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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3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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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복수는 나의 것?"
2010년 2월 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5:38-42
오늘도 계속해서 산상수훈을 보게 됩니다. 5:21부터 48절까지를 보면 6개의 주제로 단락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을 6개의 안티테제라고도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6개의 반제, 반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부르는가 하면, 6개의 주제들이 일정한 형식이 있는데, 먼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내용이나 당시 유대교의 성서해석을 언급하신 후에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하신 후에 새롭게 해석을 하십니다.
대부분이 구약성경 본문에 대한 당시 유대교의 해석이나 가르침, 혹은 당시 유대인들이 오용하거나 악용했던 말씀들에 대해 그것이 아니다, 본래의 의미는 이것이며, 이렇게 받아들이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고, 아울러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따라야 하고 도달해야할 수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반론형식이 있기 때문에 이 여섯 가지 주제를 6개의 안티테제, 6개의 반제, 반론이라고 부릅니다.
그 중에 오늘은 다섯 번째 반제에 해당되는 내용인데, 이 부분과 이어지는 여섯 번째 반제는 매우 유명한 내용입니다. 동시에 어려운 내용입니다. ‘복수를 하지 말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내용으로 매우 유명하지만 이것을 지키기는 그리 쉽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것이고 세상의 흐름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예수님의 정신이며 동시에 실제로 그렇게 사셨던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해서 이 말씀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반제들도 그렇지만 이 말씀 역시 그 배경을 잘 이해해야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3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언급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24, 레위기 24:20, 신명기 19:21 등에 있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1:23-25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주 유명한 문구입니다. 누군가 내게 상해를 입혔을 때 그와 동일한 상해를 줌으로서 복수를 하거나 보상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내 눈을 상하게 했으면 나 역시 그의 눈을 상하게 하고, 누가 내 이빨을 부러뜨렸으면 나 역시 그의 이빨을 부러뜨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lex talionis, 우리말로는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함무라비 법전에 나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복수법인데 성경에 나오는 것과 다른 것은 함무라비 법전에는 대상자의 사회적인 계급이나 신분에 따라 상해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식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그의 눈을 상하게 하지만, 사람이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중인)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은 1 마나를 지급하고, 만일 다른 사람의 종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그 반을 지급한다는 식으로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이 됩니다.
반면에 성경의 경우는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하라고(레위기 24:22) 말씀하고 있고,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종의 경우에 대해서도 사람이 종의 눈이나 이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보상으로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라(출 21:26-2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경우에는 함무라비 법전과는 달리 신분에 따른 차등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이 법이 무엇을 의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복을 장려하는 것일까요, 반대로 보복을 제한하는 것일까요?
보복을 제한하고 개인적인 복수를 금하는 법령입니다. 누군가 내 눈 하나를 상하게 했다, 누군가 나를 쳐서 이빨 하나가 부러졌다고 했을 때 사람의 본성은 무엇입니까? 똑같이 상대방의 눈 하나를 빼는 것일까요? 상대방의 이빨 하나를 부러뜨리는 것일까요? 아니요. 두 눈을 다 빼버리고, 최소한 이빨 두 개 이상은 부러뜨리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는 두 눈을 다 빼버리고 이빨을 여러 개 부러뜨려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이보다 더한 복수도 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본성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 오경에 복수를 제한하는 규정을 명하셨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규정의 본래의 의도는 내가 당한 그 이상의 보복을 하지 말 것이며, 그 보복도 정당한 재판을 통해 하라는 것입니다. 즉 개인적인 보복을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중에 이 말씀을 어떻게 오용을 했냐하면, 복수를 허락하는 것으로 여기고 내가 받은 대로 돌려주고 내가 당한대로 갚아준다는 복수의 의미를 오용을 했다는 것이지요. 본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당시에는 이것이 금전적인 배상으로 대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유대의 법에는 가해자의 눈이나 이를 빼내는 대신 금전적으로 배상하게 했습니다. 이 경우 역시 복수를 제한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욱 철저하게 복수를 제한하십니다.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예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셨는데, 이건 복수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의미를 하나씩 보면, 누군가가 나의 뺨을 후려칠 때 보통 어느 편 뺨을 맞게 됩니까? 왼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네 왼쪽 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상대방이 나의 오른편 뺨을 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그가 왼손잡이던가, 아니면 손등으로 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는 어느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요? 오른쪽 손등으로 오른편 뺨을 친 경우입니다.
혹시 이렇게 맞아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누군가의 뺨을 때린다, 때리는 사람은 화가 나서 그럴 수는 있겠으나 맞는 사람에게는 모욕감을 갖게 하는 것이 따귀입니다. 왜냐하면 얼굴은 그 사람의 전체를 대표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뺨을 때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욕감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손바닥도 아니고 손등으로 때렸다는 것인데, 이것은 고대근동의 문화에서는 심한 모욕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아예 사람으로도 대하지 않는다는 심한 모욕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모욕을 당했을 때를 말하는 것인데 그럴 때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네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손등으로 오른편 뺨을 때리는 것은 인격적으로 심한 모독인데, 자기에게 그렇게 행한 사람에게 왼쪽 뺨을 들이댐으로써 나를 사람으로 대하라는 저항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지요.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긴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내가 오른편 뺨을 맞는 인격적으로 심한 모욕을 당했을 때 나 역시 그의 뺨을 동일하게 때리는 것이 당시의 합법적인 관행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예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0절의 경우, 누군가 나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가난한 서민들의 경우 속안에 입는 옷과 겉에 두르는 옷 한 벌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외투를 훔치는 행위는 법적 소송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볼 때 채권자가 채무자를 법정에 고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채무자의 속옷을 가지려고 할 때 채무자가 겉옷까지 주어버리면 어떤 상황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채무자가 채권자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됩니다.
출애굽기 22:26-27에 있는 규정처럼 채권자는 가난한 채무자에게서 겉옷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겉옷은 외투가 될 뿐 아니라 밤에 덮고 잘 유일한 담요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채무자의 겉옷까지 가져갔다는 것은 그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했습니다. 그런 규정 때문에 채권자는 채무자의 겉옷이 아니라 속옷을 가지려 한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채무자가 자기 겉옷까지 주어버리면 오히려 재판에서 채무자가 승소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 역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설득력 있는 해석이지만 본래의 의미는 역시 단순합니다. 아무리 부당한 요구라도 들어주라는 겁니다.
41절의 경우는 두 단어가 해석의 열쇠가 됩니다. 첫째는 ‘억지로 가게 하거든’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앙가류에인’인데, 이것이 우리 성경에는 ‘억지로 가게 하거든’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원래 군대의 우편제도에서 강제동원을 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즉 군수품을 수송할 때 민간인들의 가축이나 수레, 선박 등을 군대에서 강제 동원할 때 사용되는 용어가 바로 ‘앙가류에인’이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오 리, 십 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리’로 되어 있어서 이것을 오리니까 2km, 십리는 4km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단위가 다릅니다. 예수님 당시에 거리를 재는 단위로는 ‘스타디온’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헬라식 단위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경우도 그의 책에서 거리를 기록할 때는 스타디온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타디온이 아닌 ‘밀리온’을 사용하셨습니다. 밀리온이란 단위는 로마식 단위입니다. 영어의 mile이 여기서 나온 것인데, 예수님께서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단위인 스타디온을 쓰지 않고 로마식 단위인 밀리온을 쓰신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사람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km를 쓰는 것도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위는 mile 아닙니까? 미국 사람이 미국 사람들에게 거리를 재는 단위를 이야기하다가 mile을 쓰지 않고 km를 썼다고 했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보십시오. 의아해하거나 혹은 그 말에 담긴 의도를 눈치 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예수님께서 당시 일반적으로 쓰였던 헬라식 단위인 스타디온을 쓰시지 않고 로마식 단위인 밀리온을 쓰셨을 때 사람들 역시 의아해하거나 그 말에 담긴 의도를 눈치 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다? 로마 군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당시 로마 치하에서 로마 군인들이 무분별하게 강제동원의 권리를 남용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가 로마 치하였고 동시에 헤롯 왕가가 다스릴 때였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지금도 전시에는 이런 강제동원이 허용이 되는데, 당시에는 로마 군인들과 헤롯의 군대가 이 권한을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장면 중에 하나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장면입니다. 유월절이기에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 구레네 출신 시몬이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주변에 있던 사람 중에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군인들에게 주어진 강제동원 권리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군인들이 이를 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군수품이 아닌 자기 짐을 옮기는데도 강제동원을 했고, 남용하는 사례가 많아 이것이 로마 군대와 헤롯 군대를 향한 큰 불만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군대가 너에게 짐을 지고 오리를 가라고 강제 동원을 하면 오리뿐만 아니라 그 두 배인 십리를 가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의미들을 보았는데, 이 말씀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의 상황을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이미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두 가지 반응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반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고 반대하고 박해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반응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더욱 더 강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오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초대교회를 반대하고 핍박하는 박해도 심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 배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당하게 되는 악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9절에 나오는 ‘악한 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좀 더 맞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천국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영접하여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축복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는 복음과 함께 왕성하게 부흥됩니다. 그런데 악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반대합니다. 그래서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나의 오른편 뺨을 때립니다. 심한 모욕을 당했습니다. 어떤 상황입니까?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똑같이 대하라는 겁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악을 악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너희는 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 때문에 너희가 그런 모욕을 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악에 맞서지 말라는 겁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미움과 모욕을 견디어 나갈 수 있고 악을 극복할 수 있고 불의를 용서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 줌으로써 너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보여주라는 겁니다. 실증하라는 겁니다.
이것을 그대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 나사렛 예수를 따랐고 그분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고 그들에게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악을 악으로 맞섰습니까? 똑같이 돌을 들고 대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대로 그 돌들을 받았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부르짖은 말은 하나였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용서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용서해주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을 나약하거나 비겁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내가 받은 대로 돌려주고, 아니 그 이상으로 갚아주는 것이 정당하고 용감하고 멋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제목처럼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용서해주는 것이 나약하고 비겁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떠한 선한 열매도 없습니다. 그저 복수로 끝날 뿐이고 또 다른 복수가 이어질 뿐입니다.
스데반이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또한 예수님의 삶을 따라 순교했을 때 엄청난 열매가 맺어지지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7:58에 보면 스데반이 순교당할 그 때에 사울이라 하는 청년이 거기 있었습니다. 사울, 후에 예수님을 만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입니다. 그 자리에 그가 있었습니다. 물론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하는 것을 마땅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강한 인상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도대체 나사렛 예수가 누구 길래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 돌로 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강한 충격이 그에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면서도 동일한 상황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 끝까지 감사하고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를 구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박해하면서 그의 머릿속에서 심한 혼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그가 예수님을 만났고, 그 결과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과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에서 예수님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했던 스데반을 통해 시작된 열매입니다.
용서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 더 다루겠지만,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는 필연적인 마찰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 때문에 내 오른편 뺨을 맞는 모욕을 당할 수도 있고 더한 모욕과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왜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전하는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것이 악을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악은 동일한 악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똑같은 보복을 한다고 악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강한 악이 동원됩니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고 선으로 대할 때 악의 힘은 약해집니다. 악이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악에 사로잡힌 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오는 길이 열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때문에 받는 모욕과 핍박이라면,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모욕과 핍박이라면 앞서 10-1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입니다. 복 있는 사람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공동체의 박해의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지만,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런 이유 없이 모욕을 당할 때 언제나 두 뺨을 들이대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역시 법적인 소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세는 보복이 아닙니다.
보복을 하는 이유는 그 마음 가운데 있는 분노 때문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생기는 분노를 제거해야 합니다. 악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이 내 안에 분노가 되면 안 됩니다. 분노는 앙갚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복수로 이어지게 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과 분노와 미움으로 인해 앙갚음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하시는 주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분의 가르침과 정신과 삶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를 경험한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해하고 그래서 앙갚음을 함으로서 악을 악으로 갚는다고 할 때 우리가 어떻게 되겠냐는 겁니다.
속은 시원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그럴까요? 적어도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그 사랑을 닮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속이 시원할까요? 아니요. 더 불편해지고 힘들어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안에 용서가 사라지게 되고 사랑이 메말라간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심각한 병이 든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바로 복수하지 말라는 겁니다.
힘들지만 용서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잘못된 것 바로 잡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법적 소송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는 미움과 분노, 그에 따른 앙갚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병듭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병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뜻으로 권면합니다. 내게 가해진 악이 내 안에 미움과 분노가 되어 그것이 정죄가 되고 앙갚음이 되지 않도록 늘 자신을 살피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할 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는 것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양보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눈앞에 있는 이익을 갖겠다고 악착같이 매달리지 말고 양보하면서 살라는 겁니다. 왜? 복음을 위해서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라는 말씀은 섬김의 삶, 봉사의 삶을 살라는 겁니다. 섬김은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억지로 오리를 갈 수도 있지만 자원해서 오리를 가고 그 사람이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더 갈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섬김입니다. 그것이 봉사입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사람에게 정말 십리를 동행해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섬김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원하는 섬김을 실천해보십시오. 이 역시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42절의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 역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15:7-8을 반영한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사람의 본성은 자기가 가진 것을 움켜쥐고 지키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산을 나만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나눔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나누어 줄 때 인색하게 하지 말고 넉넉히 주라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고 계십니다. 되받을 가망이 없는 자, 심지어 원수에게까지도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우리의 나눔의 대상을 제한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다른 사람들, 특별히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그들이 설령 내게 해를 가한 원수라도 나누어주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예수님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미움과 분노, 복수라는 악에서 보호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축복을 경험한 우리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마음껏 누릴 우리에게는 싸우고 보복하고 자기 것만을 챙기고 양보하길 싫어하고 인색하고 움켜쥐는 그건 삶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인내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용서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양보하고 섬기고 나누는 삶이 훨씬 더 어울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 닮아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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