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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호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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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하나님을 아는 지식
호세아 6: 1- 6
영국 에딘버러 의과대학에 제임스 심슨 경 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부터 150여 년 전에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까지는 수술을 할 때 마취를 하지 않고 그대로 생살을 찢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하는 사람들의 공포심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심슨 경이 발견한 클로로포름 덕분에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수술의 공포감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제자들이 찾아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평생을 통해서 가장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한다면 무엇을 들겠습니까?”. 그들은 그가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것이 내 생애 최대의 발견이었다.”하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우리는 세상의 많은 지식을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믿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절망합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잘못 삽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헌신을 모릅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하나님의 길을 잘 모르고, 하나님의 약속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는 것 같아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하여 많이 그리고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열심은 사나운 말과 같습니다. 빈 깡통이 가장 요란한 말을 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사사기 11장을 보면 입다가 믿음으로써 이방 나라를 물리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그런 승리를 하는 과정에서 그가 잘못된 서원을 함으로써 자기의 무남독녀를 번제의 제물로 불태워 죽이는 너무나 슬프고 불행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입다는 큰 용사였고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도 역시 부족함이 있고 연약함이 있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백성답지 않은 크나큰 실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입다는 만약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승리하고 돌아오는 그 날에 자기 집 문을 열고 나와서 자기를 가장 먼저 환영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해 주시면 나의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번제란 희생 짐승을 잡아 통째로 제단에서 불태워 신에게 드리는 제사로서, 구약 율법에 나오는 5대 제사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제사가 바로 이 번제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번제의 제사를 드리되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짐승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했지, 사람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 한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그 사건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나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불태워서 바치는 그런 번제를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가르치신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인신(人身) 제사라고 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신 제사를 명백하게 금지하고 계십니다. 즉 신18:9-12에서 보면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일이 가나안 족속들과 그 주변 민족들 사이에서는 행해지고 있었는데, 그런 제사를 하나님은 가증한 행위라고 하시며, 바로 그런 가증한 일 때문에 가나안 족속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입다는 그런 인신 제사를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입다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열심 가운데에는 지식을 따르지 않은 인간적인 열심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집 문에서 나오는 사람이란 입다와는 가족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식구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런 사람 중에 하나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대단한 열심이며 대단한 헌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게 되었을 때, 입다의 승리를 기뻐하며 환영하러 나온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의 무남독녀 외딸이었을 때 입다는 얼마나 큰 슬픔과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입다는 그 서원을 이행합니다. 즉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 딸을 번제로 바치고 맙니다. 많은 주석가들이나 설교자들은 이처럼 입다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인신 제사를 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서원을 이행한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견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원한 것을 성실하게 지킬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시15:1-4절 참고).
그러나 그 서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의 서원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원치도 않으시며 오히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어떤 일을 서원해 놓고 그것을 이행하는 것을 우리는 신실한 것이라고 칭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깡패들이나 조폭(組暴)들 사이에 맺어지는 의리와 충성을 아름답다고 동경하며 칭찬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릇된 서원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무지한 종교적 열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입다는 분명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만한 훌륭한 면모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이방인 방식의 인신 제사를 서원하고, 또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는 성실하게 이행한 것은 한마디로 무지한 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번제를 드리거나 서원의 제물을 바치라고 명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 그가 어떤 서원을 하거나 번제를 드리면 승리를 주시겠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입다가 그런 서원을 합니다만, 그 앞 절에 보면 이미 입다에게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 것은 그 자체가 이제부터 하나님이 입다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그런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열심으로 무언가를 하나님께 더 드리면 하나님이 더욱더 자기와 함께 해주시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열심은 그의 가정에 크나큰 불행과 슬픔을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타락한 종교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종교적인 본능은 인간이 무언가 귀중한 것을 신에게 바치면 신이 은총을 주시고 자비를 내려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흔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이것은 인간이 신에게 무언가를 먼저 드려서 신으로부터 은총을 얻고 복을 얻는다는 인간 종교 본능의 표현입니다.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쳤더니 천지신명이 감동하여서 아버지 심봉사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종교 논리입니다. 더 나아가면 유대교의 율법주의가 바로 이런 타락한 인간 종교 본능과 열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와 율법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열심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어리석고 불행한 민족이 되고 만 것입니다.(롬10:1-3. 참고)
입다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역경을 이기고 자기 민족을 구원해 낸 영웅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암흑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부족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고서도 공연히 자기 딸을 잃는 슬픔 속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알아 가는 일에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종교 생활을 할 수도 있고, 더러는 대단한 열심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빗나간 열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식 없는 믿음, 지식 없는 열심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온전한 지식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똑바로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1. 체험과 행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의과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는 도중에 교통 사고를 목격했습니다. 많은 응급환자들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급히 의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응급 치료에 대한 지식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치료를 하려고 하니 두려움도 생기고 손이 떨려서 잘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책으로 공부한 것만으로는 절대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차를 운전하기 위해 운전에 관한 책을 여러 권사서 모두 읽은 후 운전과 자동차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에서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적인 책을 많이 읽고 성경적인 지식을 많이 습득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지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에도 지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많은 체험이 있어야 확고하고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체험이 없는 지식만의 신앙으로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거나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우리 아들이 사회시간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를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은 모든 학생에게 백지와 접착 테이프를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교실 바닥에 누워 책상 밑바닥에 종이를 붙이게 한 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연필로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잖아도 장난을 치고 싶어 오금이 쑤시는 나이의 학생들인지라 바닥에 벌렁 누워 친구들과 발장난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은 점수를 매기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그릴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로 그리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뒤통수가 바닥에 닿은 채로는 그리기가 어려워서 누운 채로 머리를 위로 절반쯤 쳐들고 있으려니 목이 부러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게다가 연필로 그린 것을 지울 때마다 지우개 가루가 싸라기눈처럼 얼굴 위로 떨어졌습니다. 1시간 내내 좁은 책상 밑에 드러누워 고개를 반쯤 쳐들고 지우개 가루를 마시면서 그림을 그리려니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로 하여금 미켈란젤로의 수고를 체험하게 하려고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셨습니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 위대한 작품을 완성한 미켈란젤로의 모든 고통을 다 체험하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워서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라도 체험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 아들은 아직도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대한 정열과 예술혼에 대해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도 체험을 통해 습득될 때 살아있는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체험 중에서도 특히 신앙으로 인해 고통과 수모, 손해를 당할 때 예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나 인격적인 미성숙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가장한 무계획성이나 용기를 가장한 무모함, 열정을 가장한 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진정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다”고 했고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자기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배운 지식이야말로 진정으로 살아있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하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의 입구에서 천사가 “너는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어거스틴이며 그리스도인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다가와 어거스틴을 자세히 보더니 말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네 머리 속에는 키케로의 철학으로 가득 차 있어.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라고 호통을 치며 내려가라고 했습니다. 놀라서 눈을 떠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는 그 꿈으로 인해 철저하게 회개하였으며 결국엔 성자가 되었습니다. 체험과 행함으로 얻은 것은 참으로 귀중한 지식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2.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욥39:1)
산 염소는 사람들이 잘 기어오르지 못하는 가파르고 위험한 곳을 잘 오를 수 있습니다. 필요하면 그들은 뒷발로 일어서기도 하며 좁고 작은 곳에서도 완전히 회전할 수 있는 재주 있는 등산가입니다. 일반적으로 싸움을 좋아하는 동물은 아니지만 염소는 뿔을 매우 잘 사용합니다. 그 뿔로 화난 회색곰과 싸우기도 하며 짐승과 싸워 이기기도 합니다. 이따금 염소는 외로운 생활을 합니다. 매우 춥고, 곤충과 동물이 거의 살지 않는 높은 곳에서 삽니다. 새끼 염소는 태어나기 전에 어미 배에서 5달을 지냅니다. 태어난 지 4시간 후면 새끼는 뛰고 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날 때부터 털이 많이 나있으며 눈도 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염소가 냄새가 난다고 하여 싫어하지만, 염소는 아주 유용한 동물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소의 젖보다는 염소젖을 더 많이 마시고 있습니다. 염소젖은 위에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좋습니다. 염소 가죽은 아주 좋은 피혁 제품을, 그 털은 좋은 섬유를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이 귀중한 동물이 어떻게 유능한 등산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뒤꿈치는 지면을 고무와 같이 부드럽게 느끼도록 하는 뒷받침이 밑에 붙어 있으며 발굽은 바위를 움켜쥐는 강한 집계와 같은 역할을 하므로 염소는 견고하게 설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발" 을 가진 염소는 거의 수직으로 바위를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염소를 연구해 보면 재미있는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느냐? 염소가 어떻게 태어나는 줄 아느냐?" 하고 욥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염소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역시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현명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예배와 성경말씀을 통하여 날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므로 지혜로워지시고 열심을 품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잠18:15)
3.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활용해야 합니다.
지혜는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입니다. 지식을 활용하려면 먼저 지식을 축적해야 합니다. 지식이 깊어지면 지혜가 됩니다. 지식이 소중한 까닭은 영감을 주고 통찰력을 주고 지혜를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생명입니다. 기생 라합은 비록 기생이었지만 지식을 소유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소유한 지식을 잘 사용함으로써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을 알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정탐꾼을 감추어 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라합은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몸에서 보아스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지식은 사용되기까지는 땅에 심지 않은 씨앗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과 같은 지식을 활용하는 순간 그 지식은 파워가 됩니다. 라합도 지식을 사용했기에 생명을 얻었습니다. 지혜는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그 지식을 실천함으로써 드러납니다. 지식은 과거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학습을 통해 습득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놀라운 자원입니다. 우리는 많이 아는 사람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 가서 배웁니다. 특별히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많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만큼 볼 수 있고 아는 것만큼 느낄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것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칩니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영향력을 끼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좋은 지식을 선별할 줄 알고 활용할 줄 압니다.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 가운데 좋은 지식을 선별하고 활용하는 것은 지혜의 열매입니다. 좋은 지식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실체화하십시오.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도 실체화된 지식을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식을 단순히 소유하지 말고 실체화하십시오. 소유양식이 아닌 실체양식으로 지식을 체득하십시오. 무엇보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삶 속에 활용하는 지혜를 얻도록 하세요. 그때 당신의 삶은 성화되고 보배로운 지혜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호세아 4장 6절은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돈이 없어서 망하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없어서 망하는 것도 아니고, 권세가 없어서 망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삶은 '배우기를 거부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더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는 것'입니다. 요새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알지 못하는 것'에서 생기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신앙이 있고 봉사도 잘한다고 하는 한 집사님이 '새롭고 신기한 얘기를 해주는 영성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세미나를 1년 동안 다니니까 자기만 영성이 높은 것 같고 다른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영성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들도 거의 다 영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 기존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하는 영적인 보헤미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더 많이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것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책을 한 권만 읽지 말고 계속해서 많이 읽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무서운 사람은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폭넓게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더 배워야 삽니다. 모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서 호세아는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3가지를 꼭 알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칩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찢습니까?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줏대 없는 호인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엄하게 벌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죽이려는 데 있지 않고 우리는 살리려는 데 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고,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신다"는 말은 신속하게 우리를 일으켜주신다는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는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이 힘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가운데서도 사는 길이 있습니다. 넘어진 곳이 일어서는 곳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때가 가장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때입니다. 요즘 경제가 많이 어렵다고 합니다. 살아가기가 옛날보다 많이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곁 같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어두움이 깊어 질식할 것 같았는데 여지없이 하나님은 샛별처럼 일정하게 다시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소망의 길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늦을 수는 있지만 없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늦게 주어지는 은혜가 더욱 풍성한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한곁 같으십니다. 그처럼 한결같은 하나님, 한결같은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도 한결같은 모습, 한결같은 인격, 한결같은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어떤 분은 예배를 잘 드립니다. 그러나 너무 인색합니다. 그 사는 모습에는 자비와 인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드리는 예배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까요? 하나님은 인애가 없는 자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4-5절).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인애를 보여주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고 계심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키가 자라고, 체중이 늘어나기를 위해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도록 해 줍니다. 그리고 자녀가 성장해 가면서 지혜가 자라고 세상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조언과 여건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장성하면 출가시켜 그들 스스로가 살림을 꾸려 나가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속히 성장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훈련시키시고, 원수 마귀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기 위해 각종 은사와 능력으로 덧입혀 주시고, 그리고 성장하였을 때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도록 만드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동행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더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저의 삶 속에서 저는 감추어지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길 원합니다. 우리가 얄팍한 세상 지식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겸손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2부 :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지혜와 지식의 근본
미국 최고의 대학이라고 백과사전에 명명되어 있는 하버드대학은 미국에서 역사가 깊고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예일대학 역시 그렇게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하버드나 예일대학에 합격한 경우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들의 공부 방법은 얼마 있지 않아 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의 순위에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버드나 예일대학이 세계적인 대학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청교도들이 지금의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이주해 목사양성을 위한 종교 교육을 목적으로 1636년 설립한 학교가 지금의 하버드대학으로 발전했다. 예일대학 역시 1701년 청교도 목사님들이 모여 세운 학교이다. 하버드대학의 교육 형태는 미국 대학의 교과 내용 구성의 원형이 되었으며, 동시에 대학 교육의 이념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버드나 예일대학이 세계적인 학문의 요람이 될 수 있었던 근본에는 교회예배를 통해 여호와를 경외했으며, 하나님 말씀을 통한 교과 내용 실천에 있었던 것이다.
익 문제 사전 유출, 대학 편입학 시험 부정, 수능시험 부정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우리 교육의 현실에서 대학이라는 학문 요람의 경계에서 자행되는 온갖 부정을 바라보면서 교육의 근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성경은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육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교육의 내용은 성경이 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다(잠 3:5).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을 떠나라고 명하신다(잠 3:7). 지금의 우리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우리 교육의 토대는 계속 흔들릴 것이며, 그 가운데 가장 귀한 우리 청소년들이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청소년들이 수능 부정을 저지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 총체적 위기에 처한 교육을 구할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답은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크리스천 가정의 자녀들부터 하나님을 답으로 올바른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하버드는 J.애덤스 F.루스벨트 J.F.케네디 등 5명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각계에 명사를 배출시켰으며, 하버드 대학 졸업생 또는 교수를 지낸 사람 가운데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38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서 올바로 교육된 인재들이 사회와 나라를 올바로 이끌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의무를 다할 때 우리나라는 바르고 정직한 사회가 될 것이다.
2. 묵상 및 토의
0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배울 기회를 주시고 깨닫게 하실 때, 혹 내 지혜를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0 나는 진리로 인해 담대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0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고 응답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날로 더해지고 있습니까?
0 말씀을 바르게 깨달으며 주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을 깊이 앎으로 더욱 성장하기를 갈망합니까?
0 잠시라도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 세상 사람을 만족시키고자 불의한 행동을 한 적은 없습니까
3. 찬송: (506장) 예수 더 알기 원함은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후렴)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4. 지식에 관한 성경말씀:
0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잠15:7)
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0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4:6)
0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이사야33:6)
0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0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12:1)
0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 두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잠12:23)
0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잠15:14)
0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찌어다(잠22:17)
0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로마서10:2)
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잠8:10)
0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잠24:5)
5. 지식(무지)에 관한 금언:
0 지식은 힘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0 반만 배운 것만큼 위험한 지식은 없다.(타킨즈)
0 지식은 영혼의 행동이다.(벤 죤슨)
0 경험으로 얻은 것은 참으로 귀중한 지식이다.
0 책은 지식을 주고 인생은 지혜를 준다.(탈무드)
0 지식이 없는 열정은 사나운 말과 같다.
0 빈깡통이 가장 요란한 소리를 낸다.
0 무지를 두려워하지 말고 거짓된 지식을 두려워하라.(파스칼)
0 무지보다 더 지독한 어둠은 없다.(세익스피어)
0 무지는 순수가 아니라 죄이다.(브라우닝)
0 활동적인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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