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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8: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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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8.11 주일 http://sungamch.net |
사도바울, 고대의 올림픽 경기를 관전하다.
행18:1-11
요즘 제가 마음에 두고 있는 글귀 하나가 있습니다. 장자 내편에 나오는 ‘唯道集虛 하고, 虛者集齊也 하라’는 글귀입니다. 아마 이 글귀가 제 인생의 노년과 삶의 마무리를 결정할 경구가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생의 좌표처럼 마음에 두는 이 글귀와 바울의 여러 신앙 고백적인 언어들이 의미상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와 같은 바울의 고백적 언어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나는 지중해 해변에 있는 소나무들을 사랑했다. 그 잎사귀 사이로 바다를 바라본다는 것, 흠 하나 없이 완벽해 보이는 그 품격을 본다는 것은 나에게 진정한 행복이었다.”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장 그르니에가 지중해를 보고 느낀 소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바울도 2천 년 전에 이 지중해를 누비고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루니에가 그랬듯이 바울도 지중해의 풍취와 사회 현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리 없습니다. 바울은 단지 모든 언어를 복음적인 말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2천 년 전 바울이 머물던 지중해 연변의 고린도인 것입니다. 이때가 아마도 서기 50-60년 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던 그 무렵, 서기 51년에 고린도 해협에 있는 이스트미아라는 도시에서 고대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올림픽 게임을 보게 됩니다.
고대 올림픽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⓵제우스신을 기리기 위해서 시작된 [올림피아]가 기원전 774년에 시작됩니다. 이 운동경기는 4년마다 열리면서 우승자에게는 올리브 관을 씌워 주었죠. 그런데 고대의 제전은 단지 올림피아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⓶네메아 라는 도시에서 시작된 제전은 기원전 573년에 2년 마다 열렸습니다. 이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은 샐러리잎으로 만든 관(파슬리)을 씌워 주었습니다.
⓷포세이돈을 기념하기 위한 제전은 기원전 582년에 시작되었는데 이를 [이스트미아]제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솔잎으로 만든 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이게 면류관입니다.
⓸그리고 ‘아폴로’신을 기념하기 위한 [델피]제전이 있었는데 이는 기원전 582년입니다. 여기에서는 월계관을 씌어 주었습니다.
이런 운동 경기가 네 곳에서 거의 매년마다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고 있던 시절의 역사적인 풍경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여러 언어들 중에는 이런 경기와 관계된 언어들을 세련된 신앙 언어로 다듬어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앙의 좌표처럼 제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글 속에 육상경기, 권투 경기와 같은 장면들을 연상하는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고전9:24-27
갈2:1-10
빌3:12-14
히121-2
딤전4:8, 6:12
딤후2:5,4:7
히브리서 12:1을 보세요. ‘경주’라는 언어가 나오죠? 이게 바로 고대의 육상 선수가 올림픽 경기장에서 달리는 장면인 것입니다. ‘달리다’라는 말은 본시 ‘트레코’인데, 이는 왕의 측근 신하가 전황을 보고하기 위해 서두는 행위(삼상22:17)입니다. 그게 ‘달리다’ ‘러닝’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뜻이 올림픽의 영향을 받으면서 ‘운동경기’에서의 한정된 의미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죠.
모든 선수들은 경기 전에 자신의 몸을 신에게 제대로 바치기 위해 군살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단지 빨리 달리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온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게 운동의 우선 순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걸 기독교 신앙에 적용해서 ‘우리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선수들에겐 자신의 몸을 신의 온전한 제물로 바쳐야하기 때문에 체중이 늘어나는 음식의 섭취나 연습에 방해가 되는 무절제한 방종은 모두 [죄]였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은 당시의 선수들이 나체로 경기를 했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의복이나 장신구 같은 것들은 벗어야 했겠지요. 신앙 생활하는 사람도 이런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온전한 하나님의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죄가 되는 것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3:14에 ‘푯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도 요즘 자전거 경주나 5000미터를 달리는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 마지막 바퀴를 남겨둔 한 바퀴가 되면 딸랑딸랑 방울을 울려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시간 같은 코스를 달리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달려 왔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걸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푯대로 그걸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안주하지 말고 뛰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이렇게 다 달리고 난 후에는 승리자에게 주는 상이 있겠죠. 고전9:25을 보면 나옵니다. 이 상은 육상 경기에서 주는 상을 의미합니다. ‘면류관’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이 경기를 관람했고 거기서 면류관을 씌어 주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것은 솔잎으로 만든 관이었습니다. 고전 9:26-27의 ‘허공을 치다’와 ‘눈 아래를 치다’는 오늘날의 권투경기와 흡사한 경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생뚱스럽게 바울의 신약성서 속에서 고대의 올림픽 냄새를 조금 맡았습니다.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바울은 그리스도인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수들이 신에게 근육을 바치기 위해 절제를 하고 근육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덕을 세워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의 근육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근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주장한 바울의 언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 삼아 힘차게 달리자’라든지 ‘부르신 부름에 상을 받기까지’(빌3:14)같은 것들입니다. ‘절대로 허공을 치며 맥없는 신앙인이 되지 말라’(고전9:24-27)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덕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아 줄기차게 달리는 것이 아닙니까? 마음의 군더더기, 신앙의 군살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순수한 몸짓으로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유일한 그리스도인의 덕입니다. 죄로 덮여 있는 옷은 벗어야 하고, 신앙의 올리브기름을 온 몸에 발라야 합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주시는 합당한 상을 위해서만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치열한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두들 이걸 잃어버렸어요.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요. 치열한 경주는 않고 위로와 격려와 보상만이 신앙인 줄 알아요.
사도 바울은 지중해의 갈맷빛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열리는 이스트미아 올림픽을 관전합니다. 그리고 달음질 하는 선수, 권투하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믿게 된 신앙, 자기에 의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의 물결을 이뤄주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자신의 몸에 신의 얼굴이 새겨지도록 치열하게 훈련하듯, 기독교 신앙인들도 삶속에서 예수의 얼굴이 새겨져 출렁거리길 고대했던 것입니다.
훗날, 영국 성공회와 청교도 신앙을 풍요롭게 해 준 켈트인들은 몸이라는 것을 영성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육체는 흙으로 빚은 그대의 집이다. 육체의 감각은 하나님께로 가는 출발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몸이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무슨 감감들을 훈련해야 하나요?
몸이나 교회는 비대하게 몸집을 키우는 일이 옳은 게 아닙니다. 출발점과 결승점을 기억하고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의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성도들은 영혼의 근력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다른 곳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니 그 푯대, 그리스도에게서 어느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마십시오. 이 달음질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참된 영성의 사람입니다.
행18:1-11
요즘 제가 마음에 두고 있는 글귀 하나가 있습니다. 장자 내편에 나오는 ‘唯道集虛 하고, 虛者集齊也 하라’는 글귀입니다. 아마 이 글귀가 제 인생의 노년과 삶의 마무리를 결정할 경구가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생의 좌표처럼 마음에 두는 이 글귀와 바울의 여러 신앙 고백적인 언어들이 의미상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와 같은 바울의 고백적 언어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나는 지중해 해변에 있는 소나무들을 사랑했다. 그 잎사귀 사이로 바다를 바라본다는 것, 흠 하나 없이 완벽해 보이는 그 품격을 본다는 것은 나에게 진정한 행복이었다.”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장 그르니에가 지중해를 보고 느낀 소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바울도 2천 년 전에 이 지중해를 누비고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루니에가 그랬듯이 바울도 지중해의 풍취와 사회 현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리 없습니다. 바울은 단지 모든 언어를 복음적인 말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2천 년 전 바울이 머물던 지중해 연변의 고린도인 것입니다. 이때가 아마도 서기 50-60년 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던 그 무렵, 서기 51년에 고린도 해협에 있는 이스트미아라는 도시에서 고대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올림픽 게임을 보게 됩니다.
고대 올림픽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⓵제우스신을 기리기 위해서 시작된 [올림피아]가 기원전 774년에 시작됩니다. 이 운동경기는 4년마다 열리면서 우승자에게는 올리브 관을 씌워 주었죠. 그런데 고대의 제전은 단지 올림피아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⓶네메아 라는 도시에서 시작된 제전은 기원전 573년에 2년 마다 열렸습니다. 이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은 샐러리잎으로 만든 관(파슬리)을 씌워 주었습니다.
⓷포세이돈을 기념하기 위한 제전은 기원전 582년에 시작되었는데 이를 [이스트미아]제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솔잎으로 만든 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이게 면류관입니다.
⓸그리고 ‘아폴로’신을 기념하기 위한 [델피]제전이 있었는데 이는 기원전 582년입니다. 여기에서는 월계관을 씌어 주었습니다.
이런 운동 경기가 네 곳에서 거의 매년마다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고 있던 시절의 역사적인 풍경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여러 언어들 중에는 이런 경기와 관계된 언어들을 세련된 신앙 언어로 다듬어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앙의 좌표처럼 제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글 속에 육상경기, 권투 경기와 같은 장면들을 연상하는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고전9:24-27
갈2:1-10
빌3:12-14
히121-2
딤전4:8, 6:12
딤후2:5,4:7
히브리서 12:1을 보세요. ‘경주’라는 언어가 나오죠? 이게 바로 고대의 육상 선수가 올림픽 경기장에서 달리는 장면인 것입니다. ‘달리다’라는 말은 본시 ‘트레코’인데, 이는 왕의 측근 신하가 전황을 보고하기 위해 서두는 행위(삼상22:17)입니다. 그게 ‘달리다’ ‘러닝’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뜻이 올림픽의 영향을 받으면서 ‘운동경기’에서의 한정된 의미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죠.
모든 선수들은 경기 전에 자신의 몸을 신에게 제대로 바치기 위해 군살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단지 빨리 달리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온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게 운동의 우선 순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걸 기독교 신앙에 적용해서 ‘우리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선수들에겐 자신의 몸을 신의 온전한 제물로 바쳐야하기 때문에 체중이 늘어나는 음식의 섭취나 연습에 방해가 되는 무절제한 방종은 모두 [죄]였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은 당시의 선수들이 나체로 경기를 했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의복이나 장신구 같은 것들은 벗어야 했겠지요. 신앙 생활하는 사람도 이런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온전한 하나님의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죄가 되는 것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3:14에 ‘푯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도 요즘 자전거 경주나 5000미터를 달리는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 마지막 바퀴를 남겨둔 한 바퀴가 되면 딸랑딸랑 방울을 울려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시간 같은 코스를 달리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달려 왔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걸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푯대로 그걸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안주하지 말고 뛰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이렇게 다 달리고 난 후에는 승리자에게 주는 상이 있겠죠. 고전9:25을 보면 나옵니다. 이 상은 육상 경기에서 주는 상을 의미합니다. ‘면류관’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이 경기를 관람했고 거기서 면류관을 씌어 주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것은 솔잎으로 만든 관이었습니다. 고전 9:26-27의 ‘허공을 치다’와 ‘눈 아래를 치다’는 오늘날의 권투경기와 흡사한 경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생뚱스럽게 바울의 신약성서 속에서 고대의 올림픽 냄새를 조금 맡았습니다.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바울은 그리스도인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수들이 신에게 근육을 바치기 위해 절제를 하고 근육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덕을 세워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의 근육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근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주장한 바울의 언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 삼아 힘차게 달리자’라든지 ‘부르신 부름에 상을 받기까지’(빌3:14)같은 것들입니다. ‘절대로 허공을 치며 맥없는 신앙인이 되지 말라’(고전9:24-27)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덕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아 줄기차게 달리는 것이 아닙니까? 마음의 군더더기, 신앙의 군살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순수한 몸짓으로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유일한 그리스도인의 덕입니다. 죄로 덮여 있는 옷은 벗어야 하고, 신앙의 올리브기름을 온 몸에 발라야 합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주시는 합당한 상을 위해서만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치열한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두들 이걸 잃어버렸어요.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요. 치열한 경주는 않고 위로와 격려와 보상만이 신앙인 줄 알아요.
사도 바울은 지중해의 갈맷빛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열리는 이스트미아 올림픽을 관전합니다. 그리고 달음질 하는 선수, 권투하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믿게 된 신앙, 자기에 의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새로운 신앙의 물결을 이뤄주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자신의 몸에 신의 얼굴이 새겨지도록 치열하게 훈련하듯, 기독교 신앙인들도 삶속에서 예수의 얼굴이 새겨져 출렁거리길 고대했던 것입니다.
훗날, 영국 성공회와 청교도 신앙을 풍요롭게 해 준 켈트인들은 몸이라는 것을 영성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육체는 흙으로 빚은 그대의 집이다. 육체의 감각은 하나님께로 가는 출발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몸이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무슨 감감들을 훈련해야 하나요?
몸이나 교회는 비대하게 몸집을 키우는 일이 옳은 게 아닙니다. 출발점과 결승점을 기억하고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의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성도들은 영혼의 근력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다른 곳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니 그 푯대, 그리스도에게서 어느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마십시오. 이 달음질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참된 영성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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