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일정한 책임을 지는 문제도 중요하기에 “잘했다!”고 쉽게 말하기도 곤란해서 그냥 여러 가지 원론적인 말씀만 드렸습니다.
가장 복된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교인은 자기 교회에 기쁘게 헌금하고 교회는 어려운 이웃과 뜻 깊은 일을 위해 힘써 나누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공평과 정의와 사랑과 책임’의 문제가 다 충족됩니다. 그런데 넘치는 십일조로 땅을 사고 건축하면서 외적인 성장만 도모하니까 자기 십일조가 잘 쓰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고민 끝에 자기라도 공평과 정의와 사랑에 작은 일조를 하겠다고 십일조를 다른 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각성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런 작은 몸부림들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배부르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나누고 싶은 양심’도 함께 있습니다. 그때 나누고 싶은 양심이 승리할 때 영혼은 더 보람과 행복을 느낍니다. 그 나눔의 열정을 교회가 앞장서서 격려하면 교인들도 행복하지만 하나님도 그 교회를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자발적인 나눔은 공평과 정의를 이루게 하는 최선의 통로입니다.
188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은 ‘선교’를 핵심 가치로 삼아 선교하면서 지금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선교를 잘하는 공동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재정 관리를 잘합니다. 저희 소속 선교사님들은 개별적으로 성도들로부터 직접 후원금을 받지 않고 꼭 저희 선교단체를 통해 후원금을 받습니다. 사역의 투명함을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도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한 가지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선교사님들에게 후원금을 보내면 선교사간에 큰 편차가 생깁니다. 오래된 선교사와 신참 선교사의 편차, 사역 규모가 큰 선교사와 작은 선교사의 편차, 선교보고를 환상적으로 잘하는 선교사와 그렇지 않은 선교사의 편차가 있어서 어떤 선교사님은 상당히 많은 후원을 받지만 어떤 신참 선교사님은 매달 오십만 원도 후원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편차를 그대로 두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깁니다.
또한 어떤 문제로 특별헌금을 할 때도 개인적으로 직접 후원하면 선교단체에서는 그 선교사님이 얼마를 후원받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필요 이상의 중복후원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후원은 가급적이면 지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희 선교연맹은 그 원칙을 비교적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래서 작년에도 저희 선교연맹과 산하 후원단체의 후원금을 전 세계 약 천 명의 선교사에게 공평하고 적절하게 나눠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이 많아 직접 선교사님들에게 후원하고 싶어 합니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면 선교보고 기회가 많은 선교사님은 이중 삼중으로 후원받고 그렇지 못한 선교사는 후원을 잘 못 받을 수 있기에 선교단체를 통한 후원이 바람직합니다. 저와 아주 가까운 한 신실한 선교사님은 늘 저희 본부로 후원금을 보내라면서 자기보다 다른 더 어려운 선교사님을 위해 도우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그 모습을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눔을 통해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 죄의 연대책임은 없습니다 >
본문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잘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에스겔 당시에 이런 속담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게 된다.” 즉 아버지가 잘못하면 그 죗값을 아들이 치른다는 속담입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 말씀은 마치 부모의 죗값을 자녀가 치르게 된다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은 자녀가 부모의 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것은 공평과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고 성경의 기본 진리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각자의 심판은 각자의 죄 때문에 받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아비의 죄로 인해 자녀가 죗값을 치른다는 속담은 전혀 진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4절에서도 하나님은 부모의 죄로 인해 죄 없는 자녀가 심판받아 죽는 일은 없고 오직 자기 죄로 인해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성도에게는 죄의 연대책임도 없고 가계에 흐르는 저주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위장한 변형된 굿이나 신령한 영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그 저주는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오직 자기 죄로만 심판을 받습니다. 그 사실을 생생하게 교훈하려고 본문 4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합니다.
어떤 의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간음도 하지 않고 월경 중의 여인을 멀리하며 정결함을 지켰습니다(5-6절). 또한 남을 학대하지 않고 빚진 자의 저당물을 빼앗지 않고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주었습니다(7절). 또한 그는 이자놀이를 하지 않고 손으로 죄를 짓지 않았고 진실하게 판단하며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의인은 반드시 산다고 말씀합니다(8-9절).
반면에 그의 아들은 아버지처럼 선하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하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남의 것을 강탈하고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고 이자놀이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악한 아들은 의로운 아버지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죽어서 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10-13절).
반면에 그 악한 아들의 아들은 아버지의 악행을 보고 두려워해서 우상숭배도 하지 않고 간음도 하지 않고 남을 학대하지도 않고 저당물을 강탈하지도 않고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고 벗은 자를 입히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않고 이자놀이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례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악한 아버지의 죄 때문에 죽지 않고 반드시 살고 그의 악한 아버지는 동족에게 행한 악한 죄로 죽는다고 했습니다(14-18절).
그처럼 아들이 아버지의 죄 때문에 심판받거나 아버지가 아들의 죄 때문에 심판받지 않고 의인의 선행에 대한 보상도 자기가 심은 대로 받고 악인의 악행에 대한 보응도 자기가 심은 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19-20절). 그런데 악인이 죄를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죽지 않고 그의 범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않고 그가 행한 공의로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21-22절). 이 말씀은 회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줍니다.
< 심은 대로 거둡니다 >
본문이 주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심은 대로 자기가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무속신앙에서는 조상의 죄를 들먹이며 가계에 흐르는 저주 얘기를 자주 합니까? 그렇게 두려움을 심으면 영혼의 통제가 쉽고 복채의 단물을 빨아먹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부모가 죄를 지었거나 이름을 잘못 짓거나 묏자리를 잘못 잡았거나 사위나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 삼대가 줄초상 나는 일은 없고 오직 자기 죄로만 심판을 받습니다.
남의 죄로 연대책임을 지우는 것은 독재적인 욕심 많은 리더들이 자주 애용하는 잔인한 리더십입니다. 그러나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은 죄의 연대책임을 지우지 않습니다. 남의 죄 때문에 주변에 나쁜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은 있지만 그런 나쁜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선한 영향력을 만들어 복된 길로 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성도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식이 분명한 책임적인 성도는 핑계하거나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잘못했으면 깨끗이 인정하고 회개하며 성실하게 내일을 위한 씨를 뿌립니다. 그러면 언젠가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미국의 거부 앨먼 조는 어렸을 때 동네에 솜사탕 장수가 오자 아빠에게 솜사탕을 사게 25센트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빠는 25센트를 주며 말했습니다. “조야! 이것은 돈이 아니고 땀의 대가야! 겨울 내내 감자를 보관하고 봄에 밭을 갈아 감자를 심고 물을 주고 풀을 뽑고 기다린 후에 땀 흘려 수확한 감자를 팔아 얻은 돈이야!” 그때 그는 그 돈으로 솜사탕을 사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절제하고 노력해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요즘 눈앞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며 안목의 정욕을 따라 내일의 준비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며 살면 남의 눈에도 예민해집니다. 그러나 남의 눈초리나 의미 없는 말에 때로는 무관심할 필요도 있습니다. 또한 이미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실패에도 너무 연연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성숙해지려면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는 섭섭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섭섭하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자기 맘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섭섭한 일도 적당히 무시하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벽을 만나서 길이 없고 골짜기로 내몰린 순간에도 내일의 축복을 준비하려고 계속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신하면서 길을 찾고 땀을 흘리는 삶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힘들어도 그런 자세를 가지고 매진하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복된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 나눔의 중요성 >
또한 그런 복된 날을 준비하도록 본문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가 바로 ‘나눔’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도전하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그 표현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남은 주리고 있는데 혼자 배부르게 살면 그것은 결국 자기에게도 불행한 일이 됩니다.
사람은 음식물로 배가 차고 약 20분쯤 후에야 배부름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가 부르기 전에 식사를 그쳐야 합니다. 너무 많이 먹으면 위장이 점차 크게 팽창합니다. 그 팽창한 위장이 다른 장기를 압박하면서 배부른 감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장기들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말을 못해서 그렇지 위장 주변의 장기들이 “나 좀 살려주세요. 숨 막혀서 죽겠어요!”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못하고 배부른 표시로 하는 것이니까 배부른 것이 얼마나 건강에 안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임종 전의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때 공통적인 현상 중의 하나가 임종 전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식사를 잘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병이 중한 분에게 심방을 갔는데 보호자가 기뻐서 말합니다. “목사님! 제 남편이 조금 전에 오랜만에 식사를 맛있게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기뻐하니까 같이 기뻐해주지만 속으로는 걱정합니다. “병이 중한 분이 식사를 맛있게 많이 하면 다른 장기에 무리가 생기고 안 좋은데...” 그것이 기우이면 좋겠지만 실제로 식사를 잘하고 얼마 후에 혼수상태에 빠진 분들이 꽤 많습니다.
너무 배불러지면 위장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다른 장기들도 고통스럽게 되면서 결국 몸 전체가 해롭게 됩니다. 게다가 암 말기에 장기도 많이 손상된 상태에서 음식물이 많이 들어와 장기를 압박하면 장기도 힘들지만 병으로 손상되고 찢어지고 팽창된 장기 틈새로 음식물이나 물이 새어나와 복막염 증상이 생기거나 복수가 많이 찰 수도 있습니다. 결국 중병에 걸렸을 때 배부르게 잘 먹는 것은 오히려 독약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나눌 줄 모르고 혼자만 배부른 것도 비슷한 결과를 낳습니다. 결국 그 배부름이 자기도 힘들게 하고 남도 힘들게 하면서 전체를 다 죽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주의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지금 치열한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감의 물결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까치발을 하고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지만 작은 물결에도 발이 붕붕 떠서 흔들리는 상황입니다.
이런 때에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바벨론 왕이 주는 좋은 음식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손해 보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한다면 그 모습이 얼마나 복된 모습입니까? 진리에 굳게 서면 악은 그 앞에서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물질주의의 물결에서 수시로 나눔을 결단하고 작은 힘이라도 공평과 정의의 씨를 뿌리려고 하십시오.
해방 전 영성 부흥사로 유명했던 감리교 이용도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지금은 피가 말라서 저희가 무기력한 빈혈 병자가 되었습니다. 피가 없으면 기운 없고, 맥없고, 힘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 없고, 소망도 없게 됩니다. 저희에게 예수님의 피를 주사해 새로운 기운을 얻고 화기와 생기와 기쁨도 얻게 하소서!”
어떻게 예수님의 피를 주사 받습니까?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하게 되고 또한 삶의 열매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그 열매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는 비전이 영혼에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3일 전에 예루살렘의 타락상을 보시고 안타깝게 우셨습니다. 아마 지금도 세상을 그렇게 안타깝게 보실 것입니다. 그 안타까워하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으로 나눔의 모델이 되는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뛰십시오.
< 성도에게 저주란 없습니다 >
저는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신약시대에도 꼭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사실 그 질문은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교회 사랑과 책임의식이 깊어지면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저절로 찾습니다. 사람은 드리고 나누면서 가장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십일조를 얼마나 잘 쓰느냐의 문제에서 성도들의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하니까 십일조에 회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물질을 정말로 잘 쓴다면 누가 나눔에 동참하지 않겠습니까?
삭개오는 구원받고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불의한 착취가 있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삶을 결단하면서 물질에 대한 헛된 욕심도 끊은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결단을 수시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받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더 나은 삶을 향한 헌신과 결단을 꼭 해야 합니다. 그런 몸부림이 없으면 구원받아도 구원받은 자의 행복은 누리지 못합니다.
어느 날, 한 노부부가 남미 코파카바나의 아름다운 해변 식당에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여보! 기분 좋지요? 여태껏 안 먹고 안 쓰고 고생하다가 이렇게 좋은 휴가를 누리니 역시 고생할만해요.” 그러나 평생 안 먹고 안 쓴 결과가 고작 코파카바나 해변의 식당에서 근사한 저녁 한 끼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낭비입니까? 살면서 그런 종류의 목표를 넘어 찬란한 나눔의 비전을 가지고 사십시오. 그래야 복된 인생이 펼쳐집니다.
이제 열심히 물질적인 영역을 정복하십시오. 그리고 딸을 시집보내듯이 적절한 때에 그 물질을 잘 시집보내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미리 단단히 하십시오. 다 큰 딸이 때가 되어도 시집가지 않으면 그 일이 부모에게 불행감을 주듯이 나누지 않는 물질도 반드시 불행을 초래합니다. 물질은 나누지 않으면 언젠가는 아픔과 상처를 동반한 채 결국 빼앗깁니다. 그러나 물질을 좋은 곳으로 잘 시집보내면 시집간 딸이 나중에 제일 효도하듯이 그 잘 사용한 물질로 인해 영혼의 기쁨과 행복과 보람을 얻고 하나님의 넘치는 보상과 축복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당대의 거부였고 그의 아들 이삭도 나중에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삭은 아버지의 재물을 물려받아 거부가 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땀과 지혜를 앞세우고 하나님이 복 주셔서 거부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이삭의 아들 야곱도 거부가 되었는데 야곱도 역시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서 거부가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거부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도 권력과 물질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고 자수성가해서 권력과 물질을 얻었습니다.
그처럼 자녀에게 물질을 그냥 물려주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물질이 자녀를 망칩니다. 부모가 많이 나누는 삶을 보여주고 자녀가 스스로 일어서게 하면 오히려 더욱 복된 가문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움켜쥐면 명문가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열심히 나누면서 자녀에게 땀 흘릴 기회를 주고 창조성을 발휘할 기회를 줄 때 명문가가 만들어집니다.
이제 부모 덕을 보려고 하지도 말고 부모 탓을 하지도 마십시오. 살면서 좋은 부모나 좋은 사람이 성공에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을 꼭 붙잡고 자수성가해서 성공하려고 하십시오. 자기가 심은 대로 자기가 거듭니다. 좋은 환경에서도 자기가 못해서 얼마든지 망할 수 있고 나쁜 환경에서도 자기가 잘해서 얼마든지 흥할 수 있습니다. 지금 환경과 상황이 어려워도 하나님을 꼭 붙잡고 나가면 그의 성공가도를 막을 수 있는 사람과 환경과 상황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도에게 저주란 없습니다. 즉 어떻게 해도 길이 없는 상황은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장벽을 뚫고 얼마든지 복된 길로 나가서 반전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꼭 붙잡고 교회를 사랑하며 나눔을 실천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새로운 축복의 기회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무거운 책임감’은 가지되 ‘지나친 죄책감’은 가지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꼭 붙잡고 나감으로 나눔의 꿈과 비전을 멋지게 이뤄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