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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4: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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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
교회의 청년성 - 청년아, 나를 따르라
마4:18-22
2010. 3. 21, 청년주일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A형은 A급입니다)
기독교는 청년의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 청년종교입니까? 청년 예수, 33년간 세상에 계셨던 예수,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공생애를 마감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래서 영원한 청년으로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믿고 따르기에 기독교는 청년의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몸 된 교회 역시 언제나 청년성을 지니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 그리고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0절과 22절은 제자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는데 두 구절을 자세히 보시면 같은 단어가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이라는 단어 그리고 ‘버리고’ ‘따르니라’ 라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단어는 청년의 과단성, 즉 결심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이러한 성향 때문에 종종 나이 드신 분들과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소위 기성세대의 여유와 침착, 모든 것을 따져 보고 살피고 이모저모 점검하고 계획하는 준비성이 결여된 듯한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너무 조급한 게 아닌가 저러다 일을 그르치면 어쩌나 염려를 하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부르실 때에 곧 즉시 예수를 따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생각해 보고 따져보고 계산해 보고 이렇게 저렇게 살펴보고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그들이 처음에 가졌던 그 결심은 희미해졌을 것이고, 점차 현실에 안주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됩니다.
청년기를 계절에 비유한다면 늦봄이나 초여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물이 꽃피고 열매 맺기 위해 열심히 영양을 섭취하고 섭취한 영양을 각 줄기와 가지에 올려 보내듯이 청년의 시기는 인생의 원숙한 열매를 맺기 위해 왕성하게 움직이는 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왕성한 시기를 사는 수많은 청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고 지금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요셉은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던 중 30세에 당시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기근에 허덕이는 애굽과 주변국 백성들을 구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네 청년은 생명을 걸고 왕이 명령한 우상 숭배와 제물을 거절하는 등 믿음의 절개를 지킨 결과 이방인인 바벨론의 왕마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숭배하도록 명령하게 만드는 쾌거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청년 세례 요한은 동생의 부인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 살고 있던 헤롯에게 ‘회개하라’ 외침으로써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의 진수를 보여주었습니다.
루터는 33세때, 부패한 카톨릭을 향해 95개조의 항의문을 들고 종교 개혁을 향한 일보를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계에 전무후무한 대 저서인 기독교강요를 27세에 집필하였습니다. 스펄전은 27세때 런던에서 대 부흥집회를 인도했습니다. 빌리그레함이 세계적인 대 부흥사로 활약하기 시작한 때는 그의 나이 25세 때였습니다. 리빙스톤은 23세 때에 아프리카에 들어가 30년간을 한결같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생명을 건지는 일에 진력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한국 장로교의 시작은 한 기독청년의 선교 열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 Horace Grant underwood ) 가 1885. 4. 5 미국 북장로회의 파송을 받아 한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습니다.
그는 도착후 2년간 한국어를 공부한 뒤,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인 1887. 9. 27 14명의 교인과 함께 정동 한옥에서 새문안교회를 창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청년 언더우드의 선교정신이 우리 청년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면면히 흘러들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서는 세상의 온갖 명예와 권세, 부귀영화를 다 누려 보았다고 할 수 있는 솔로몬이 인생 말년에 남긴 유언과 같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도서의 결론 부분인 마지막 12장을 청년들에게 할애하고 있습니다. 왜 그가 자신의 유언과도 같은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필 청년들을 지목해서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마도 자신이 살아온 길을 뒤돌아볼 때 특히 청년 시절 자신의 삶 가운데 유달리 아쉬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후대의 청년들은 후회 없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그러한 글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12장 1절 말씀을 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오늘, 지금 청년의 시절을 사는 바로 이 때, 하나님을 기억하라. 여호와를 앙망하라. 예수를 믿고 그분의 구원 역사를 생각하며 그분의 높고 깊은 뜻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그분의 가신 그 길로 걸어가라.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아라. 그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세월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공부도 때가 있습니다. 지금 힘과 체력, 갈고 닦은 지식이 있는 바로 지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아껴 써야 합니다. 허튼 데 돈과 시간과 지식과 정력을 낭비해서는 곤란합니다.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나만의 역할을 찾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인기는 반짝하지만 진실은 영원합니다. 돈버는 건 한 때지만 신용은 평생 갑니다. 이것저것 다해보고 나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바른 일, 선한 일만 하기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적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에 영원의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야 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 가운데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하리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잠 29:18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 말씀합니다. 묵시라는 말의 어원의 뜻은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비전이 없으면 어려워하거나 삼가는 것 없이 제멋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전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읽고 보는 통찰력 내지는 상상력입니다.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바로 더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며 영원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저 먼 날을 내다보는 사람은 절대로 현재의 안일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미래를 향해서 하루하루 자기 자신을 가꾸어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전이 없는 사람은 방자해 지고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합니까? 나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 내 가슴에 심겨진 그 진리를 붙들고 기도하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며 열심히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그 사람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요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생명 구원입니다. 죄로 인해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는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며 지금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믿은 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가 주기를 우리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단 12:3절 말씀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성공적인 인생의 기준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의 목표요 이유입니다.
돈을 벌어서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컴퓨터를 익혀서 그림을 그려서 비행기를 만들어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쓰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소망가운데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은 결코 헛된 인생이 아닙니다.
비교) 법정 스님의 입적과 업적 - 문익환, 장기려 박사와 비교
성 프란시스코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살다가 예수를 만난 후, 자신의 가진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모두 나누어 준 뒤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 무엇인가 소유하고 그래서 힘을 행사하고 다른 사람을 부리고 쾌락을 누리는 삶을 살아 보았지만 거기에는 약간의 기쁨이 있었다. 그러나 나를 희생하고 이웃의 발을 씻기고 섬길 때 나의 삶에 숭고한 기쁨이 밀어 닥치는 느낌이었다.”
청년의 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 진리를 보며 결단하는 시기입니다.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만큼 준비할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작고한 소설가 황순원 씨가 생전에 찾아간 제자들에게 남긴 말입니다.
"대패질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섣불리 자신의 능력, 지식을 자랑하려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말이며, 실력을 갈고 닦아 후일 제대로 된 인생의 역작을 남기기를 바라는 원로의 진심어린 유언이라 여겨집니다.
이 말은 특히 뭔가 빨리 성취하고자 의욕에 불타는 청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빌 4;13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신감을 심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 바로 앞에 있는 12절 말씀이 13절의 고백을 가능하게 했던 배경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백으로 넘칩니다. 그러나 청년이 간과하기 쉬운 것은 그렇게 되기까지의 필요한 연단과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는다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할 수 있기까지 배워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청년부 모임도 갖고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옆에 있는 친구가 괴로워할 때 함께 아파하고, 그의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의 언행을 절제하는 훈련과 믿지 않는 친구에게 자신이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은혜를 나누는 순종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이미 인생 경험이 풍부한 어른들로부터 생생한 삶의 체험을 들으며 간접 경험을 쌓아가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훈련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준비된 사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덧입혀 주실 때에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청년들이 떠나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교회에 있는 청년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을 격려하고 세워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청년들이 교회에 있기 때문에 교회에 활기가 넘쳐야 합니다. 청년들이 교회 이곳 저 곳에서 활동하여 그들의 힘찬 발걸음과 발랄한 목소리, 장난기 섞인 웃음소리로 교회에 생기가 넘쳐야 하겠습니다.
젊은이들의 헌신으로 찬양대와 교회학교 등의 봉사의 손길이 이어집니다. 그들이 봉사하고 있기에 어른들이 일일이 하기 힘든 힘을 쓰는 일을 쉽게 추진해 갈 수 있습니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우리 교회의 신앙이 대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그러한 확인을 통해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있는 교회, 청년들이 왕성하게 살아 움직이는 교회, 그들이 목청 높여 찬양하고,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져 복음 전하는 교회야 말로 살아있는 교회요 내일이 보장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미래에 대해 불안한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학업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청년들의 불안 요인으로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터에 최근 한국의 정치 경제의 암울한 현실은 더욱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습니다.
현재 대졸 미취업자로 추정되는 사람은 28만여명이고 그중 20만명이 1년 이상의 장기 실업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무조건 사회 구조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3D업종을 기피하고 능력 없이 눈만 높은 당사자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논하기 이전에 교회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들을 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깨진 가정으로 인해 겪는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자신감을 상실해가는 청년들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고 다시 삶의 의욕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들을 든든히 받쳐주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예수 믿고 나서 찾아 온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저는 신앙을 통해 소망을 갖게 된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도 없이 하루하루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예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난 후 세상은 여전히 살기 힘들고 돈도 없어 은행이 있고 통장이 있는 줄은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가 할 일이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있는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감사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마치 오뚜기처럼 세상이 이리 저리 흔들어도 다시 일어서고 또 다시 일어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중심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바로 저와 같은 체험을 하기 원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 어르신들께서 그들의 형님, 누님, 부모님이 되셔서 그들을 붙들고 기도해 주시고 따뜻하게 품어 주시기 바랍니다.
“수고 많았지. 공부하기 힘들지. 회사 생활 고되지. 지금 취직자리 알아보고 있다면서. 나도 기도 하고 있어 너무 염려하지 마”
어른들의 따뜻한 말씀을 듣고 우리 청년들은 주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눈으로 보며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저는 렘 31: 12- 13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이 바로 어르신들과 젊은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아껴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그린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주의 은혜가 충만한 우리 교회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그려보았습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 그들의 결단과 열정으로 오늘날 세계 도처에 예수를 따르는 15억의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다면 이제 21세기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지금,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의 무관심과 안일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청년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 예수께서 남기신 명령, 복음을 증거하고 생명을 살리라는 그 명령을 지금 곧 수행하시는 진정한 청년의 삶을 사시는 여러분, 새 사람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 이라는 시를 읽어 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과,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참신함을 뜻하나니,
생활을 위한 소심성을 초월하는 용기, 안이함에의 집착을 초월하는 모험심, 청춘이란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우리는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는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어가나니,
그대가 기개를 잃고, 정신이 냉소주의의 눈과 비관주의의 얼음으로 덮일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이네.
그러나 그대의 기개가 낙관주의의 파도를 잡고 있는 한, 그대는 여든 살로도 청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네"
이 자리에 계신 분 모두가 생명을 구원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믿음으로 삶의 무기력과 안일함을 깨뜨리시고 하늘나라의 소망을 품고, 예수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용기 있게 삶 속에 뛰어 드셔서 이제 곧 신록과 같은 푸르고 청청한 삶, 진정한 청년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복된 주일 저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 나아와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청년의 기백으로 살아있는 교회 언제나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의 명령에 깨어있는 교회, 청년을 품는 교회 청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청년 예수를 따라 언제나 새롭게 부어 주시는 은혜 속에 새롭게 전진하는 우리 세광 교회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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