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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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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0-08-22 http://www.yullin.org |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5~6).
I. 본문의 배경
마태복음 6장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마 6:1)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에 이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구제에 대해 경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을 조금 도와주면서 많이 칭찬을 받고 자기를 세우기 위해 구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는 기도의 외식의 말씀에서는 좀 의아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길 어귀에서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종교인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외식은 우리의 구제나 기도 생활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선한 실천에 파고들어 그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외식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어떤 좋은 모습이 있을 때,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다양한 좋은 것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의 탁월하심을 경배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기도의 외식에 관한 적용은 외식하는 마음이 기도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 기도와 나뉜 마음
바로 나뉜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기도하기에 적합한 마음이 될 때에 가장 좋은 기도 생활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반대되는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 을 외식을 통해서 지적하고 싶으셨습니다.
A.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
기도에 적합한 마음은 하나님께 고정된 영혼의 시선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은 찢어지고, 갈라지고 나뉜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도가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실 성경은 믿음의 정체를 밝히기 보다는 믿음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이 믿음의 정체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분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어떤 문맥에서 이 유명한 성경의 요절이 등장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광야의 한 사건을 제시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주님이 보내신 불 뱀에 물렸습니다. 물리면 온 몸이 불일 듯 열이 나고, 짧은 시간에 절명하는 무서운 독이 있는 뱀이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불쌍한 백성들을 구출할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제시받았습니다. 그것은 지팡이에 구리 뱀을 매달아서 높이 쳐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고, 바라보지 않는 자는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에 구리 뱀을 엮어 높이 쳐들었을 때 그 그루 뱀을 보는 것과 독사에 물려서 퉁퉁 붓고 불같이 열이 나던 사람들이 회복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인관관계가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적인 치유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면 그냥 하나님께서 나으라고 명하셨으면 되었지 왜 보는 사람만 낫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께서 그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려 그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적인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이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 지팡이에 매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오로지 거기에만 유일한 치료의 길이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의지하면서 그 구리 뱀을 주시하였을 것입니다. 즉 구리 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구리 뱀을 통해서 그들을 치료하시는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영혼을 하나님께 응시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도가 믿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할 때 열렬해지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쏟을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도하려면 시간을 내야해. 그리고 환경도 매우 중요하지.” 맞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환경과 시간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해도 저절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적인 요건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응시하는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을 때 우리는 환경이 어려워도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바쁘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을 때가 있고, 여유가 있고 편안하고 염려가 없는 환경인데도 거의 기도하지 않았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뉘고 찢어질 때 우리의 마음이 기도에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눈 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사물들을 접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우리 마음속에 이런저런 인상들을 남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응시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는 이런 수많은 인상의 잔상들이 적절히 쓸려 나갑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께 고정된 응시하는 마음이 없을 때 즉,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에는 만나는 사람과 보고 보이는 이런저런 사물들의 수많은 영상들이 우리의 마음에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초점을 흐리고 찢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응시하는 믿음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마음이 기울어지면 우리는 바빠도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위기가 오면 위기 때문에 기도의 파도를 타게 되고, 고요할 때에는 평온하기 때문에 주님을 마음껏 찾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고,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들을 늘 만나셨고 병자들에게 에워 쌓이셨기 때문에 식사하실 틈도 없는 고단하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사랑으로 고치고, 무지한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고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늘 그 모든 환경 속에서 기도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환경이 도와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응시하는 믿음의 마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환경을 탓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에 적합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B. 골방에 들어가는 이유
그러면서 우리는 여기서 골방에 들어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는 바와 같이 골방은 집에서 평소에 쓰지 않는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방입니다. 이 골방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바는 ‘은밀함’입니다. 그러한 은밀함은 물리적인 은밀함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과 마음의 은밀한 골방입니다. 기도할 시간, 기도할 장소, 이것이 물리적인 골방이라면, 정신적인 골방은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분께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형식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의 장소는 형식이지만 이 형식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의 내용을 보관하기에 매우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마치 우리의 생명 유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예민한 장기들, 예로 심장을 하나님께서는 단단한 갈비뼈에 둘러 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신 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그런 골방이 여러분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직장에 일찍 나가서 하나님께 조용히 간구하고 아뢰는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기도의 골방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주님과 독대하는 고요한 시간, 그리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 주님은 내 마음에 당신의 마음을 부으시고, 나는 주님께 내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는 교통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지혜 가운데서 이런 기도를 통해 당신의 영적인 생명을 우리의 인간 영혼 안에 부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하는 교회 앞의 표어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은 이제는 기도를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연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자원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분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는 교통이 없이 일주일을 살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삶으로 예배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건조해지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설교는 지겨운 시간이 되곤 하는 것입니다.
C. 최고의 예물, 온 마음
하나님 바칠 최고의 예물은 바로 우리의 온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뜻보다는 마음, 그리고 성품과 목숨보다도 더 먼저 주님께 바쳐져야 될 것이 마음입니다. 더욱이 나뉘고 갈린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하고 단일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도 순수하고 단일하게 될 때에 그분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은 시간을 기도해도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물같이 쏟는 그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도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온전히 쏟는 그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 자기 중심적으로 형성되었던 마음은 물과 같이 녹아 내리고, 그렇게 녹아 내린 마음은 주님 한 분께로 모여 쏟아져 들어갑니다. 곧 형체를 잃어버린 마음이 주님의 마음에 부어져서 주님이 원하시는 틀로 다시 주조되어 나옵니다. 마치 쇠붙이를 강한 불에 녹여 형체를 잃어버리면, 장인이 그 쇳물을 틀 속에 다시 부어, 쇳물이 장인이 원하는 그런 도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 속에서 그렇게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는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예전에는 사랑에 눈뜨지 못한 죄인이었던 사람이 그 시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두려워 떨고 한숨만 쉬던 사람이 마음을 쏟아 붓는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게 됩니다. 핍박과 고난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사람들이 마음이 녹아내리는 그 쏟아 부음 속에서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서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과 만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예물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III. 은밀한 중이 계시는 하나님
또한 우리가 이렇게 골방으로 들어가서 기도해야 할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과 연관 시켜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기도의 전진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앎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 앞에 장작불과 같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이 기도의 불길이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은 그 아궁이에 계속 공급되는 나무토막과 같습니다. 잘 마르고, 견실한 나무토막이 계속 불 속에 들어갈 때 아궁이는 뜨거운 불길로 이글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은혜가 순간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계속 알아가서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도의 제목들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의 불길은 지푸라기에 붙은 불길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되었다면 그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만나겠지만,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범죄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전과는 비교될 수 없이 바쁘고 복잡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치열한 경쟁사회로 이끕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들, 신앙, 교회 지체들, 이웃, 내 가족 심지어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성찰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이 애쓰지 않으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받아서 죽어갔으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부패를 경험하며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주신 말씀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마음을 강하게 먹고 환경과 싸우십시오. 이 세상은 주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인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고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환경, 육체의 게으름과 영혼의 싫증 속에서 무너져 가는 여러분들의 기도의 골방을 한번 보고,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기도를 회복하고, 복된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0-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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