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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울타리를 다시 세우라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133 추천 수 0 2013.09.20 19: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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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31-32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무너진 울타리를 다시 세우라
2010년 1월 1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5:31-32

설교원고

"무너진 울타리를 다시 세우라."

2010년 1월 1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5:31-32

  산상수훈을 다루면서 유대교의 성서해석과 관련된 표현인 ‘토라에 울타리를 치라’라는 말을 자주 인용을 했습니다. 이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을 통해 울타리가 쳐지면 그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순종과 실천을 통해 말씀을 완성시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토라의 완성입니다.

  만일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이 바르게 되지 않으면 울타리가 잘못 쳐지게 되어서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결국 그릇된 신앙을 갖게 되거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건강하지 못한 신앙을 가질 수도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 은사지상주의, 율법주의, 기복신앙, 자유주의 신앙, 다원주의적 성경해석 등이 그것입니다.

  심지어는 잘못된 성서해석의 울타리로 인해 그 영혼이 파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단이 바로 그런 예지요.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 제칠 안식교, 몰몬교도 그런 예이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나 만민중앙집단도 그런 예입니다.

  신천지의 경우 요한계시록에 있는 14만 4천이 신천지 교인이라고 하면서 기성 교회에 침투해서 우선 담임목사의 신임을 얻고 그 후에 문제를 만들어서 장로를 통해 담임목사를 몰아내서 교회를 접수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의 성서해석이고 그 울타리에 있는 사람들이 기성교회를 접수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마귀짓을 합니다.

  이재록의 만민중앙집단의 경우 정말 황당한 거짓 성경해석을 해댑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는데, 이단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현대종교의 자료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1) 이재록 자신이 처음과 끝이며 심판의 권세자이고,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
  2) 자신이 하나님의 친아들이며 아브라함도 자신이 부르면 온다. 하나님도 자기가 부르면 온답니다.
  3) 자신은 원죄나 자범죄가 없어 어떠한 죄를 져도 죄가 안된다. 이 주장은 죄는 피에 있고 자신은 모든 피를 다 쏟았기 때문에 원죄와 자범죄가 없고 어떤 죄를 져도 죄가 안된다는 겁니다.
  4) 말씀이 하나님이며 자신이 말씀을 다 이루었으니 곧 자신이 하나님이다.
  5) 천국은 일천층, 이천층, 삼천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헌금의 정성이나 액수에 따라 층별 천국과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처소가 결정 된다고 주장한다.

  얼마 전에는 창세기 강해랍시고 하면서 하는 말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UFO를 타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UFO에 관한 자료가 있다는 겁니다. 곧 공개할 것이랍니다. 이재록이가 안수한 손수건을 가지고 기도만 해도 낫는다고 거짓말을 해댑니다.

  정말 황당하고 거짓된 성서해석인 것이 분명한데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빠져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미혹의 영입니다. 한번 미혹 당하면 뭐가 진리고 비진리인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재록이 쳐놓은 거짓 울타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 울타리 안에서 나름대로 순종한다고 살면서 마귀짓하고 결국 지옥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이들 이단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흔히 말하는 직통계시를 성경보다 더 우선시하면서 성경의 의미를 왜곡시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체 경전을 만들기도 합니다. 통일교의 원리강론, 몰몬교의 몰몬경이 그런 경우이고 신천지나 이재록  만민중앙집단도 이른바 직통계시를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계시를 주셨다, 자신은 성경 66권에 통달했다고 하면서 얼토당토않은 거짓 해석을 해답니다. 거짓된 성서해석을 통해 결국 거짓된 울타리를 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울타리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 울타리에 들어가는 자들을 통해 자신의 탐욕을 이루고 수많은 영혼들을 파멸로 이끕니다.

  토라의 울타리를 치는 것, 성경해석의 바른 울타리를 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혼탁한 오늘날 우리가 꼭 기억하고 붙잡아야 할 것은 올바른 성경해석입니다. 신령하다, 능력을 행한다, 예언을 한다 혹은 설득력 있다, 재미있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잘못된 성서해석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참 뜻을 바르게 해석하는 성경해석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말세에 구할 것은 영적 분별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말씀의 뜻과 해석을 잘 구별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분별력, 그 영적 실체를 구별할 줄 아는 영적 분별력을 늘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영적 분별력은 바른 말씀 해석과 연구를 통해 주어집니다. 치우치지 않고 바른 말씀 생활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결국 받아들이고 거해야 할 성경해석의 울타리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쳐주신 울타리입니다. 그 의미를 잘 깨닫고 그래서 그 성서해석의 울타리에서 순종하고 살아감으로써 토라의 완성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쳐주신 토라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지난주에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았는데, 예수님께서는 매우 단호하고 강경하게 간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성은 가정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부부가 성을 통해 한 몸이 되어 궁극적으로 전인격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인데, 이것을 깨는 것이 바로 간음이고 음란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간음금지에 대한 성경의 규정은 결혼의 신성함과 순결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음욕에 대해 오른 눈을 빼어버리고 오른손을 찍어버리는 것과 같은 단호하고 강경한 결심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어지는 이혼에 관한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3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대한 규정이 있는 신명기 24:1을 인용하십니다. 정확하게는 신명기 24:1-4 말씀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토라의 울타리를 치라’것이 유대교의 강조점인데, 당연히 이 말씀에 대해서도 유대교의 성서해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해석에 있어 문제가 된 것은 ‘그에게서 수치되는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결혼한 후에 아내에게서 수치되는 일을 발견하고 그래서 아내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것인데, 이 ‘수치되는 일’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히브리어 본문으로는 ערות דבר입니다. 이 ערות 은‘벌거벗음, 성적인 노출’을 의미하고, 신명기 24:1의  ערות דבר는 문자적으로는 ‘어떤 일의 벌거벗음, 어떤 일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그 뜻을‘어떤 꼴사나운 일, 상스러운 일, 점잖지 못한 일, 부도덕한 행동’ 등으로 봅니다. 이것을 우리 성경에서는 ‘수치되는 일, 수치스런 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ערות דבר, 수치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해석으로는 예수님 당시의 대립관계에 있던 두 학파인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의 해석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학파는 이 구절의 해석에 있어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 주장에 대한 내용이 미쉬나에 보면 나옵니다.

  샴마이 학파는 그의 아내가 부정을 저지른 것을 발견했을 때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신명기 24:1의‘수치되는 일’을 성적인 부정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반면 힐렐 학파는 아내가 음식을 하다 태우는 일도‘수치되는 일’로 볼 수 있고 그래서 그것으로도 이혼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샴마이 학파의 경우 수치스런 일에 강조를 두었다면, 힐렐 학파는 뒤에 나오는 ‘기뻐하지 아니하거든’이란 문구에 더 강조점을 둔 셈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랍비 아키바의 경우는 더 예쁜 여자가 나타나거든 그럴 때도 이혼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힐렐 학파 중에도 El'azar 같은 랍비는 ‘남자가 그의 첫 번째 아내와 이혼했을 때 제단이 눈물을 쏟는다’고 말함으로써 이혼에 대해 좀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한 경우도 있지만 비교적 이혼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봅시다. 32절인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표면상으로는 샴마이 학파의 주장에 동의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역시 음행한 것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샴마이 학파의 주장과 다른 그 이상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샴마이 학파의 경우 성적인 부정을 저지른 경우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혼에 이은 재혼을 간음이라고 보지 않았고, 남자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좀 더 일관성 있는 태도를 취하셨는데, 우선은 이혼의 사유는 음행 외에는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음행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헬라어 본문은 ‘포르네이아’입니다. 이 단어는 학자들 간의 약간의 이견은 있지만 보통 간음, 간통을 포함한 성적인 범죄를 뜻합니다. 어찌되었든 성적인 범죄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음행한 일이 없음에도 아내를 버렸다면, 즉 이혼했을 때는 그것은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내는 남편의 재산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이해였습니다. 그리고 이혼당한 여자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든지 아니면 몸을 파는 매춘밖에는 없었습니다.

  이 둘 다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결혼을 남녀의 합의로 보고 법적인 효력을 말하지만,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결혼과 동시에 남편은 아내에게,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영구적인 구속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혼해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을 때 법적으로는 새 남편에게 속해있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전남편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9:5-6 말씀입니다.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이 말씀 역시 오늘 본문과 마찬가지로 결혼과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결혼은 단순히 남자 여자가 만나서 같이 사는 차원이 아니라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결혼을 통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고 그래서 영원한 구속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성적인 범죄는 결혼의 신성함과 순결을 깨뜨리는 것이 되기에 간음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더불어 성적인 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아닌 한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아내를 버렸고 그래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재혼하게 했다는 것은 아내로 하여금 간음을 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이미 둘은 결혼을 통해 한 몸이 되었고 그 구속력은 이혼을 통해서 끊어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는 것은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만드는 죄라는 겁니다. 더불어 그렇게 해서 이혼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도 간음하는 죄에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이미 전남편과 한 몸이 되어 그 구속력이 전남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사회에서 이혼당한 여자가 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재혼 외에는 매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재산이 있다면 모를까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럴 경우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일부다처제를 반대하시면서 판결하셨다는 것이지요. 이는 단순히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결혼관계를 맺고 사는 일부다처에 대한 반대만이 아니라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그의 아내와 한 몸이 되었고 아내에게 매여 있기 때문에 다른 여자와 마음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이는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한 아내만을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유대인 학자 Philip Sigal에 따르면 당시 랍비들 중에는 그때까지도 일부일처제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일부다처제를 반대하는 판결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중에 상당수가 일부다처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일부일처에 대한 판결을 내리신 겁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에게 한 여자만을 허락하신다고 판결하시면서 그러므로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보호입니다. 당시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재산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이혼의 권리는 남편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혼에 대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 24:1을 많은 랍비들이 해석하면서 이것이 남편의 권리로 규정이 되고, 힐렐 학파의 경우는 성적인 범죄 외에도 남편이 기뻐하지 않거나 흠이 될 만한 일이 있으면 이혼할 수 있게끔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혼당한 여자의 경우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평생 버림받은 여자라는 오명을 쓰고 살게 되고, 부득이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매춘을 하거나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는 대개 후처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에서는 남편에게 자기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는 자의적인 권한이 있었고, 그로 인해 여성들이 큰 상처와 피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혼에 대한 성경 해석까지 그러하니까 이를 많은 남편들이 악용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간파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동일한 이혼문제를 다루고 있는 19:8 말씀입니다.

  19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습니다. 이혼에 대한 자기들의 해석과 비교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묻습니다. “사람이, 즉 남편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결혼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연합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나눌 수 없다, 아내를 버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묻습니다.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이에 대한 대답이 8-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예수님께서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라고 하셨는데, 이는 당시 많은 남편들 가운데 있는 악한 마음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즉 신명기 24:1-4을 통해서 이혼에 대한 규정을 내린 것은 본래의 뜻은 이혼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인데 너희들은 이를 멋대로 해석하고 악용해서 아내를 버리는 합당한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겁니다.  

  이혼에 대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 24:1을 그릇되게 해석함으로써 가득이나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버릴 수 있도록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한 당시 유대교의 해석에 대해 그것이 아니라고 판결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시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신 것입니다. 본래의 뜻을 말씀하심으로써 버림받아 성처 받고 고통을 받게 되는 여성들을 보호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지난주에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따르는 남자들이 이제는 여성들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여자를 성적인 유혹의 대상으로, 음욕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로서 섬기고 사랑해야할 대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한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는데, 이혼에 대한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재산으로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것처럼 남편의 살이요 뼈로서 남편의 일부라는 겁니다. 남편의 재산이 아니라 남편의 몸이라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라는 겁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겁니다. 그 존엄성에 있어 동등하다는 겁니다. 즉 남편들에게 아내와의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시는 겁니다.

  세 번째로는 궁극적인 가르침인데, 결혼의 신성함과 순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 19:5-6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남자가)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결혼은 법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 전인격적인 관계이고 영원한 구속력을 가지는 관계입니다. 서로 사랑해서, 좋아서 결혼하지만 결혼한 순간 그 관계는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고 영원한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할 때 ‘오늘 신랑 신부 두 사람이 신성한 결혼예식을 올린다’라는 말을 하는데 결혼이 신성한 이유는 결혼을 제정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혼의 신성함을 지켜나가는 방법이 바로 순결입니다. 오직 아내와만, 남편과만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러기에 위해서는 생각 역시 순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은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드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물론 오늘날 상황은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는 많이 다릅니다. 간음이나 간통 같은 성적인 범죄 외에도 기능장애적인 폭력이나 횡포가 많은 가정 가운데 있습니다. 상습적인 폭력, 알콜 중독, 마약 중독 등등 많은 기능장애적인 횡포가 많은 가정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음행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고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일방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사회는 아닙니다. 물론 아직도 이슬람이나 여러 나라에서는 일부다처제이거나 아내는 남편의 재산으로 남편의 자의적인 권한에 의해 여성의 인권이 짓밟히는 경우가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는 이혼하거나 재혼한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재혼한 가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혼자들에게 참다운 결혼생활의 기쁨을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붙잡아야 할 것은 결혼의 신성함과 순결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혼이 얼마나 쉽게 이루어집니까? 물론 당사자들은 쉬운 것 아니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눈에서 보면 너무 쉽게 이혼을 결정합니다. 날로 이혼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가정법원에 가면 이혼서류를 제출하기 서 있는 부부가 날마다 수십 명씩 있다는 겁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해서 같이 산다는 것은 많은 미혼자들에게는 환상으로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결혼연령이 30세라고 한다면 30년 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부부가 되어 같은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 자매간에도 성격차이가 있고 취향의 차이가 있어서 갈등이 일어나는데, 하물며 30년 동안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성격차이나 취향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등등이 없겠습니까?

  결혼하면 당장 치약 짜는 것부터 차이가 나고, 밥먹는 것부터 차이가 납니다. 나는 치약을 뒤에서부터 짜는데, 상대방은 중간부터 짭니다. 나는 아침에 밥을 먹어야 하는데 상대방은 빵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국이 있어야 먹는데 이 사람은 아무렇게나 먹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이제 부부가 되었으니까 밥 먹고 나서 편하게 트림을 하는데 이 사람은 그것을 무례라고 여기면서 불쾌케 합니다. 나는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상대방은 어딜 가자, 슈퍼에 가자고 합니다. 나는 스포츠를 보고 싶은데 이 사람은 죽어라 드라마만 봅니다. 내가 보기에는 별 문제 아닌데 이 사람은 그것 때문에 앓아눕고 말도 안합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은 것이 결혼 이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면서 결혼을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성격차이, 생각의 차이, 문화의 차이가 그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심한 경우에는 이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요즘의 이혼사유 중에 제일 큰 것이 바로 성격차이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격차이는 성경적인 이혼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격차이, 생각의 차이, 문화적인 차이가 쉬운 일이 아니고 때로는 싸움이 되고 상처가 되고 고통의 원인이 되지만 이혼사유가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눈에는 이혼사유가 안됩니다.

  에스겔 16:6-14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내가 너를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물로 네 피를 씻어 없애고 네게 기름을 바르고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목걸이를 목에 걸고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이 다윗 이전에는 가난안 족속의 땅이었는데 그 영적인 상태는 피범벅이 되어 버려진 아기와 같았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 피투성이,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핏덩어리였다는 겁니다.

  그런 예루살렘을 행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왤까요? 비록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물로 피를 씻어 없애고 기름을 바르고 수놓은 옷을 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머리에 왕관을 씌워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그래서 그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지게 하여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예루살렘을 향한 말씀이긴 하지만 오늘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피투성이 같은 상황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피투성이와 같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삶을 원망하고 포기하고 자살을 합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가정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되고 이혼을 하는 가정들이 늘어납니다. 말 그래도 피투성이입니다. 피투성이라... 다 이상 살 의미도 없고 의욕도 없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런 피투성이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지금은 피투성이이고 피를 철철 흘리는 피범벅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으라는 겁니다. 삶을 포기할 생각하지 말고, 죽을 생각하지 말고, 이혼할 생각하지 말고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피를 씻기시고 벌거벗은 몸을 수놓은 옷으로 입히시고 왕관을 씌우신다는 겁니다. 내 삶을 일으켜 주실 것이고 내 가정을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많은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혼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생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고통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일생 동안의 서약으로 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합니다. 피투성이라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렇게 살아보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정말 음행과 같이 결혼의 서약을 파기한 경우는 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피투성이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붙잡고 말입니다. 그럴 때 남편이 회복되고 아내가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한국에서 부교역자로 섬길 때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참 어려웠던 가정이었습니다. 두 분 다 착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술과 도박을 좋아하고 누가 뭐라고 하면 가진 것도 없는데 보증을 합니다. 술만 마셨다 하면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됩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술만 마셨다하면 아내를 때리고 자녀들을 때립니다. 도박에 빠져 빚을 지고 보증을 해서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큰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이 여자 분이 먼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무당한데도 가고 점쟁이한테도 갔다가 결국 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새벽마다 울면서 기도합니다. 매일 새벽마다 이분은 우는 것으로 시작해서 우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피투성이입니다.

  사실 이분에게 이혼을 권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구역 내에서도 이혼해도 괜찮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남편이 그러니 허구한 날 얼굴이 멍들어 고개도 못 들고 다니고, 빚을 갚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피투성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끝까지 피투성이로 살아남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교회 나오고 세례 받고 집사 직분도 받았습니다. 정말 술도 끊고 도박도 끊고 취직도 되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오니 자녀들도 얼마나 밝아졌는지 모릅니다. 무너진 가정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이 여집사님의 눈물이 통곡에서 감사의 눈물로 바뀌었습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남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기다린 딸에게 하나님께 에스겔 말씀 그대로 피를 씻기시고 옷을 입히시고 왕관을 씌워주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붙들고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는 자에게 회복과 영화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신성함과 순결을 지켜나가십시오. 그리고 결혼을 만들어 가십시오. 결혼건축가가 되십시오. 가정 건축가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 ‘돕는 배필’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부의 역할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돕는 배필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돕는 배필입니다. 부부의 문제는 상대방이 나를 위해 돕는 배필인데 왜 안 돕느냐는 겁니다. 아닙니다. 내가 상대방을 위해 돕는 배필입니다. 내가 먼저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결혼에도 십자가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결혼생활에도 예수님을 닮은 섬김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고, 낮아져 발을 씻기는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배우자를 용납하고 품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원리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부부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장의 원리가 적용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돕는 배필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부부관계가 재정립되고 결혼생활이 진행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격차, 계속 힘들까요? 취향의 차이, 계속 힘들까요? 문화의 차이, 생각의 차이, 계속 힘들까요? 이것이 없어지진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이건 없어지지 않아요.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노력하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돕는 배필이 되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돕는 배필이 되는 겁니다.

  하다가 너는 왜 안하냐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끝까지 사랑하고 섬기는 겁니다. 자기를 주장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 닮아가는 노력을 하면서 서로를 대합니다. 그럴 때 성격차이, 문화의 차이, 생각의 차이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고 이혼까지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권태기가 사라지게 됩니다. 권태기가 뭡니까?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장을 위해 부부가 함께 노력하면서 격려하고 십자가의 원리가 부부관계에 적용된다고 하면 권태기가 왜 생깁니까? 생겼다가도 사라지게 됩니다.

  지난 주 찬양 중에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이란 찬양이 있었는데, 이것이 부부관계에도 적용이 된다는 겁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귀한 주님이시고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인 것처럼 배우자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귀한 내 남편, 내 아내가 되는 것이고 돕는 배필이 되어서 섬기면 섬길수록 더 귀한 내 남편, 내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권태기가 찾아옵니까?

  이것이 바로 결혼건축가의 모습입니다. 결혼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의 원리는 결혼을 통해 육체적으로 한 몸이 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는 배필, 예수님을 닮아 서로 섬기고 사랑하면서 전인격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천국과 같은 행복과 평안과 안정감이 있고 쉼이 있고 위로가 있고 격려가 있고 사랑이 있는 그런 가정을 만들어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 즉 예수님이 나의 신랑이시고 나는 예수님의 신부라는 영적인 혼인관계의 거룩함과 기쁨과 축복을 맛보라는 겁니다. 결혼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만들어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뜨리고 무너뜨리는 음란과 간음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토록 단호하고 강경하신 것이고, 이혼에 대해서도 그러한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성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래서 성을 선물로 주시고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대로 실천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거룩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살아가시고 더불어 아름답고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회복되고 튼튼하게 세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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