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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 살다"(We Live In God)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655 추천 수 0 2013.09.16 17:36:53
.........
성경본문 : 요17:1-3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3년 6월 30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연속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24)
하나님 안에 살다"(We Live In God)
영생을 믿습니다--
요한복음(John) 17:1-3

1.

오늘로 24회에 걸친 '사도신경' 연속 설교를 마칩니다. 지난 반 년 동안은 교리에 대해 설교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 기간이었습니다. 때로는 어렵고 때로는 지루하기도 했을 이 연속 설교를 경청해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부디, 교우들의 신앙의 기초를 조금이라도 든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의 신앙의 기초는 매우 부실한 형편입니다.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면 허약체질과 같고, 집으로 따지면 부실공사로 지어진 집과 같습니다.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 질문하고 연구하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교회 다니면서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받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거나 횡설수설합니다. 혹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믿고 있으면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값싼 은혜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믿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어렵고 때로는 지루해도 믿는 바에 대해 궁리하고 연구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이비 신앙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험한 골짜기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 힘써 연구하라는 권면이 자주 나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 (고전 14:20)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히 5:13-14)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엡 4:14)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좋은 영양도 필요하고, 적당한 정도의 육체적인 활동도 필요합니다. 또한 성장하는 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 없는 성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들락날락하다 보면 저절로 성장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성장한다 대도, 그것은 아주 허약한 성장입니다. 이단 종파에 쉽게 넘어가고, 환난이 닥칠 때 믿음의 줄을 쉽게 놓아 버립니다. 따라서 단단한 음식도 먹어야 하고, 가슴 벅차도록 운동도 해야 합니다. 교리에 대한 설교는 비유하자면 단단한 음식 혹은 영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사도신경'의 마지막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부활절에 "몸의 부활"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여러분은 '영생'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모두 믿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믿어도 아주 확실하게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믿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복음의 요약'(the gospel in a nutshell)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에 숨어 있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라는 말을 뒤집으면,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한다"는 뜻이 됩니다. '멸망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폴루미'(apollumi)인데, '죽다', '사라지다', '잃어버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벌 받아 멸망 당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상태 그대로 두면 죽어 없어질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10:10)

여기서 '양들'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무슨 뜻입니까? 주님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진배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그냥 두면 장차 죽어 없어질 운명에 처해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죽음의 상태에 처해 있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믿기 전에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영생을 믿는가?"라고 묻기 이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이미 죽은 존재임을 믿는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님을 믿는가?

만일, 하나님 없어도 나는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즉 하나님을 떠나 살아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영생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영생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참된 생명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영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또한 믿을 수 있습니다.


3.

왜, 하나님 없이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호의호식하며 잘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아니, 어찌 보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만난 교우의 말이 생각납니다. 자신의 주변에 정말 악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 욕심대로 사람들을 이용하고 버리는데 그 수법이 너무도 잔인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만들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면 어떤 벌이든 받아야 마땅해 보이는데, 아무 일 없이 잘만 삽니다. 그 사람에게는 돈도 많이 꼬이고, 병도 안 걸리고, 돈으로 별짓을 다하는데도 만사형통할 따름입니다. 그 교우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제게 묻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데, 시편 73편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삽이라는 시인은 3천년 전에 그 교우와 똑 같은 말로 '악인들의 형통'에 대해 탄식합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례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입으로는 하늘을 비빙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시 73:4-9, 12)

이러한 현실로 인해 시인의 믿음은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믿고 선하게 사는 것이 모두 허사처럼 느껴졌고(11절), "나도 그들처럼 살아볼까?"(15절) 싶은 유혹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는 "넘어질 뻔"했고 "미끄러질 뻔"했습니다(2절).

시인은 이 문제를 두고 씨름하며 번민합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그 모든 의혹과 번민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물질과 육신만을 보니,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이 부러워 보였고,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에 마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였고, 하나님 나라가 보였습니다. 물질과 육신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러워 보였던 악인들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물질이 전부인 줄 알고 물질에 빠져 살다가 물질과 함께 썩어져 버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 그들은 한탄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질"(20절)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다가 결국 멸망할 운명에 처해 있으며, 지금 떵떵거리고 있지만 실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시인은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우둔하여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집승이었습니다. (22절)


4.

요즈음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사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까? 뿌듯한 생명력을 매일 느끼고 계십니까? 최근에 "아, 이런 게 사는 거지!"라고 감탄해 보셨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습니까? 하는 일마다 잘 되어서입니까? 여러분이 즐기는 쾌락 때문입니까?

정말,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이 그런 것을 위해 지어졌다고 느끼십니까? 그것으로 진정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혹은, 요즈음 사는 것 같지 않게 살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아무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데 때가 되었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먹고 있는 자신이 벌레처럼 느껴졌던 적은 없습니까? 숨은 쉬고 있지만 살아있는 느낌이 없어서 살을 꼬집어 보고 싶었던 적은 없습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위험한 생각에 솔깃한 적은 없었습니까?

그런 느낌이 심각한 지경이라면 의사를 만나 보셔야 합니다. '현대판 전염병'(modern-day epidemic)이라고 불리는우울증은 때로 말기 암보다 더 위험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울증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깊고 강한 믿음의 사람들도 우울증을 겪을 수 있습니다. 감기처럼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병입니다.

하지만 우울증의 진단을 받지 않을 사람들도 때로 경미하게 또 때로 심각하게 이러한 증상을 겪습니다. 우리 안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즈 빠스칼(Blaise Pascal)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구멍'(God-shaped hole)이라고 부른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공간이 채워지지 않으면 문득 문득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죽은 것 같은 느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created beings)입니다. 우리의 창조자께서는 우리를 지으실 때 당신과의 관계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에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공간은 우리가 하나님과 지속적인 사귐을 나눌 때에만 채워집니다. 그곳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고, 외로움의 감정에 시달리며,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 같이 느껴지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런 느낌은 착각도 아니고 속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이 필요하다는 신호입니다. 우리 몸에 물이 필요하면 갈증이 생기듯, 하나님이 필요하기에 그런 느낌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 '그분을 위한 자리'가 채워져야만 비로소 사는 것처럼 살게 됩니다. 사는 맛을 느낍니다. 진실로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사는 것처럼 살게 됩니다. 우리의 본성을 감염시키고 있는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살게 됩니다. 쾌락을 위해 허비되는 인생은 환멸을 불러옵니다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쓰여지는 인생은 기쁨을 불러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올린 기도의 첫 부분을 읽었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 17:1-3)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야다'(yada)입니다. 이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4장 1절에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직역하면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를 아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가 됩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가 '야다'입니다. 히브리 사고에서 '아는 것'은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처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자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은 친밀한 관계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신비가들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영적 성교'(spiritual intercouse)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를 감안하여 17장 3절을 의역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5.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 내면에 있는 '그분의 자리'가 채워지면 우리는 진짜 사는 것처럼 살게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 갑니다. 물질 세계에 있는 우리 존재는 소멸하여 없어지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또한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될 때, 우리도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 논쟁을 걸어 왔을 때, 주님께서는 대답하시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마 22:32)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출 3:6).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전달하고자 하신 뜻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으며, 야곱의 하나님이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에게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요 11:25-26)

이 즈음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과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 다르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이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과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숨이 살아있는 것을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영생'이라는 말과 '생명'이라는 말을 동의어(synonym)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목숨'을 가리킬 때는 헬라어 '푸쉬케'(psyche)를 사용하고, '영생' 혹은 '생명'을 가리킬 때는 헬라어 '조에'(zoe)를 사용합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제가 장례식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잎이 하나 떨어지면 나무로서는 잎 하나를 잃은 것이지만 숲 전체로서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다.

하나님의 생명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 나라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 육신의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육신의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탈출구로 보일지 모릅니다. 죽음이 지옥같은 현실을 빠져 나가는 통로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의 현실이 때로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해 줍니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육신의 죽음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육신의 죽음은 아쉬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기가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대할 때, 가끔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이런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겠다!"


6.

그렇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진실로 믿는다면, '죽음의 쏘는 침'은 힘을 잃고 맙니다. 두려움도 사라지고, 아쉬움도 사라집니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경험하게 될 것에 대한 예고편 정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 사도의 저 유명한 고백을 자주 암송하며 묵상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 1:21)

실로 그는 믿음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과 사귀며 살았으며, 그로 인해 그의 내면에 있는 '그분의 자리'가 채워졌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허비되었던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삶이 이유였고 삶의 목표였으며 삶의 힘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았기에 그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이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지금 죽어도 하나님의 품에 안기리라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이 믿음, 이 고백까지 와야만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사도신경'을 따라 묵상한 모든 신앙 고백이 여기에서 완성됩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영생을 맛보고, 죽어 영생에 이르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몸으로 부활하는 영광에 참여해야만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이 고백이 우리에게 살아 있으려면, 오늘 그리고 매일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Greek Myth)에 티소누스(Tithonus)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트로이 왕과 물의 요정 스트리모(Strymo)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떤 여성이라도 한 눈에 반할만큼 잘 생겼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이 남성에게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가 한 눈에 반하여 사랑에 빠집니다. 에오스는 모든 신의 제왕인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티소누스를 위해 영생의 선물을 받아냅니다. 티소누스와 영원히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오스는 신이었기 때문에 영생할 뿐 아니라 늙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청춘의 싱그러움을 발산했습니다. 그런데 티소누스는 영생을 부여 받았지만 인간이었기 때문에 늙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영생하도록 늙어가는 것, 그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이었습니다. 그래서 티소누스는 나중에 영생을 가져가 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하지만 한 번 주어진 영생은 반납할 수 없었습니다. 티소누스를 불쌍히 여긴 에오스는 그를 귀뚜라미로 변신시켜 그 재앙으로부터 건져 주었다고 합니다. 귀뚜라미의 울음이 구슬프게 들리는 것은 그런 사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영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는 '영생'은 속이 텅 빈 생명이 한도 끝도 없이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永生, eternal life)은 무엇보다 먼저 '진생'(眞生, true life)입니다. '인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사는 것 같은 인생을 말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치고, 물질이 아니라 영혼을 위해 살며,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라 영적인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살아 있습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무슨 노래를 부르며 살고 있습니까? 무심코 부르고 있는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나, 쓸쓸한 가을 저녁, 빈 창고에서 홀로 우는 귀뚜라미처럼, 자신의 텅 빈 삶을 슬퍼하며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은 우리 내면에 있는 '그분의 자리'를 외면하고 놀고 즐기는 것에 마음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은 즐거워서 노래하고 있다지만, 듣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노래로 들리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얼굴에서 진짜 살아있는 빛이 발산되고 있습니까?

이제, '사도신경' 연속 설교를 마치며, 다시 한 번 여러분을 청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힘 입어 죄를 용서받고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십시오. 이미 그렇게 하셨다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더 깊어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아직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더 미루지 마시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영생을 누리며 영생에 이르는 길을 걸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내면에 있는 '그분의 자리'가 채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았으니 물질의 나라가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내 욕심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노래에는 신령한 기쁨과 환희가 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내일도 찬송하며 천국에까지 걸어 올라갈 것입니다. 이 성도의 행렬에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 주님,
저희를 구원하소서.
사망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무의미에서 의미로,
죄에서 의로,
목숨에서 생명으로,
오, 주님,
저희를 구원하소서.
저희의 울음을
구원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고,
저희의 애가를
기쁨의 찬가로 바꾸어 주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3년 6월 30일 주일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24)
"하나님 안에 살다"(We Live In God)
--영생을 믿습니다--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288장(통 204)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마태복음 16장 13-19절을 읽습니다. 이 말씀 안에 담긴 교회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10분)
4. 말씀의 요약 (한 사람이 말씀을 요약하여 발표합니다. 10분)
5.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나누어 주십시오.
2) '영생'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이 틀렸습니까?    
3)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은 '영생'을 살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대답하십니까?
4) '영생'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어떻게 달라야 합니까?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십시오.     
6. 기도
1) '영생'에 대한 바른 이해와 굳건한 믿음을 구하십시오.
2) '영생'을 믿는 사람다운 삶의 변화를 구하십시오.  
7.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8.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436장(통 493)
9.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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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2 시편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Where Is Justice?) 시52:1-9  김영봉 목사  2013-09-16 2537
9781 신명기 초심을 잃는 이유 (Why We Lose the Original Resolution) 신30:11-14  김영봉 목사  2013-09-16 3131
9780 빌립보서 거룩한 동행"(Holy Companionship) 빌1:20-21  김영봉 목사  2013-09-16 3161
» 요한복음 하나님 안에 살다"(We Live In God) 요17:1-3  김영봉 목사  2013-09-16 2655
9778 요한일서 용서가 구원이다"(Forgiveness Is Salvation) 요일1:5-10  김영봉 목사  2013-09-16 1912
9777 에배소서 홀로의 성인은 없다"(No Saint Is An Island) 엡4:11-16  김영봉 목사  2013-09-16 2232
9776 마태복음 어머니같은 교회"(Church Like My Mother) 마16:13-19  김영봉 목사  2013-09-16 2620
9775 요한복음 춤 추시는 하나님"(Our Dancing God) 요17:20-26  김영봉 목사  2013-09-16 2865
9774 사도행전 숨과 바람(Breath and Wind) 행16:6-15  김영봉 목사  2013-09-16 2160
9773 시편 창조주 앞에 서다" Stand Before the Creator 시33:1-9  김영봉 목사  2013-09-16 1998
9772 시편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다"(Find the Lost Father) 시30:4-11  김영봉 목사  2013-09-16 2283
9771 요한복음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보다"(Find God in Jesus) 요14:5-11  김영봉 목사  2013-09-16 1911
9770 고린도전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Our Toils Are Not In Vain) 고전15:50-58  김영봉 목사  2013-09-16 2543
9769 데살로전 그분 앞에 서기 위하여"(To Stand Before the Lord) 살전2:19-20  김영봉 목사  2013-09-16 2515
9768 시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 시128:1-10  이한규 목사  2013-09-16 2923
9767 시편 하나님을 경외하라 시34:9  한태완 목사  2013-09-16 4808
9766 시편 성소를 향해 손을 들라. 시134;1~3  이영화 목사  2013-09-15 2326
9765 이사야 창조주 하나님 사45:5-7  강종수 목사  2013-09-15 2056
9764 창세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에녹 창5:18-24  한태완 목사  2013-09-14 3714
9763 전도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삶 전12:1-12  이한규 목사  2013-09-14 2383
9762 잠언 하나님을 높이라 잠4:7-9  김삼환 목사  2013-09-14 2644
9761 마가복음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막11:19-25  이한규 목사  2013-09-12 2541
9760 히브리서 그리스도와 천사와의 비교 히1:4-14  민병석 목사  2013-09-12 1881
9759 히브리서 영광의 그리스도 히1:1-3  민병석 목사  2013-09-12 1736
9758 히브리서 만유의 후사이신 그리스도 히1:1-3  민병석 목사  2013-09-12 2447
9757 히브리서 선지자와 그리스도의 차이 히1:1-3  민병석 목사  2013-09-12 2342
9756 히브리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났나? 히1:1-3  민병석 목사  2013-09-12 1860
9755 히브리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히1:1-3  민병석 목사  2013-09-12 2043
9754 히브리서 히브리서의 중요성 히1:1-3  민병석 목사  2013-09-12 3265
9753 히브리서 마음을 강퍅케 말라 히3:7-13  민병석 목사  2013-09-12 2108
9752 히브리서 안식의 불합격자 히3:7-13  민병석 목사  2013-09-12 1763
9751 히브리서 모세와 그리스도의 비교 히3:2-6  민병석 목사  2013-09-12 2232
9750 히브리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민병석 목사  2013-09-12 2585
9749 히브리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이유 히2:11-18  민병석 목사  2013-09-12 1650
9748 히브리서 둘째 사람과의 신령한 연합 히2:11-18  민병석 목사  2013-09-12 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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