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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 아바 아버지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3171 추천 수 0 2013.09.20 19: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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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9-15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 아바 아버지
2010년 3월 13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6:9-15

  어느 사업가가 해외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추락 직전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위성전화가 있어서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서 지금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보험사 직원이 잠시 말이 없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기도문을 반복하라. 다시 말한다. 주기도문을 반복하라.”

  오늘부터 주기도문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게 되는데 주기도문은 어떤 것일까요? 이 이야기처럼 위급할 때 외우는 일종의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여러 번 반복해서 외우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그런 종류의 기도일까요?

  주기도문 앞에 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주기도문 역시 중언부언이 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은 의미 없는 말의 반복이나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는 말의 반복이고 여기에는 주문도 포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역시 자칫하면 중언부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중언부언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 기도를 빼면 무엇이 됩니까? 주문이 됩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이지 주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경우 주기도문이 기도가 아니라 주문처럼 반복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의 주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서 마음에 담지 않고 그저 외어서 중얼거리는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주기도문이 무슨 회의나 예배나 모임을 마치기 위한 절차가 되어버렸습니다.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무리하기 위한 절차가 아닙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에서는 주기도문은 예배의 공적인 기도문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을 예배 중간에 전체가 공적인 기도로 드리고 이어서 개인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 하는 것처럼 별 의미 없이 외워서 하는 주문이나 모임을 마치기 위해 아무 의미 없이 성급히 외워서 하는 절차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지난주에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투명성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투명성이 기도의 카바나, 즉 기도의 방향을 좌우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투명성은 본질, 정직성, 겸손이라고 했는데, 이 투명성을 기도에 적용을 하면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기도에 있어 정직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겸손이 골방의 기도를 이끌어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먼저 기도의 투명성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조차도 외식하는 기도,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될 수 있고, 그러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주의하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직관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예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기릴 수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제대로 못하면 우리의 몸은 심각한 장애를 일으킵니다. 호흡곤란, 호흡장애는 결국 몸을 마비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아예 호흡이 멈출 경우 죽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라고 했을 때는, 우리의 영혼에 있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기도는 단순히 교회 다니기 때문에 해야 하는 하나의 종교적인 의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내 영혼이 살기 위함입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기도하지 않는다고 내 몸이 죽지 않습니다. 어떤 장애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은 호흡장애, 호흡곤란으로 인해 무기력해지고 서서히 무뎌집니다. 영적 감각이 무뎌지게 됩니다. 영적 시각 역시 어두워집니다. 영적인 귀도 어두워져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역시 중지되어버립니다.

  그 결과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죄와 세상의 유혹과 사탄의 공격에 대해 무기력해져서 어떠한 영적인 파워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된다는 겁니다. 마치 암이 눈에 보이지 않고 당장 그 증상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서서히 세포들을 삼키고 무기력 시키고 마침내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기도하십시오. 영혼의 호흡이 멈추지 않도록 하십시오. 호흡을 하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에 따라 하십시오. 잘못된 호흡 역시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바르게 영혼의 호흡을 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영혼은 더욱 더 강건해지고 투명해져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고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바르게 호흡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호흡에 대해서는 그 앞에서 말씀하셨고 오늘 말씀은 영혼의 바른 호흡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다라는 말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인데, 산상수훈의 구조로 봐도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5장부터 7장까지입니다. 산상수훈의 구조를 나눌 때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기도입니다.

  또한 6:1-18이 산상수훈의 구조에서 중심에 있는데, 여기서 주님께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라는 세 가지 종교행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중심에도 역시 기도가 있습니다. 산상수훈 전체 구조에서도 기도가 중심에 있고 세 가지 종교적인 행위에서도 중심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마태의 의도적인 구성으로 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가 산상수훈을 기록하면서 강조를 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이기도 한 마태는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의 핵심을 기도로 이해를 했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구성에 있어서도 기도를 그 중심에 배치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해석은 상당한 일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산상수훈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중심에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도가 없이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나라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성신학자로 유명한 유진 피터슨은 기도를 심장으로 정의를 내립니다. ‘기도는 모든 말과 행동에 피를 공급해주는 심장이다’라는 것입니다. 심장이 우리 몸에서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아무리 근육이 잘 발달한 몸짱이어도 심장이 제 역할을 못하면 아무 쓸데없습니다. 그저 잘 키워서 멋지지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심장이 살아서 펄떡이면서 내 몸 구석구석에 피를 공급해주어야만 우리의 몸은 제대로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 명문 축구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 선수를 심장이 둘인 선수라고 극찬하는데, 그런 의미입니다.

  기도가 바로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내 믿음이 성장하고 싶다, 기도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다, 기도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 기도하라는 겁니다. 영적으로 깨어있고 영적 분별력을 갖고 싶다, 기도하라는 겁니다. 죄와 유혹에 대해 이기고 싶다, 기도하라는 겁니다.

  내 믿음의 영역이 더 커지고 영적 거장이 되고 싶다, 기도하라는 겁니다. 순종의 능력을 얻고 싶고 거룩의 능력을 얻고 싶다, 기도하라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을 얻고 싶다, 기도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고 싶다, 기도하라는 겁니다. 기도를 통해 내 영혼과 삶 가운데 피를 공급하라는 겁니다. 기도를 통해 내 심장이 펄떡이게 하라는 겁니다.

  특별히 산상수훈의 경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가져야 할 가치관과 살아가야 할 삶이 담겨져 있는데, 너무나도 기가 막힌 말씀이고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이지만 정작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이 말씀의 의미를 배우고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래서 무릎을 치며 감탄을 하고 탄성을 지른다 할지라도 정작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굳어져 버린 사변에 불과하고 그저 기록된 글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기도를 통해 내 영혼과 내 인격과 내 이성과 내 삶에 영적인 피를 공급해야지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귀한 삶,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 가슴 벅찬 삶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 바르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잘 순종할 수 있는 동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도리라는 겁니다. 이 기도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삶의 힘을 얻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가장 중심에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산상수훈의 중심에 있는 이유입니다. 기도는 산상수훈의 핵심입니다. 그중에서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기도문은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며, 그래서 이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 우리의 영적 심장을 펄떡이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기도를 하면서 힘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상수훈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의미를 잘 깨달아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의 영적 심장은 더욱 더 힘차게 펄떡일 것이고, 그 기도를 통해 영적인 피를 공급받아 우리가 실제적인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고 살아가는 열매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 주기도문의 구체적인 의미를 나눌 것인데, 이 시간들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 안에서 분명해지고, 그래서 우리의 영적 심장이 힘을 얻어 더욱 더 활기 있게 펄떡펄떡 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먼저 주기도문의 개론적인 부분들을 다루겠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갖고 있는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유대적 성격입니다. 즉 이 말은 주님의 기도에는 당시 유대교의 기도의 내용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기도 내용들과 비슷한 기도문들이 다른 유대교 문헌에도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드렸던 기도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다른 새로운 종교를 만드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와 다른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오시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경우 그들은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관습에 따라 예배와 절기를 지켰고 그들이 보았던 성경도 당시 유대인들이 보았던 성경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구약성경이었습니다. 이때는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이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던 말씀들을 통해 구약성경을 이해했다는 것이지요. 특히 산상수훈을 중요시했는데, 산상수훈은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복음서의 원형으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역시 갑자기 만들어진 새로운 기도가 아니라 그동안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해오던 기도의 내용을 반영해서 가르쳐주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해오던 기도는 모두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표적인 기도서가 바로 시편입니다. 시편은 그 자체가 기도서입니다.

  이러한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도문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카디쉬’라는 기도문과 ‘쉬모네 에스레’라고 부르는 18개의 축복기도문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기도 구절과 비교를 하면 비슷한 내용이 유대교 기도문이나 문헌에도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당시 유대교의 기도들을 요약하시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강조점을 두셨습니다. 내용 자체만 비교하면 당시 유대교 기도들과 비슷하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들을 보면 훨씬 더 깊고 독창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이번 주부터 하나하나 살펴보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에 대해서 실제로 유대교 랍비 중에 한명은 이런 평을 내렸습니다.

‘예수가 한 사람의 카리스마적인 유대인 교사로 남았었다면 이 기도는 당연히 회당의식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단순히 당시 유대교의 기도문들과 비슷한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기도문의 내용의 핵심을 단순 명료하게 요약을 했고, 그 기도의 우선순위와 내용에 있어서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유대교 학자 Philip Sigal처럼 예수님은 아주 카리스마가 있는 탁월한 할라카 선생, 랍비였다는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가 유대교 회당에서 드려질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정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아주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당시 유대교의 대표적인 기도문들과 비교를 해보면 무엇이 비슷하며 무엇이 다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데 유대교의 대표적인 기도문 두 개가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카디쉬’라는 기도문과 ‘쉬모네 에스레’라고 부르는 18개의 축복기도문입니다. 오늘은 ‘카디쉬’ 기도문과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카디쉬는 sanctification, 즉 성화를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카디쉬 기도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그분이 그분의 뜻에 따라 지으신 세상 안에서.”

  주기도문의 전반부를 보면 이 카디쉬 기도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카디쉬 기도문에 비해 주기도문이 훨씬 간결하고 요점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점은 카디쉬 기도문에서는 하나님이 3인칭인 ‘그분’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반해 주기도문에서는 2인칭인 ‘당신’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카디쉬 기도에서는 하나님은 3인칭으로 ‘그분’입니다. ‘그분의 이름’이고 ‘그분의 뜻’이고 ‘그분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서는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2인칭 소유격인 ‘당신의’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수’(σου)라는 단어이고 히브리어로는 ‘쉘카’(שלך)입니다.  

  우리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2인칭 소유격을 살려 읽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3인칭과 2인칭은 친근감의 정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을 그저 3인칭을 써서 '그분'이라고 하는 것과 2인칭으로 '당신'이라고 하는 것은 친근감에 있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께 아주 친근하게 직접 아뢰는 것이라는 점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친근함은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나님께 대한 호칭에서 더욱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무엇입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주기도문이 '하늘에 계신'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첫단어가 '하늘'이지만, 헬라어 원어로는 '파테르'(πατερ)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아버지'라는 뜻인데, 이것을 보다 정확하게 하면 '아빠'라고 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비록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언어는 아람어입니다. 아람어에 '아바'(אבא)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말에 '아버지, 아빠'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썼던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빠'라는 뜻에 더욱 가깝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아버지는 '아브'(אב)라고 하는데, 이 경우는 보통 '아비'(אבי)라는 말을 써서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일반적이었고, 실제로 아버지를 부를 때는 아람어인 '아바'(אבא)를 썼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실제로 아버지를 부를 때는 '아바'(אב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아버지를 부르는 아주 친근한 호칭이 바로 '아바'(אבא)입니다.

  누가복음 11:2에 보면 같은 내용의 기도가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지만, 누가복음의 경우는 '아버지여'로 시작합니다. 즉 '아바'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학자들의 경우 원래는 단순히 '아바'였는데 마태복음의 경우 이것이 교회 예배에서 공적 기도로 사용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라는 말이 첨가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바'라는 말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지 않습니다. 유대 랍비 문서들을 보면 대여섯 군데에서 하나님을 아버지 또는 '아바'라고 부른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 자체가 다릅니다.

  독일 신학자인 요아킴 예레미야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어린아이의 언어인 '아바'라는 말로 친근하게 부른 예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개인적으로 부른 예는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정설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와 선조들의 아버지', 즉 히브리어로 אבינו אבותינו라고 부른 예는 있지만 어린아이의 언어인 '아바'라는 말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부른 예는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아바'로 쓰신 것은 예수님만의 독특한 어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바로 이 '아바'라는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부를 때 '아바'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관계에 있어서는 매우 친밀하셨음을 보여주는 말이 바로 아바입니다. 요한복음 14:10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또한 요한복음 10:30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두 분이 하나이신 친밀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한 친밀함을 표현하는 말이 바로 '아바'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 하나님을 늘 '아바'라고 부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게 하시는 이 일이라는 겁니다. 죄인이고 피조물인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아바'라고 부르게 하시는 이 일이 곧 예수님의 사역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제일 먼저 가르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은 너희와 뚝 떨어져 있는 신이 아니라 너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아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즉 '아바'라는 이 호칭에는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사역을 하셨는가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라고 했을 때 그 답이 주기도문 첫 구절인 '아바'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피조물이, 어떻게 죄인이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이 사실만 깨달아도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만일 아무 의미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건 중언부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호칭에 담겨 있는 의미를 잘 기억하고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아바'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아바 아버지'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님'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님'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역시 동방예의지국답게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나 아빠라고 부르겠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있는데, 이렇게 부르는 것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예의를 차리려면 아예 '하나님 아바마마'라고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빠'라고 하시는 분 계신지요? 예전에 신학대학원 다닐 때 그렇게 기도하는 전도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기도할 때 늘 그렇게 불렀어요. '하나님 아빠' 처음에는 참 어색하더군요.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었어요.

  저 같은 경우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건 어렸을 때였고 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5학년 이후부터는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그러니 더 어색했죠.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 아빠'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전 그 후부터는 '아바'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냥 '아바, 아바'를 반복할 때도 있고 '아바 아버지'라고 할 때도 있는데 훨씬 더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래도 이스라엘에서 살다보니까 '아바'라는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더 친근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물론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호칭에 담겨져 있는 의미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바라는 말에 담겨있는 친근감을 기억하고 느끼면서 하나님을 불러보십시오. 달라집니다.

  정말 힘들고 지쳤을 때, 혹은 죄책감이 짓누를 때 그냥 '아바'하고 불러보세요. '아버지'라고 불러보세요. 의미 없는 호칭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그 느낌, 그 친밀감으로 불러보십시오. 그 이후에 아무 말 안 해도 하나님이 느껴질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부를 때 눈물이 쏟아지고 솔직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는 이 호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 아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데까지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바로 아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어떤 사상이나 종교적인 관념이나 마술적인 힘으로 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비인격화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어떤 사상도 아니고 종교적인 관념의 결과도 아니고 그저 내 욕심을 들어주는 마술적인 힘이 아닙니다.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러한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더 이상 하나의 방법이나 수단으로 인식하지 말고 혹은 종교적인 명상이나 미신적인 접신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비인격화하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입니다.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를 때 이 사실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기도를 통해 인격적이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Old Testament, New Testament가 그 의미 아닙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딸이라는 언약의 관계 속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은 항상 상호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주시고 우리는 그 아버지에게 사랑과 순종을 하는 것이 바로 언약관계입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분의 사랑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담은 호칭이 바로 '아바'입니다.

  내 경우에도 나의 아이들이 나에게 '아빠'라고 할 때는 아이들이 불만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빠인 나의 사랑을 확신하고 아빠인 나를 의지하고 나에게 순종하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아빠라는 호칭에 담겨 있는 마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이 호칭은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며 따라가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아바라는 이 말에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부자간의 언약의 관계, 부녀간의 언약의 관계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에는 전제되어 있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상호간에 아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1:2-3에 보면 하나님의 탄식이 나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귀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기본 전제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그에게 의지하고 순종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인데 이스라엘이 그렇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내용입니다. 소나 나귀도 그 주인을 알고 순종하듯이 당연히 나의 백성 이스라엘 곧 나의 아들들은 나를 알고 나를 인정하고 나를 의지하고 순종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릿속으로 아는 추상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지식을 말합니다. 즉 내가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신실하게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오는 지식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앎의 관계를 이루어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역시 나를 아십니다. 나에게 대해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필요를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필요한 것도 아십니다. 그러기에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그런 것들만 구하는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바로 '아바'라는 호칭에 담겨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나를 속속들이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와 뜻과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이고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어지는 주기도문의 내용입니다.  

  또한 이 관계는 우리가 상속자임을 뜻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는 것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뜻이며, 그분의 모든 부요함을 내가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속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요를 내가 끌어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부요함을 끌어 쓰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그 하나님의 부요함을 끌어 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를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라 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요함이십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거룩하심과 능력과 부요함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부요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요함을 풍성하게 맛보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만물의 상속자가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부요함을 누리는 복된 자녀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앞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부자간, 부녀간의 언약관계라고 했습니다. 상호적인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무엇이 더 절대적일까요? 아버지의 사랑일까요 자녀의 사랑일까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이 일방적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파기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까지 아들을 인정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해 끝까지 아비 노릇을 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아들딸은 아버지에게 의롭지 못하고 신실하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자녀들에게 용서하는 자비를 보입니다. 이 용서의 자비가 아들에게 회개를 일으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용서의 자비가 더 우선적이고 절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에게 용서의 자비를 베푸시기에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용서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믿음 없음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의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합시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결코 내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나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고 한 눈 팔지 모르지만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바라보시고 나를 기억하십니다. 나는 지금의 어려운 현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평하고 염려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며 부르는 호칭이 바로 아바 아버지입니다. 그러기에 주기도문의 첫 단어인 '아바 아버지'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신뢰가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간구들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언약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부요함을 누리는 상속자로서, 또한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용서의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인정하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사랑하는 자녀로서 '아바 아버지'를 부르고, 그러기에 깊은 신뢰와 사랑을 담아 간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단어 '아바 아버지'에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를 잘 기억하시고 날마다 기도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를 부르는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과 더욱 더 친밀한 관계를 키워나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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