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눅16:1-9 |
---|---|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7.21주일 http://sungamch.net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눅16:1-9
지난 주일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들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서본문은 다르지만 누가복음 공동체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또는 ‘영원한 처소’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영원한 처소’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가 믿는 믿음의 과녁을 정확하게 해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부자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간략하게 줄여보면, 믿음직한 일꾼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일꾼은 자기가 평소 관리하던 채무자들을 불러서 주인 몰래 빚을 깎아 주었습니다. 앞으로 잘 봐달라는 뜻으로 그런 것입니다.
이건 명백한 문서 위조이고, 사기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입니다. 여기까지가 7절의 내용이고요. 그런데 그 다음 구절, 8절에는 앞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일이 진행됩니다.
주인이 그 ‘나쁜 놈, 사기꾼, 범죄자’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집어 쳐 넣거나, 사사로이 벌을 줘도 속이 풀리지 않을 판인데, 주인은 어쩌자고 그런 놈을 칭찬을 한단 말입니까?
설교자들이 골치아파하는 구절입니다. 주석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기발한 생각들을 쏟아놓았습니다. 여러분이 들은 이 본문에 대한 설교는 어떤 것입니까? 어떤 이는 왜 이 나쁨 놈이 칭찬을 받았는가 하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때문에 주인이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이 나쁜 놈이 깎아준 돈은 원금이 아니라 이자로써, 본시 주인이 터무니없는 이자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 이자가 주인의 것이 아니라 일꾼의 것이라고 합니다. 원금을 유지해주는 대신에 이자는 일꾼이 알아서 먹도록 그렇게 계약이 되어 있다는 거죠.
지난 시간의 ‘겨자씨’와 ‘누룩’에 대한 해석과 함께 이런 해석도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늘 성서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간과하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생각이나 사고의 허를 찌르는 파격과 번복이 늘 예수님의 말씀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들도 예수님의 파격성을 제거해버린 싱거운 설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건은 이해할 수 없는 예수의 발언을 통해 그 파격성을 어떻게 확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8절에 나오는 ‘주인(호 큐리오스)’이라는 단어의 해석입니다. 이 단어는 ‘주인’이라는 듯도 있지만 ‘주님’이라는 뜻오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해석자들은 모두 이 단어를 ‘주인’으로 보는 경우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주님’으로 보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즉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7절에서 끝이 납니다. 연극으로 치면 1-7은 제 1막인 셈입니다. 서론에 해당합니다. 거기엔 부자 주인, 일꾼, 빚쟁이 1,2가 등장을 하죠. 이들은 7절과 함께 막이 내리자마자 퇴장을 합니다.
그리고 8절은 다시 새로운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한 사람입니다. 그는 조금 전에 퇴장한 ‘주인’이 아니라, 해설자로 등장한 새로운 인물 ‘주님’입니다. 주님이 앞의 있었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부자의 일꾼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앞 장면과 이 장면은 연결되어 있지만 의미 전달에 있어서만 그렇고 사실은 별개의 장면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에서 부자 주인의 일꾼이 사기를 친 다음에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궁금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의도의 중심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와 같이 처신한 일꾼을 칭찬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칭찬을 했느냐고요? 그것은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게 해석의 열쇠입니다. 도대체 뭐가 슬기로운 일이냐는 겁니다.
‘슬기롭다’라는 말은 ‘약삭빠르다’는 뜻인데, 그러면 우리더러 사기를 치면서 약삭빠르게 살라는 말일까요? 일꾼의 속임수를 배우라는 것일까요? 나아가 실정법을 어겨도 된다는 뜻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약삭빠르게 대처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본문을 바르게 알려면 이 청지기하고는 정반대로 살았던 ‘어리석은 부자(12:13-20)’의 이야기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았습니까? 그저 자기를 위해 더 많이 벌어 가득 쌓아둘 궁리만 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세상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를 보고 하나님은 ‘이 어리석은 사람아’했습니다. 죽은 다음에 네가 그토록 모아들였던 게 누구 게 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뭐하라고 그렇게 쌓아두는 일에 몰두하느냐는 겁니다.
이제 이 부자와 부자의 일꾼을 비교해 봅시다. 부자는 어떤 법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그런 삶일 수도 있습니다. 자랑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만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인 인생, 부자의 일꾼은 법을 어긴 놈입니다. 약삭빠른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칭찬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삶에 대해 평가가 어긋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세상의 법 또는 이치로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또는 종말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했습니다. 부자는 세상의 편에서 볼 때는 ‘슬기로운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그는 종말 의식도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산이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해 줄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사는 일에 대해서는 아주 슬기롭습니다. 그게 부자의 삶입니다.
그러데 부자의 일꾼은, 실정법을 위반 하기는 하지만(세상의 이치에는 맞지 않지만), 이제 인생의 종말을 늘 숙고하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슬기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누구든 언제든 끝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삶을 사는 존재의 유형입니다. 종말의식으로 매일 매일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실천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실행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끝낸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걸 말하려고 부자와 부자의 일꾼에 대한 비유, 그 비유의 해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라”(9절)
이 말씀을 하시려고 부자와 그 일꾼의 이야기를 하시고, 그 이야기를 통해 누가 옳게 사는 것이냐를 말씀하신 다음에, ‘너희도 그러니 이렇게 살아라’하시는 것이죠. 이게 결론입니다. 이 결론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앞의 비유를 들고 그걸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말이 안 되는 비유와 해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세상에서는 말이 안 되는 삶의 양식을 갖고 사는 사람의 몫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파격입니다.
9절에서 ‘불의한’ 이라는 단어는 부정하게 얻었다거나 나쁘게 벌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세상의’ 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물질 또는 세상의 것’으로 그런 말입니다. 세상의 물질은 친구를 사귀는데 쓰는 것입니다. 여기서 ‘친구’란 단지 세상의 벗을 의미하거나, 세상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공부하는 동료’를 의미합니다. 우리로 치면 성서공부를 통해 진리를 확장해 주는 교사, 목사, 스승과 같은 ‘동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조들의 어록 2:12/새벽시간>으로 새벽 말씀을 나눌 때 일러 드린 것입니다. 그게 ‘불의한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입니다. 그(동료 혹은 진리)가 나를 종말의 날에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는 것이지, 세상의 그 어떤 벗(재물이나 탐욕)이 나를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는 게 아닙니다.
참 묘한 것은 부자의 경우, 종말을 당하여 죽게 되면 그의 영혼은 ‘진리를 공부하던 벗’들이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늘 부자와 함께 하던 부자의 벗들이 그 부자의 영혼을 도로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부자의 벗들은 뭐고 누구일까요? 세상의 부자처럼 종말을 의식하지 못하고 욕심껏 쌓아 두는 일에만 집착하여 살다가 죽으면, 그의 영혼은 평소 그가 가까이 지내던 세상의 벗들이 찾아가고, 일꾼처럼 종말을 의식하면서 세상의 재물을 진리를 공부하는데 쓰고, 공부를 같이하는 동료에게 쓰면 죽은 다음에 그 사람의 영혼은 그의 친구들이 영원한 처소로 인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기 쉽게 이 말씀을 풀면, “세상에서 개처럼 살다가 죽으면 그의 영혼은 개들이 가지고 가고, 진리를 배우는 일에 세상의 재물을 사용하다가 죽으면 그의 영혼은 그들이(진리가)영원한 처소로 인도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결론 합니다. 세상의 재물을 진리를 공부하는데 사용하십시오. 같이 공부하는 이들에게 사용하십시오.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그들이(진리가)영원한 처소로 안내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세상의 재물과 지식과 시간과 생명을 오로지 진리를 아는데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죽고 난 다음에 당신이 살아 있을 때 가까이 했던 그들이 당신을 영원한 처소로 안내할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세상의 것들과 가까이 지내다가 죽으면 당신의 영혼은 평소 세상에서 당신이 가까이 하던 그들 또는 그것이 당신의 영혼을 채갑니다.”
눅16:1-9
지난 주일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들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서본문은 다르지만 누가복음 공동체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또는 ‘영원한 처소’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영원한 처소’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가 믿는 믿음의 과녁을 정확하게 해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부자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간략하게 줄여보면, 믿음직한 일꾼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일꾼은 자기가 평소 관리하던 채무자들을 불러서 주인 몰래 빚을 깎아 주었습니다. 앞으로 잘 봐달라는 뜻으로 그런 것입니다.
이건 명백한 문서 위조이고, 사기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입니다. 여기까지가 7절의 내용이고요. 그런데 그 다음 구절, 8절에는 앞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일이 진행됩니다.
주인이 그 ‘나쁜 놈, 사기꾼, 범죄자’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집어 쳐 넣거나, 사사로이 벌을 줘도 속이 풀리지 않을 판인데, 주인은 어쩌자고 그런 놈을 칭찬을 한단 말입니까?
설교자들이 골치아파하는 구절입니다. 주석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기발한 생각들을 쏟아놓았습니다. 여러분이 들은 이 본문에 대한 설교는 어떤 것입니까? 어떤 이는 왜 이 나쁨 놈이 칭찬을 받았는가 하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때문에 주인이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이 나쁜 놈이 깎아준 돈은 원금이 아니라 이자로써, 본시 주인이 터무니없는 이자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 이자가 주인의 것이 아니라 일꾼의 것이라고 합니다. 원금을 유지해주는 대신에 이자는 일꾼이 알아서 먹도록 그렇게 계약이 되어 있다는 거죠.
지난 시간의 ‘겨자씨’와 ‘누룩’에 대한 해석과 함께 이런 해석도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늘 성서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간과하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생각이나 사고의 허를 찌르는 파격과 번복이 늘 예수님의 말씀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들도 예수님의 파격성을 제거해버린 싱거운 설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건은 이해할 수 없는 예수의 발언을 통해 그 파격성을 어떻게 확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8절에 나오는 ‘주인(호 큐리오스)’이라는 단어의 해석입니다. 이 단어는 ‘주인’이라는 듯도 있지만 ‘주님’이라는 뜻오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해석자들은 모두 이 단어를 ‘주인’으로 보는 경우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주님’으로 보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즉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7절에서 끝이 납니다. 연극으로 치면 1-7은 제 1막인 셈입니다. 서론에 해당합니다. 거기엔 부자 주인, 일꾼, 빚쟁이 1,2가 등장을 하죠. 이들은 7절과 함께 막이 내리자마자 퇴장을 합니다.
그리고 8절은 다시 새로운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한 사람입니다. 그는 조금 전에 퇴장한 ‘주인’이 아니라, 해설자로 등장한 새로운 인물 ‘주님’입니다. 주님이 앞의 있었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부자의 일꾼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앞 장면과 이 장면은 연결되어 있지만 의미 전달에 있어서만 그렇고 사실은 별개의 장면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에서 부자 주인의 일꾼이 사기를 친 다음에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궁금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의도의 중심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와 같이 처신한 일꾼을 칭찬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칭찬을 했느냐고요? 그것은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게 해석의 열쇠입니다. 도대체 뭐가 슬기로운 일이냐는 겁니다.
‘슬기롭다’라는 말은 ‘약삭빠르다’는 뜻인데, 그러면 우리더러 사기를 치면서 약삭빠르게 살라는 말일까요? 일꾼의 속임수를 배우라는 것일까요? 나아가 실정법을 어겨도 된다는 뜻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약삭빠르게 대처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본문을 바르게 알려면 이 청지기하고는 정반대로 살았던 ‘어리석은 부자(12:13-20)’의 이야기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았습니까? 그저 자기를 위해 더 많이 벌어 가득 쌓아둘 궁리만 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세상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를 보고 하나님은 ‘이 어리석은 사람아’했습니다. 죽은 다음에 네가 그토록 모아들였던 게 누구 게 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뭐하라고 그렇게 쌓아두는 일에 몰두하느냐는 겁니다.
이제 이 부자와 부자의 일꾼을 비교해 봅시다. 부자는 어떤 법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그런 삶일 수도 있습니다. 자랑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만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인 인생, 부자의 일꾼은 법을 어긴 놈입니다. 약삭빠른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칭찬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삶에 대해 평가가 어긋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세상의 법 또는 이치로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또는 종말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했습니다. 부자는 세상의 편에서 볼 때는 ‘슬기로운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그는 종말 의식도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산이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해 줄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사는 일에 대해서는 아주 슬기롭습니다. 그게 부자의 삶입니다.
그러데 부자의 일꾼은, 실정법을 위반 하기는 하지만(세상의 이치에는 맞지 않지만), 이제 인생의 종말을 늘 숙고하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슬기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누구든 언제든 끝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삶을 사는 존재의 유형입니다. 종말의식으로 매일 매일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실천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실행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끝낸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걸 말하려고 부자와 부자의 일꾼에 대한 비유, 그 비유의 해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라”(9절)
이 말씀을 하시려고 부자와 그 일꾼의 이야기를 하시고, 그 이야기를 통해 누가 옳게 사는 것이냐를 말씀하신 다음에, ‘너희도 그러니 이렇게 살아라’하시는 것이죠. 이게 결론입니다. 이 결론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앞의 비유를 들고 그걸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말이 안 되는 비유와 해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세상에서는 말이 안 되는 삶의 양식을 갖고 사는 사람의 몫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파격입니다.
9절에서 ‘불의한’ 이라는 단어는 부정하게 얻었다거나 나쁘게 벌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세상의’ 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물질 또는 세상의 것’으로 그런 말입니다. 세상의 물질은 친구를 사귀는데 쓰는 것입니다. 여기서 ‘친구’란 단지 세상의 벗을 의미하거나, 세상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공부하는 동료’를 의미합니다. 우리로 치면 성서공부를 통해 진리를 확장해 주는 교사, 목사, 스승과 같은 ‘동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조들의 어록 2:12/새벽시간>으로 새벽 말씀을 나눌 때 일러 드린 것입니다. 그게 ‘불의한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입니다. 그(동료 혹은 진리)가 나를 종말의 날에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는 것이지, 세상의 그 어떤 벗(재물이나 탐욕)이 나를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는 게 아닙니다.
참 묘한 것은 부자의 경우, 종말을 당하여 죽게 되면 그의 영혼은 ‘진리를 공부하던 벗’들이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늘 부자와 함께 하던 부자의 벗들이 그 부자의 영혼을 도로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부자의 벗들은 뭐고 누구일까요? 세상의 부자처럼 종말을 의식하지 못하고 욕심껏 쌓아 두는 일에만 집착하여 살다가 죽으면, 그의 영혼은 평소 그가 가까이 지내던 세상의 벗들이 찾아가고, 일꾼처럼 종말을 의식하면서 세상의 재물을 진리를 공부하는데 쓰고, 공부를 같이하는 동료에게 쓰면 죽은 다음에 그 사람의 영혼은 그의 친구들이 영원한 처소로 인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기 쉽게 이 말씀을 풀면, “세상에서 개처럼 살다가 죽으면 그의 영혼은 개들이 가지고 가고, 진리를 배우는 일에 세상의 재물을 사용하다가 죽으면 그의 영혼은 그들이(진리가)영원한 처소로 인도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결론 합니다. 세상의 재물을 진리를 공부하는데 사용하십시오. 같이 공부하는 이들에게 사용하십시오.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그들이(진리가)영원한 처소로 안내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세상의 재물과 지식과 시간과 생명을 오로지 진리를 아는데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죽고 난 다음에 당신이 살아 있을 때 가까이 했던 그들이 당신을 영원한 처소로 안내할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세상의 것들과 가까이 지내다가 죽으면 당신의 영혼은 평소 세상에서 당신이 가까이 하던 그들 또는 그것이 당신의 영혼을 채갑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