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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하1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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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0-05-16 http://www.yullin.org |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18:33).
I. 본문의 배경
구약 시대에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을 제외하면 그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일평생 주님 안에 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제왕이었지만 물질적인 욕심과 명예욕을 찾기 힘들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며 궁창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하는 우주적 명상에 잠겼던 철학자이자,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불행히도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형들의 보살핌도 그에게 낯선 언어였습니다. 혼인을 했지만 아내는 자신의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녀를 낳았으나 그의 탁월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상처 입은 가정일 뿐이었습니다.
II. 악한 아들의 죽음
본문 말씀은 다윗이 전쟁터에서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보고를 들은 직후 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슬피 울며 문루로 올라가 비통하게 울부짖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이런 고통의 발단은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겁탈한 사건이었습니다. 슬피 우는 누이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압살롬은 형제들을 모두 초대해 놓고 이복형제인 암논을 무참하게 살해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 역시 암논의 비행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자식들끼리 죽고 죽이는 광경을 보고 진노가 극에 달았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아버지의 진노를 피하여 도망했던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비의 마음이 아들을 보고 싶은 줄을 알고 신하들이 압살롬을 다윗에게 데려왔지만 부자 사이의 깊은 감정의 골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압살롬은 아버지에 대한 반역을 꾀하게 됩니다. 하나는 아버지가 언제 자신에게 복수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직접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하는 정권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치밀하게 일을 준비하였습니다. 개인 호위병으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다윗의 수하의 장수들 중 다윗에게 불만이 있는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억울한 백성들의 변을 들어준다며 그들의 마음을 노략질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정한 때가 오자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였고,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압살롬은 더욱이 아버지를 쫒아낸 궁에서 천막을 치고 백주대낮에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패륜적인 행동을 보였으니 신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인물임이 분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다윗은 벗은 발로 왕궁에서 도망치는 가련한 신세가 되어 요단 건너편까지 망명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높이던 백성들은 차갑게 등을 돌렸고, 시무이란 인물은 흙을 던지고 다윗을 비루한 자라고 욕하며, 사울의 집안에 행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이 네 집안에도 그렇게 행하시리라고 저주를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저이가 나를 욕하는 것이라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유지하였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다윗에게 예고된 하나님의 징계였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치는 압살롬을 기뻐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징계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다윗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III. 선한 부모의 눈물
이제 다윗의 군대가 다시 대열을 가다듬고 반란군과 본격적으로 전투를 하려고 할 때, 다윗은 출정하는 군사들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너희들이 싸움터에서 나의 아들 압살롬을 만나거든 부디 선대해 달라.” 그리고 말하기를 “나의 소년 압살롬”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비록 그가 반란군의 수괴였으나 아버지 다윗의 마음에 압살롬은 어린아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제발 그를 죽이지 말도록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전쟁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따라 압살롬은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란군이 토벌되고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졌을 때 그는 승전보보다 소년 압살롬이 어찌되었는지 다급히 물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차마 죽음을 고할 수 없었던 지혜로운 병사는 에둘러 말합니다. “왕의 원수와 왕을 대적해 일어나는 모든 자들이 다 그 소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아비 다윗은 슬피 울며 문루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사실 모든 진리가 사람의 지성 속에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진리는 나이가 들고 인생을 살아야만 깨닫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함께 살면서 상처를 주고받지만, 자식의 상처와 부모의 상처가 다름을 보게 됩니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자식의 상처는 뼈에 사무치지만 자식으로부터 받은 부모의 상처는 부모의 마음에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자식이 조금만 마음을 열고 사랑을 보이면 과거의 모든 상처의 기억들을 잊어버립니다. 곧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자식의 마음에 돌로 쓴 글씨처럼 새겨지지만, 자식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부모의 마음에 물 위에 새긴 글씨와 같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나쁜 부모들도 있습니다. 도덕적 능력이 있는 인간이 오히려 그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적 본성의 이유를 이성 속에서 잘 깨달으면서 이것을 영혼의 움직임인 사랑으로 승화시키면서 살아가야 그것이 사랑으로 승화함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정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도 하지 못하고 육욕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나쁜 부모가 되고, 고통과 상처를 대물림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 본성으로서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자식을 향해 흘러 들어가는 사랑이 됩니다. 압살롬은 결국 눈을 부릅뜨고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그의 마음에 있는 아버지 다윗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암논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뼈저린 상처, 누이의 원한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아버지, 일이 터지고 나서 자기를 죽일 정도로 미워하던 엄격한 아버지, 돌아와서 사죄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화해를 받아주지 않던 무서운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가지며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압살롬이 자기가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자신이 죽고 나면 그 아버지가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널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며 슬피 울었을 아버지라고 상상을 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감추어진 아버지의 마음, 부모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부모의 마음에 있는 자식을 향한 사랑은 밝히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항상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상처에 대한 반응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성경의 죄입니다. 상처가 모든 것을 합리화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런 상처를 극복하며 살 수 있는 은혜의 무한한 공급을 약속하셨고, 또 그런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IV. 하나님의 더 큰 사랑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부모로 인해 상처를 받고 많이 아파하는 세월을 지냈다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부모님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려고 노력했습니까?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 상처를 받는 일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상처를 부둥켜안고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며 사는 것은 자기 사랑의 또 다른 결과입니다. 섭리 속에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부모로부터 받은 충분한 사랑이 부족하고 또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고독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그렇게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하나님의 품에 파고 들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는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오히려 하늘 아버지는 그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못해 준 사랑까지도 해 주셔서 오히려 그 상처가 주님의 자비를 깨닫는 도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고백한 바와 같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 느끼지 못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부모님의 사랑 사이에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사랑이 훨씬 크고 넓다는 것입니다. 자식인 여러분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작은 상처의 기억들을 붙들고 화해하지 않으려 하지만 부모들은 여러분들에 대해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랑의 추억들은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버림을 받아도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멈출 수 없게 하는 지속성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무한해도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해 본 사람 이외에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비밀을 알 사람이 없는 것처럼, 여러분의 부모의 사랑이 크고 넓어도 그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자식들 이외에는 부모의 마음에 알알이 박힌 그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라도 여러분은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죄 많은 세상에 태어나서 때로 부모로부터 상처와 고통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백성이 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명령받고 있는 의무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혹여 여러분들에게 상처의 빚을 졌다할지라도 주님의 큰 사랑은 육신의 부모가 진 빚조차 대신 갚아 주셨으니 우리들은 부모님을 하나님 때문에라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다면 지난날들을 깊이 회개하고 이제는 하늘 아버지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부모들이 이 땅에 살아있다면 그 자체가 여러분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처를 주었어도 아버지가 살아있으면 화해할 수 있고, 고통스러웠어도 어머니가 생존에 있으면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까지 상처와 어둠 속에서 살고 무관심 속에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 살았다면 남은 날들이라도 빛 가운데 살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미워하고 다툴 시간이 없습니다.
사랑하며 살아도 남은 시간은 너무나 짧습니다. 과거가 어둡고 가정 속에 슬픔의 상처의 그림자가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대물림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맺힌 것을 풀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하여 부모 공경의 대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어려울 때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을 처음 알았던 그 회심의 때에 우리 주님 앞에서 무엇이라고 고백을 했는지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형언할 수 없는 예수의 그 큰 사랑을 받았을 때 여러분들은 이제 여러분들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주님이 범죄한 우리와 사랑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자기의 살을 찢고 물과 피를 쏟아 화목제물이 되셨던 것처럼, 그 희생으로 우리가 주님께 사랑을 입은 용서받은 자녀가 된 것처럼, 여러분이 자녀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그 분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도록, 그 분들이 여러분들의 부모가 되는 것이 이 세상에 가장 큰 보람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길을 가는 동안에 끊임없는 고통도 있을 것이고, 수시로 살아나는 과거의 기억들이 우리가 가려고 하는 까리따스(caritas)의 길을 가로막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주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따르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를 깊이 공경하는 그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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