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6:5-8 |
---|---|
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투명성이 기도의 방향을 좌우한다
2010년 3월 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6:5-8
지난주부터 산상수훈 중에서 6장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1-1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는데, 구제, 기도, 금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유대인들의 경건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을 이루는 종교적인 관행으로 오늘날에도 역시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실천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구제, 기도, 금식과 같은 경건생활을 비판하시거나 금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것은 우리 역시 구제, 기도, 금식과 같은 경건생활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이러한 경건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태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다고 해서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이렇게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외식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처럼 그런 잘못된 목적을 갖고 외식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많은 유대교 학파의 랍비들도 구제, 기도, 금식에 있어 올바른 마음가짐과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우리가 잘못된 목적과 태도를 가지고 외식적인 종교행위를 하는 일부 사람들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고, 동시에 구제와 기도와 금식과 같은 경건생활에 있어 무엇이 참된 정신이며 태도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저는 경건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투명성은 구제, 기도, 금식뿐만 아니라 모든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격, 삶, 신앙과 인간관계까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투명성입니다. 하나님 앞에 투명하라는 것이지요. 사람들 앞에 투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투명하라는 것입니다.
투명하지 못하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가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가려져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가려져 있으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투명하지 못하다고 했을 때,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무언가로 포장하여 가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의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나로 포장하고 그것이 자신인 것처럼 행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투명하지 않은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곧 위선이고 외식입니다. 이런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투명하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해 말씀을 보게 되는데, 기도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투명성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유대교 랍비들은 '카바나(כונה)'라는 개념으로 강조를 합니다. '카바나'라는 말은 우리말로 '의도,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단어로 '방향'을 뜻하는 단어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왜 기도하는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기도의 '카바나', 즉 기도의 의도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결국 유대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카바나'는 투명성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투명성이 카바나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투명하지 못하면 카바나, 그 의도와 목적이 바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방향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투명성이 카바나를 결정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삶,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요청되는 것은 투명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투명하라는 것입니다. 투명성이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저는 세 가지 요소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본질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이 말씀, 이 계명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참된 의미가 무엇이며 참된 정신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눈 구제의 경우도 구제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구제의 본질, 구제의 참된 의미와 정신은 이웃 사랑이며 구제를 통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제가 공의를 뜻하는 쩨데카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본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깨닫고 아는 것이 본질 중에 본질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어야 다른 본질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모르면 말씀의 본질 역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럴 때 본질보다 비본질에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본질을 놓치고 비본질에 집착하지 말라는 겁니다. 겉으로 보이는 형식이나 전통, 혹은 후대에 만들어진 해석에 얽매여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거나 자신들의 욕심에 따라 본질을 왜곡시켜 버린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본질을 놓치지 마십시오. 무엇이 신앙의 본질인지, 삶의 본질인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본질인지를 놓치지 마십시오.
기도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본질입니다. 무엇이 기도의 본질이냐는 것이지요. 기도는 무엇입니까? 유대교에서는 '기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다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성으로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 직관으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계시된 성경 말씀으로도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고, 예배와 같은 의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기릴 수 있지만,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영혼의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기도가 무엇인가 할 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라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입니다. 기도의 본질이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는 이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다리이며 하나님과 영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대화이다'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기도는 결코 하나님을 조정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한다, 이 말은 '의미 없는 어구를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교도들이 중얼중얼하는 주문과 같이 계속해서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당시 주변의 이교도들은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더 효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의 목적은 자신들의 소원대로 신을 조정하거나 신의 진노를 달래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의 마술적 수단이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보면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기도의 영향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황당이나 불상 앞에서 비는 기도와 비슷한 기도를 많이 합니다. 우리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극 정성을 다해 빌면 하늘이 감동해서 그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것이지요.
그 지극 정성이 무엇이냐? 몇날 며칠을 계속해서 비는 겁니다. 같은 말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비는 겁니다. 불상 앞에서 일천 배를 하는 겁니다. 주문과 같은 기도로 신을 달래는 경우는 대표적인 것이 무당들의 굿이나 점쟁이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영향이 교회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생각으로 마치 성황당에서 지극 정성껏 빌고 불상 앞에서 일천 배를 하듯이 하는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를 통해 나의 간구대로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입니다.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기도들이 정성스럽고 뜨거울지는 몰라도 그것은 기도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조정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사실 기도의 길이와 반복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 이 말씀을 가지고 기도를 짧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역시 날마다 기도하셨고 오랜 시간 기도하셨고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의 경우는 같은 내용으로 세 번 반복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길게 기도할 수도 있고 짧게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몇 번이고 같은 내용으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기도를 우리의 간구대로 하나님을 조정하는 하나의 마술적 수단으로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책망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리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이지 나의 욕심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는 겁니다.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해 정성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는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주문이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부모에게서 무엇을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고 했을 때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대화입니다. 기도를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길 원하시고 기도를 통해 나를 깊이 만나시고 그래서 나를 치유하고 새롭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처럼 중언부언하지 않습니다. 내 욕심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처럼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나의 문제와 삶에 이루어지길 구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란 하나님의 목소리를 귀로 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내 모든 것 다 아뢸 수 있습니다. 또한 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기도 중에 나의 기도 제목이 달라지게 되고 기도 가운데 감동을 주시고 깨달음을 주시고 그래서 점점 더 하나님을 뜻을 잘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예민함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다리이고 영적 대화입니다.
누가 정말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하느냐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기도는 하는데 순종이 없다? 기도는 하는데 용서가 없다? 기도는 하는데 사랑과 섬김의 모습은 나아지지 않는다? 기도는 하는데 인격과 삶의 변화는 없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제대로 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이고 대화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것을 원하시더라, 그렇다면 순종해야죠. 그렇다면 용서해야죠. 그렇다면 사랑하고 섬겨야죠. 그래서 인격과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기도의 사람에게서는 예수님 닮은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 닮은 순종이 보이고 용서가 보이고 사랑이 보이고 겸손이 보이고 섬김이 보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투명성의 두 번째 요소는 정직입니다.
왜 투명하지 못하는가? 정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꾸미고 포장하는데 익숙합니다. 정직보다는 거짓에 익숙합니다. 거짓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직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인의 특징 중에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을 피하는 것입니다. 멀리 하는 것입니다. 숨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아예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는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겉으로 맴도는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중언부언의 기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직한 기도를 원하시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고 했는데 상한 심령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정직입니다. 죄를 지어 상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아 상했습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부딪히고 깨어져서 상했습니다. 그 상한 마음을 숨 없이 다 쏟아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이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 막았습니다. 이 죄를 어찌해야 합니까?"
그렇게 정직하게 마음을 쏟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 제가 누구에게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찔렸습니다. 너무 아픕니다. 분합니다. 화가 납니다. 그 사람 이해하고 품고 싶고 용서하고 싶은데 힘듭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렇게 정직하게 상한 감정을 쏟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십시오. 상한 심령 그대로 나아가십시오. 미사여구를 찾으시는 것 아닙니다. 정직함으로 나아가십시오.
사람들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선이 무엇입니까? 정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 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하던 기도를 하던 금식을 하던 순수한 목적이 아닌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하기에 위선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되고 맙니다.
앞서 기도의 본질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기에 기도의 자세는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자세에 대한 유대교 랍비들의 말이 있습니다.
"네가 기도할 때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알라.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마음을 하늘을 향해 두어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눈은 아래로, 마음은 위를 향해 두어야 한다. 기도 시에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이다. 거룩하신 분, 찬양받으실 그분은 마음을 요구하신다."
정직한 자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자세는 성경을 통해 이미 말씀하신 것이고, 예수님 역시 이러한 기도의 자세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내 영혼을 하나님께 향하는 것인데 외식하는 자들은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5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것이라는 책망입니다. 기도의 카바나, 기도의 의도와 목적이 투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했습니다. 최소한 아침기도와 오후기도가 있었습니다. 시편 119:164에는 하루에 일곱 번 기도했다고 되어 있고 다니엘의 경우 세 번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을 정해 기도를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좋은 전통이고 습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카바나, 기도하는 의도,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것일 때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경건한 사람임을 증명하고 그럼으로써 칭찬받고 공동체에서의 지위도 올라가려는 의도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적인 전통이나 관습을 악용하는 예는 마태복음 23:5에도 나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여기서 말하는 경문과 옷술이 무엇이냐 하면 트필린과 탈릿에 달린 찌찟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이나 텔아비브 지역의 브네이 바락 등에 가면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머리와 왼쪽 손목에 트필린을 두르고 그 위에 탈릿을 쓰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트필린 안에는 신명기 6:4-9, 13-21, 출애굽기 13:1-10, 11-16이 기록된 작은 양피지 조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경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탈릿은 기도할 때 어깨나 머리에 두르는 일종의 쇼울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 탈릿의 네 귀퉁이에는 매듭지어진 술이 달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찌찟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3:5에서의 옷술이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머리와 왼팔에 트필린을 두르고 탈릿으로 몸을 감싸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낯선 모습입니까? 예수님 역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기도하시거나 예배드리실 때 트필린과 탈릿을 두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트필린과 탈릿을 착용하는 이유는 기도하거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된 자신을 감추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하기 위한 상징적인 도구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카바나입니다. 트필린과 탈릿의 본래의 카바나, 본래의 의도와 목적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향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의도와 목적으로 악용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 사람들에게 자기를 과시하거나 칭찬받기 위한 목적으로 악용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트필린의 가죽 상자를 넓게 만들고, 탈릿 역시 크게 만들거나 옷술을 길게 만들어 마치 그것이 자신의 신앙의 정도나 공동체에서의 위치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를 살려 마태복음 23:5을 다시 읽으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목적으로 경문, 즉 계명의 말씀들을 담은 가죽상자인 트필린을 넓게 만들고, 기도할 때 두르는 탈릿을 크게 하거나 거기에 달린 옷술을 길게 만들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된 카바나, 기도의 의도와 목적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입니다. 정직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상한 심령과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 그대로를 쏟아놓는 진실한 기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기도, 정직한 기도입니다.
유대교에서 이런 기도의 예로 뽑는 것이 바로 한나의 기도입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괴로워서', 이 말은 마음이 괴로워서 기도했다는 말도 되지만 그 괴로운 마음 그대로 다 하나님께 쏟았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 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한나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했던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크게 부르짖는 기도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나가 기도한 곳은 성막이 있었던 실로입니다. 한나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도했던 곳입니다. 그러한 곳에서 한나는 오직 하나님께 집중했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입술의 기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다른 카바나, 다른 의도와 목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거나 다른 의도와 목적을 가질 때는 결코 정직한 기도,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고 집중할 수 있고 마음을 모두 쏟아 놓는 진실한 기도, 정직한 기도, 상한 심령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투명성의 세 번째 요소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데서 시작하고, 더불어 겸손은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고, 자신이 피조물이며 유한한 존재이고 무능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고, 그러기에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이러한 겸손은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 애가 3:22-23 말씀인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의 고백이고 기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능하고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임을 깨닫는 이러한 자각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겸손이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관계에 있어서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전에는 나는 의인이요 너는 죄인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나도 죄인이요 너도 죄인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고 너도 그러합니다. 나의 조금 나은 모습으로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너는 내가 섬기고 사랑할 대상일 뿐입니다.
결국 겸손은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가 됩니다.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리 역할이 됩니다. 자기 잘난 멋에 산다고 하지만 자기 잘난 것만 주장하고 그 잘남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에게는 관계는 없습니다. 주변에 사람은 있을지 모르나 관계는 없습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입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한 자의 기도는 골방의 기도가 됩니다. 6절에서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서 골방은 문자 그대로 골방, 즉 밀실일 수도 있지만,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러한 개인적인 용도로만 쓸 수 있는 골방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고고학에서 보통 4 Room, 4방 구조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반 서민들은 방 4개의 단조로운 집에서 살았기에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밀실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골방은 기도의 은밀성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정직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도는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향해야 합니다. 특히 개인적인 기도는 그러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향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골방의 의미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향하여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과 연약함을 진실되게 고백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자비를 구합니다. 겸손한 자의 기도입니다. 겸손한 자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더 갈망합니다. 그래서 밖의 모든 문은 잠그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만 문을 엽니다.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은밀하고 깊은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골방의 의미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홀로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십시오. 문자 그대로의 골방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오직 하나님만 찾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진정한 의미에서의 골방입니다. 아무리 홀로 있어도 골방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만 향하여 나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응답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써 기도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시간도 늘리시고 기도의 내용도 깊어지고 풍성해지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꼭 기억하십시오. 무엇이 기도의 본질인지, 무엇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상한 심령의 기도, 정직한 기도인지, 무엇이 나를 골방으로 이끄는 겸손한 기도인지를 기억하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또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만들고 그 투명성이 여러분들의 기도를 더욱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