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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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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0-05-02 http://www.yullin.org |
인격적인 사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온 천하를 지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이 지푸라기보다도 못한 시인에게 목자가 되신 것은 신앙이라는 통로를 인함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의 “목자”라는 표현은 시인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시인이 목동으로서 양떼를 인도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양은 눈도 지독히 나쁘고, 빨리 달리지도 못하는 동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동은 언제나 자기의 음성을 들려주어서 양이 그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따르도록 이끕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시라고 할 때 시인의 머릿속에는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심으로써 우리를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것에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시거나 징계하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격적인 설복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또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의 생각에 호소하고 마음에 감동을 줌으로써 그의 의지를 움직여서 이 사람이 원하는 일을 저 사람이 자기 주관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설복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을 인격적인 승복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죽도록 경배하기 싫어한다면 하나님은 억지로 무릎을 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우리 마음에도 그것이 원하는 바가 되어 선택하도록 생각을 지식으로 일깨우시고, 정서는 하나님의 정으로 감동시키시고,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의지의 행사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징계하시는 경우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징계가 모두 비인격적인 것입니까? 인간 부모는 자식을 기르다 보면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마음에 분함이 생겨서 아이들을 때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때리실 때가 없습니다. 인간이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후회하실만한 매질’을 하신다면 완전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을 치시거나, 몸이 아프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때려주시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 없고, 선한 의지가 발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 눈을 뜨게 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전에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지루할 정도로 여러 번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자기에게 다가오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어느 한순간 그것이 모두 짜증나고 귀찮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귓가에 주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때려서라도 마음을 움직여 알아듣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적으로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회개하고 용서받았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은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사랑의 대상을 특별하게 다룹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모두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느끼는 것이 많은 대신 어떤 사람은 쓰는 것을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과단성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치밀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사람들의 잘못한 것을 가지고서라도 고치는 기회로 삼고 싶은 것입니다. 시인도 하나님 앞에서 못된 짓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양한 사람들 중에서 시인을 아시고, 그것을 사용하셔서 고치셔서 이끄시고 새롭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라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사랑을 녹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이 길 잃은 양이라고 할 때 불신자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잃어버린 양들은 많이 있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신앙, 주님의 사랑 앞에 승복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신앙 속에서 영혼은 어둠속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품 안에 돌아가기 전에는 안식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목자”라는 말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양을 모두 우리에 넣고 헤아려 보니 아흔아홉 마리입니다. 한 마리가 없습니다. 사실 논리적으로 보자면 한 마리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그 한 마리를 간절히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양이 무슨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잃어버린 양떼를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전도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눈에 보이는 이익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눈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종종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정말 뼈아픈 일들이 일어날 때는 우리는 주님을 좋은 분으로 신뢰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시련을 만나고 위험한 계곡에 있을지라도 두 가지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 반드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를 가슴에 새기면 어떤 시련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격적인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커다란 불행이 있더라도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은 폐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다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우리를 그 답을 알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성경의 명제적 사실과 현실에서 그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 주님을 믿어야 할 필요가 증대된다는 데까지 동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며, 너를 사랑하신다. 주님께 돌아가거라.”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인격적인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이 거짓과 가식 아무 생각도 없는 생활의 반복이기 때문에 그 신앙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에게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을 맞춤으로 대해 주십니다. 이런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격적인 신앙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이의 고백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면 우리는 신뢰할 수 있겠지만, 다윗이 이 말을 했다면 우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을 편애하던 아버지였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분부를 받아 왕이 될 아이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았습니다. 큰 아들부터 차례로 나왔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그 집 아들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없습니다. 그때 이새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들, 다윗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형들을 사랑했지만 형들은 다윗을 따돌렸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자기의 신앙의 세계의 깊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더욱이 아버지처럼 따르고 싶었던 사울은 집요하게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낳았는데 반역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강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강간범이 자신의 자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그것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불륜이었습니다. 그래서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 동안 영혼의 어둠속을 헤매며 치열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상처받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침체와 불행이 환경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랑이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은 좋은 환경이 가져다 준 고백이 아니라, 환경은 끊임없는 상처와 고통 결핍을 안겨 주었지만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신앙의 힘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여받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경험하는 인격적인 사랑, 마음을 녹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 받아본 적도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하나님께 받으면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힘을 그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뿐인 가시밭길과 같은 인생이었고, 끊임없는 배반과 복수, 가슴을 찢는 슬픔이 그의 인생에 늘 친구처럼 따라다녔지만 그는 자신의 영혼에 참된 만족을 환경에서 구하지 않고 그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자기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그 큰 인격적인 사랑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환난이나 시련이나 핍박이나 그 어떠한 것도 그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롬 8:35-39). 그러면 여러분, 오늘 느끼는 여러분의 고통과 영혼의 깊은 침체는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부족 때문이지 환경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오는 현상이 아님을 아셨을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살면서 그분의 인격적인 사랑 앞에 깊이 설복되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의 줄에 굳게 붙들려서 주님의 그 은혜에 매여서 여러분의 인생의 목자 되신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사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01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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