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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8:4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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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영화 목사 |
참고 : | 당진 함께하는 교회 http://tgchurch.hompee.com |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누가복음 8 :49 - 56
48.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9.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거라사인의 땅에서 귀신들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은 다시 건너편 갈릴리로 오셨는데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회당장 ‘야이로’ 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 회당장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12살 딸이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가서 딸의 병이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딸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기에 한시가 급한 야이로는 예수님을 만나자 엎드려 간청을 하였고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집으로 가시는 길에 돌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이 예수님 뒤로 와서 가만히 그 옷가를 만졌더니 그만 그 혈루증이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그 사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느냐?” 라고 물으시고 모두가 이 일에 대해 알고 알지 못하고 있을 때에 한 여인이 자신의 행위를 고백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혈루증을 앓았던 그 사연을 전부 이야기를 하고 왜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지를 전부 이야기하였으며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는 말씀으로 여인의 믿음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높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한시가 급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다가 길거리에 일어난 이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한참동안 시간을 지체하고 만 것입니다. 그 사이에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49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야이로의 딸이 죽었기에 이제 모든 것이 다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절망입니다.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5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분 이 말씀은 어쩌면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딸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하시니 현실적으로 받아 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으라는 말씀을 참으로 많이 하셨습니다.
사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믿으라’ 는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오는데 주님은 ‘믿으라’ 는 말씀을 강조할 때 두 가지 믿음의 장애물을 극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하셨으며 두 번째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 두려움과 의심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면 의심에 이르고 의심에 이르면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두려움과 의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없이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두려워하느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라.” 풍랑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이 두려워하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에도 주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느냐? 왜 의심하느냐?” 이렇게 주님은 두려움과 의심을 극복하면서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이로는 사회적으로는 회당장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정적으로는 큰 문제를 안고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12살 된 딸이 병이 중하여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이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두 가지의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기 딸의 중한 병은 예수님께로 가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께로 가야만 해결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예수님의 무릎아래 엎드려 간청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분적으로 본다면 대단히 큰 사건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천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죄인의 친구로 멸시를 받고 있을 때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하는 이것은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단히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회당장은 율법의 선생님입니다. 율법의 지도자입니다. 유대주의의 지도자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지도자에 속하는 회당장 야이로가 사람들에게 죄인의 친구라고 비웃음을 받으며 멸시받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예수님은 야이로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기를 허락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야이로의 이런 믿음의 고백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의 고백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간 예배를 드리러 이 자리에 나왔지만 우리 몸이 교회에 나왔다고 해서 이것만으로 예배가 성립되지는 않습니다. 예배에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답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이 자리에 오셔야 됩니다. 그리고 믿고 기도해야합니다. 믿고 참여해야 합니다. 믿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나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하실 수 있으며 그분께 가야 문제의 답이 있다’ 는 이 믿음을 가지고 와야 예배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야이로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었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 때문에 그의 회당장의 지위도, 권위도, 그가 갖고 있는 자존심도 다 버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자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온전한 신앙고백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서도 마음을 닫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지만 우리 속에 교만과 불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에 그 이름 앞에 온전히 무릎 꿇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나아기는 진정한 신앙의 고백을 드리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난처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딸 때문에 주님 앞에 무릎까지 꿇었는데 그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에, 더더군다나 야속한 것은 주님이 좀 빨리 가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길에서 예기치 않게 한 여자가 나타나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입니다. 여러분 야이로를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그야말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급한 사정을 봐 주지 않으시고 길에서 시간을 지체하여 그만 자기 딸이 죽고 말았으니 결과를 보면 너무나 야속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딸의 죽음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위기가 없을 때 믿음이 아니라 위기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야이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앞에 자칫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 예수님은 “야이로야, 네가 지금 힘이드냐? 괴로우냐? 참지 못하겠느냐? 이해가 안 되느냐? 그러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떻게 보면 너무나 고집스럽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부분만 보게 됩니다. 언제나 현상만 보게 됩니다. 그 배경에 있는 진실을 볼 줄 모른다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흔히 불신자들은 좋은 일을 앞두고 장례식에 가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언젠가는 다 장례식의 주인공이 될 존재들인데 그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 앞의 모든 문제가 그렇습니다. 지금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현실에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지만 야이로가 당한 현실은 주님의 눈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보실 때는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가서도 52절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죽은 사람 앞에서 그런 실례의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때에 예수님은 54절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잡아 일으키시니 그 영이 돌아와 그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살아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시며 예전과 같은 몸으로 살아난 것을 보이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기적의 건너편을 주목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병든 사람의 관심은 병을 고침 받는 것입니다. 딸이 죽은 아버지는 딸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원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귀신들린 자를 낫게 하고 병자를 고치기 위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역시 메시야의 본래의 사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원래의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왜 살리셨습니까? 그것은 야이로의 믿음을 북돋아 주기 위함이었으며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단순히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나사로도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가지 아니하시고 유대지방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언제 가셨는가하면 죽은 지 나흘 후 장례가 이미 끝난 후에 도착하셨습니다. 집에 온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르다는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망입니다. ‘주님, 좀 일찍 오시지요’ 라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는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고 “마지막 날 부활 때는 살 줄을 믿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살리라는 마르다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부활자체가 되시는 주님이 계시는 이 현장에서 나사로가 얼마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외칠 때 죽은지 나흘되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나오는 놀라운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여러분 나사로를 살린 기적을 베푸신 주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에 대하여 요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린 것은 단순히 나사로와 가까워서나 그의 가족을 좋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사로를 살리는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가족들과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내가 하늘로부터 온 메시야임을 믿도록 하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지 않더라도 믿는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죽은 자가 살아나야 믿고, 병든 자가 고침 받아야 믿는다면 주님은 그렇게라도 믿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관심은 병든 내 가족이 살고, 죽은 내 가족이 살아나는 그 이상 더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적의 방법으로 우리를 믿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게 하시는 이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이적을 보지 못했어도,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지 못했어도,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주의 성령이 우리를 믿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우리 편에서 기적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런 기적이 없어도 믿게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기적인 것입니다. 내가 눈으로 보지 않고도 믿었다면 그 믿음이 기적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믿게 하는데 목적이 있지 우리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여지는 것에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을 뛰어넘어 그냥 믿는 것이 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이란 우직하고 참 미련하게 보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데 믿으라는 말만큼 미련한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말밖에는 정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우리를 믿게 하는데 있고 더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 야이로는 기본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딸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 야이로의 믿음을 더 강하고 크게 해 주실 필요가 있으셨기에 그의 딸을 통해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야이로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 라는 말씀이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일매일 믿음을 방해하는 두려움, 의심을 극복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게 하는 유혹과 불신앙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수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믿는다 하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우리의 한계를 정하고 믿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이러한 불신앙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상황이지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현실 앞에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결과만 치중합니다. 죽은 딸이 살아나는 그것에만 집착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 이를 수 있는 ‘믿기만 하라’ 는 주님의 음성을 먼저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현실 앞에 두려워하지 마시고 주님의 이 음성을 붙들고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3. 2. 24. 사순절둘째주. 주일예배말씀. 이영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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