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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2: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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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7.28 주일 http://sungamch.net |
우리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을까?
고전12:12-27
세네카 라는 스토아 철학자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입니다. 그는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이다. 우리는 거대한 몸의 지체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당시대의 노예로서 위대한 철학자인 에픽테투스도 말하길, “당신은 세계의 시민이며 세계의 한 부분이다. 누구든 이상을 갖고 자연의 질서를 이해한다면 손이나 발이 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여야 한다.”했습니다.
아주 근사하고 혁명적인 발언입니다. 노예제 사회제도를 갖고 있던 당시대에 신분의 차별이 없이 ‘모두하나다’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찌 혁명적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앞에서처럼 철학자나 노예가 이런 말을 할 때는 혁명언어가 됩니다. 그러나 백성의 고혈을 짜서 수탈을 일삼는 폭군이 이 말을 한다고 합시다. “우리는 다 한 몸입니다. 내 것이 모두 여러분의 것입니다.”라고 한다고 합시다. 이 말은 우리가 한 몸이니 죽어라 일해 달라는 말이 됩니다. 요즘 우리 기업집단에서 ‘우리는 가족이다’라는 말의변형과 같다 할 것입니다.
실제로 서기전 494년의 아그립바 왕은 당시에 유행하던 ‘몸과 마음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여 사회 불만 계층을 무마하는데 썼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노예들은 오로지 ‘영혼을 가진 물건’ 또는 ‘말하는 도구’로 취급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의 지배자들에게 ‘우리는 하나다’는 표어는 단지 노예들을 부리는 선동의 구호일 뿐이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서 내세운 ‘내선일체’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일본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조선 사람들의 불만을 무마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몸의 비유’가 성경에도 등장을 합니다.
바울의 이 표현들은 얼핏 스토아 철학자들의 표현과 비슷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이 ‘몸의 비유’가 당시 로마의 통치자들이 말하려고 한 것과 비슷할까요? 이걸 구별해 내는 게 오늘 우리의 관건입니다. 우선 14-16을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이 말씀 속에서는 손과 발이, 눈과 귀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손과 발은 대립적이지 않습니다. 사과를 따려고 손이 나가는데 발은 뒤로 간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는 사람의 음성이 들리는데 눈은 딴 곳을 본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립하고 있다는 말을 바울이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그리 심각하게 주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본문을 주시해야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그 사회의 낮은 계층의 사람들입니다(고전1:26-28/읽을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구성원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부자나 지식인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깔봄으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의 위기에 빠집니다.
11:21에 보면, 교우들이 친교를 나누고 싶어도 가난한 사람들이 도착하기 이전에(생업 때문에 그들은 늘 시간에 쫓겨 산다)자기들끼리 잔뜩 먹고 취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약한 사람’이란 이교도였다가 개종한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먼저 배운 이들이 무시했습니다.
“너는 내게 쓸모가 없다”(21절)
이것은 바울이 의인법으로 표현한 어느 교우의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노골적으로 떠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안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길, 그럴 수는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쓸모없다’고 말하는 교우들을 보면, 자기는 손이 아니라 눈이고, 발이 아니라 머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손보다는 눈을, 발보다는 머리를 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이 언어 속에도 우월의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하거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언어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22)”
이 표현은 단지 신체의 어느 부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하는 23절을 보면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표현을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몸 가운데서 덜 귀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더 많이 치장하지 않습니다. 얼굴보다 발이 사실 천대를 받는 실정인데, 그렇다고 발을 얼굴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치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발 화장품이 하나라면 얼굴 화장품은 10인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23절에서 바울은 파격적인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성도들은 그저 바울이 서로 깔보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정도쯤으로 이 본문을 대수롭지 않게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이런 식은 마치 ‘우리는 한 몸이다’라고 하는 지배자의 언어를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이런 현상, 잘나고 힘 있는 사람이 대접을 받고 큰 소리를 치는 현실을 교회 안에서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상식에서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는 약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도 없이 더 큰 존귀함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 상식적이 아니라 파괴적인 그 사랑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말에서 다시 분명해 집니다.
24절에, “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존귀함을 주셨습니다.”합니다.
세상의 상식은 뭡니까?
아름다운 지체는 더 꾸며주고 부족한 지체는 소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공동체 즉 교회는 이런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가 될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확증하기 위해 문장의 앞에 ‘하나님께서는’ 합니다. 이런 사고와 실례는 인간세상의 상식이 아니라 그런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이게 파격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잘나서 뭐든지 으쓱대는 이들을 꾸짖고, 못나서 매일 숨어 지내는 이들을 격려하고 칭찬하여 어깨를 펴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하나 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속까지 하나가 되어서 한 몸을 이루는 운명공동체가 바로 ‘한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25~26을 보세요.
여기서 ‘그래서’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세요. 이 단어는 이 단어 이후에 나오는 내용이 이 단어 바로 앞의 내용의 결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몸의 분열이 생기지 않고 하나가 되는 일, 지체들이 서로 걱정을 하게 되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의 내용, 곧 아름다운 지체는 그대로 두더라도 부족한 지체에겐 더 존귀하게 대접하는 그런 파격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되는 현상을 ‘전도’라 하는 것이고, 이런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27)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일은 단지 교회 나오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집사 되고 권사 되었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흠투성이, 욕심 투성이 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려면 파격, 귀한 존재는 잠시 눈 밖에 두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존귀하게 대접하는 태도에서부터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거나 바울이 꿈꾸는 공동체 즉 교회는 이런 겁니다. ‘한 몸인 교회’말입니다. 누구도 누구를 깔보거나 없신여기지 않고, 누구도 누구에게서 무시당하지 않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귀한 대상으로 대접받는 그런 공동체 말입니다. 이게 우리가 구현해야 할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교회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는 지금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고 있습니까?
고전12:12-27
세네카 라는 스토아 철학자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입니다. 그는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이다. 우리는 거대한 몸의 지체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당시대의 노예로서 위대한 철학자인 에픽테투스도 말하길, “당신은 세계의 시민이며 세계의 한 부분이다. 누구든 이상을 갖고 자연의 질서를 이해한다면 손이나 발이 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여야 한다.”했습니다.
아주 근사하고 혁명적인 발언입니다. 노예제 사회제도를 갖고 있던 당시대에 신분의 차별이 없이 ‘모두하나다’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찌 혁명적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앞에서처럼 철학자나 노예가 이런 말을 할 때는 혁명언어가 됩니다. 그러나 백성의 고혈을 짜서 수탈을 일삼는 폭군이 이 말을 한다고 합시다. “우리는 다 한 몸입니다. 내 것이 모두 여러분의 것입니다.”라고 한다고 합시다. 이 말은 우리가 한 몸이니 죽어라 일해 달라는 말이 됩니다. 요즘 우리 기업집단에서 ‘우리는 가족이다’라는 말의변형과 같다 할 것입니다.
실제로 서기전 494년의 아그립바 왕은 당시에 유행하던 ‘몸과 마음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여 사회 불만 계층을 무마하는데 썼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노예들은 오로지 ‘영혼을 가진 물건’ 또는 ‘말하는 도구’로 취급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의 지배자들에게 ‘우리는 하나다’는 표어는 단지 노예들을 부리는 선동의 구호일 뿐이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서 내세운 ‘내선일체’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일본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조선 사람들의 불만을 무마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몸의 비유’가 성경에도 등장을 합니다.
바울의 이 표현들은 얼핏 스토아 철학자들의 표현과 비슷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이 ‘몸의 비유’가 당시 로마의 통치자들이 말하려고 한 것과 비슷할까요? 이걸 구별해 내는 게 오늘 우리의 관건입니다. 우선 14-16을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이 말씀 속에서는 손과 발이, 눈과 귀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손과 발은 대립적이지 않습니다. 사과를 따려고 손이 나가는데 발은 뒤로 간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는 사람의 음성이 들리는데 눈은 딴 곳을 본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립하고 있다는 말을 바울이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그리 심각하게 주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본문을 주시해야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그 사회의 낮은 계층의 사람들입니다(고전1:26-28/읽을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구성원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부자나 지식인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깔봄으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의 위기에 빠집니다.
11:21에 보면, 교우들이 친교를 나누고 싶어도 가난한 사람들이 도착하기 이전에(생업 때문에 그들은 늘 시간에 쫓겨 산다)자기들끼리 잔뜩 먹고 취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약한 사람’이란 이교도였다가 개종한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먼저 배운 이들이 무시했습니다.
“너는 내게 쓸모가 없다”(21절)
이것은 바울이 의인법으로 표현한 어느 교우의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노골적으로 떠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안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길, 그럴 수는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쓸모없다’고 말하는 교우들을 보면, 자기는 손이 아니라 눈이고, 발이 아니라 머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손보다는 눈을, 발보다는 머리를 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이 언어 속에도 우월의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하거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언어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22)”
이 표현은 단지 신체의 어느 부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하는 23절을 보면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표현을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몸 가운데서 덜 귀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더 많이 치장하지 않습니다. 얼굴보다 발이 사실 천대를 받는 실정인데, 그렇다고 발을 얼굴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치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발 화장품이 하나라면 얼굴 화장품은 10인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23절에서 바울은 파격적인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성도들은 그저 바울이 서로 깔보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정도쯤으로 이 본문을 대수롭지 않게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이런 식은 마치 ‘우리는 한 몸이다’라고 하는 지배자의 언어를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이런 현상, 잘나고 힘 있는 사람이 대접을 받고 큰 소리를 치는 현실을 교회 안에서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상식에서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는 약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도 없이 더 큰 존귀함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 상식적이 아니라 파괴적인 그 사랑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말에서 다시 분명해 집니다.
24절에, “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존귀함을 주셨습니다.”합니다.
세상의 상식은 뭡니까?
아름다운 지체는 더 꾸며주고 부족한 지체는 소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공동체 즉 교회는 이런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가 될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확증하기 위해 문장의 앞에 ‘하나님께서는’ 합니다. 이런 사고와 실례는 인간세상의 상식이 아니라 그런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이게 파격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잘나서 뭐든지 으쓱대는 이들을 꾸짖고, 못나서 매일 숨어 지내는 이들을 격려하고 칭찬하여 어깨를 펴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하나 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속까지 하나가 되어서 한 몸을 이루는 운명공동체가 바로 ‘한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25~26을 보세요.
여기서 ‘그래서’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세요. 이 단어는 이 단어 이후에 나오는 내용이 이 단어 바로 앞의 내용의 결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몸의 분열이 생기지 않고 하나가 되는 일, 지체들이 서로 걱정을 하게 되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의 내용, 곧 아름다운 지체는 그대로 두더라도 부족한 지체에겐 더 존귀하게 대접하는 그런 파격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되는 현상을 ‘전도’라 하는 것이고, 이런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27)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일은 단지 교회 나오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집사 되고 권사 되었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흠투성이, 욕심 투성이 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려면 파격, 귀한 존재는 잠시 눈 밖에 두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존귀하게 대접하는 태도에서부터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거나 바울이 꿈꾸는 공동체 즉 교회는 이런 겁니다. ‘한 몸인 교회’말입니다. 누구도 누구를 깔보거나 없신여기지 않고, 누구도 누구에게서 무시당하지 않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귀한 대상으로 대접받는 그런 공동체 말입니다. 이게 우리가 구현해야 할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교회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는 지금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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