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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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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2: 우리 아바 아버지
2010년 3월 20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6:9-15
‘먼 나라 이웃 나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원복 교수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집필한 책인데, 세계 각 나라의 문화에 대해 통찰력 있게 소개하고 있는 책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 편이 나왔는데, 거기에서 이원복 교수는 한국인의 특성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정통성 고집, 평등사상, 연고주의, 이 세 가지가 한국인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요약을 하면, 우리나라는 반도에 위치해서 대륙과 섬인 일본으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아왔는데, 그런 역사 속에서 생겨난 민족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성을 대표할 수 있는 단어가 ‘충’(忠)이라는 것입니다. 충은 사사로운 이해득실을 떠나 공동의 가치관을 중히 여기는 마음이고, 동시에 공정하게 고르게 나누는 정신이라는 겁니다.
대륙과 섬 사이에 있는 반도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인 특성 때문에 수많은 외침이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를 지키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해득실을 떠나 공동의 가치관인 나라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통성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혈통이 섞이는 위험성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더욱 순수 혈통을 강조하게 되고 정통성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수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단일혈통, 단일민족임을 강조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그래서 늘 정통성을 강조하고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것이 우리 민족의 특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인 평등사상 역시 충의 개념에서 볼 수 있는데, 충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고르게 나누는 정신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발전하게 되냐 하면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남이 가지는 것은 불공평한 것이 되고, 남이 가진 것은 나도 가져야 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남도 가지면 안 되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은 가졌는데 나는 가지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긍정적인 면으로 우리민족의 근면성에 나타납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제개발이 그 예입니다. 당시 구호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였습니다. 서양이나 일본이 가지고 있는 것,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 우리도 가져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큰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면입니다.
반면에 이것이 부정적으로도 나타났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 나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육열이 그 예입니다. 한편으로는 자녀들 열심히 공부시켜서 남이 가진 것 갖게 하려는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남들이 다 하니까 우리 아이들도 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교육 열풍입니다. 왜 과외를 시키고 학원을 보내는가 물어보면 무어라 답합니까? 남들이 다 하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킨다는 것이지요. 일등은 못해도 남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예는 다른 데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 하면 나도 해야 하는 겁니다. 누가 무엇을 사면 나도 사야 합니다. 옆집이 대형 벽걸이형 TV를 샀으면 나도 사야합니다. 노래방이 하나 둘 세워져서 장사가 잘 되면 온통 노래방입니다. 유행에 민감합니다. 누가 무엇을 하면 나도 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나는데, 서양의 경우 나이와 직책을 떠나 친구가 되길 쉬운 데, 우리나라의 경우 일단 존댓말과 반말이 있습니다. 나이차가 있고, 직책의 차이가 있을 때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대 반말을 하면 안 됩니다. 친구관계는 자신과 수평적인 관계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나이와 직급이 비슷해서 친구관계가 되더라도 어느 한쪽이 크게 출세하거나 다른 한쪽이 잘못되어 동등한 관계가 깨지면 친구관계도 깨지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인의 두 번째 특징인 평등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연고주의는 수많은 외침으로 인해 생긴 것인데,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뭉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평적인 연대를 만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족보, 학벌, 출신 지역 등으로 연고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창회, 향우회, 종친회가 그런 예고, 여기저기에다 연고를 만들고 연줄을 대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연고를 만들어 그것을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활용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연고주의가 강한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것이지요.
이원복 교수의 책을 읽고 상당 부분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원복 교수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역사와 문화로 인해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우리’라는 것이지요. 서양의 경우 개인주의가 발달한 탓에 ‘나’가 언어에서 많이 쓰입니다. 아버지도‘my father’이고 집도‘my home’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언제나 ‘우리 아버지’이고 ‘우리 집’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말할 때도 ‘우리 아버지’입니다. 나라도 ‘my country’가 아니고 ‘우리나라’입니다. 그만큼 ‘우리’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이는 수많은 외침 가운데 ‘나’보다는 ‘우리’가 강조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아닌 것이 또한 우리나라입니다. ‘우리’라는 것이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국민 전체가 되지만 평상시에는 누가 됩니까? ‘내가 속한 우리’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우리’입니다.
그래서 이 ‘우리’라는 의식이 집단이기주의나 배타주의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우선이고 우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너는,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라는 말에 담겨 있는 집단이기주의와 배타성입니다.
이러한 민족적인 특징이 보통 반도에 있는 나라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유럽의 경우는 발칸반도가 그렇다고 하지요. 온갖 민족이 뒤섞여 있고 수많은 전쟁이 있었음에도 아직도 자신들의 민족성을 지키고 강조하고 있는 곳이 바로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런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반도에 위치한 나라가 아니지만 3개 대륙 사이에 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강대국들은 이스라엘을 차지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면에서 보면 반도에 위치한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그래서인지 민족성에 있어서도 우리 한민족과 비슷한 데가 많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정통성을 고집합니다. 그것이 곧 유대교라는 정통성이고, 율법, 코셔, 안식일 준수를 고집하는데서 나타납니다. 혈통은 우리와 달리 나라 없이 각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상당수가 혼혈이 되어 혈통을 그리 강조하지는 않지만 ‘Who is Jew?’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으로서의 정통성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민족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평등사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유럽 문화권에 있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연고주의의 경우, 우리나라처럼 학연, 지연 등등의 연고에 얽매여 있지는 않지만 유대인 역시 배타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출신 지역에 따른 편견이 있습니다. 동유럽 출신의 아쉬케나지 유대인들과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출신의 스파라디 유대인들 사이에는 편견과 갈등이 존재합니다. Black Jew라고도 불리는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경우도 이러한 편견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우리’라는 의식이 유대인들에게도 존재합니다. 즉 ‘내’가 속한 비슷한 ‘우리’를 중요시하고 강조하는 배타성과 이기주의가 유대인들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서두에서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의 첫 구절에 ‘우리’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에게 ‘우리’라는 이름으로 배타성과 이기주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수많은 외침이 있었고, 예수님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적들은 늘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존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와 전통과 문화를 늘 위협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배타성과 거부감은 매우 심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내에도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 등의 서로 다른 종파들이 있어서 서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종파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우리’라는 말이 갖고 있는 개념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는 같은 의미일까요? 아니면 다른 것일까요? 유대인들의 ‘우리’라는 개념과 우리나라의 ‘우리’라는 개념은 비슷한 점이 많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는 유대인들이나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의 ‘우리’가 아닙니다.
지난주에 주기도문의 첫 단어인 ‘아바’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바라는 이 호칭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친근한 표현으로 우리말의 ‘아빠’와 비슷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호칭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호칭으로 당시 유대교의 기도에서는 개인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예수님만의 독특한 언어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성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성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하나인 친밀감이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 바로 ‘아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너희도 나처럼 ‘아바’라는 말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친근감을 가지고 아바라고 부른 것처럼 이제는 너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친근하게 아바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라는 말을 쓰신 겁니다. 즉 예수님만이 부르셨던 아바를 제자들도 쓰게 하심으로 제자들과 예수님을 ‘우리’로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라는 말은 나와 너, 혹은 나와 그를 포함합니다. 둘 이상이 될 때 우리입니다. 내가 너를 부르거나 그가 나를 불러주어야 우리가 됩니다. 주기도문에서의 우리는 누가 누구를 부른 겁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입니다. 예수님과 나, 예수님과 우리들, 이것이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아십니까? 유대인들도 그렇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고 ‘우리’는 나와 비슷한 너입니다. 생김새가 같던, 집안이 같던, 성씨가 같던, 학교가 같던, 고향이 같던, 회사가 같던, 교회가 같던, 무언가 비슷한 것이 있는 나와 너가 우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나를 포함시키시는 겁니다. 예수님과 나는 비슷한 데가 있나요? 무슨 같은 연고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에 태어난 아이들의 경우는 그런 경우가 있지만 내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나사렛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무슨 연고가 있습니까? 당시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의 경우는 우선 제자공동체라는 연고가 있었고, 유대인이라는 연고가 있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과 비슷한 연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2:5 말씀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창조의 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천지를 창조하셨던 분이십니다. 풍랑도 잔잔하게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시기에 그 뜻을 가르쳐주셨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런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실 재림주로 오실 것이고 이후에는 영원히 통치하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와는 비슷한 점이 없습니다. 우리와 연고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유일한 연고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즉 삼위일체이신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만일 연고로만 따지면 하나님만이 예수님에게 있어 우리입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의 경우는 인간적인 예수님에게서 그 연고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가장 즐겨 쓰는 말이 이것 아닙니까? ‘Who is Jesus? He ia a Jew.’유대인들에게는 그래도 예수님께서 유대인이셨다는 연고를 찾을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런 연고조차도 없습니다.
있다면 딱 하나, 예수님도 사람의 몸을 입고 계셨다라는 것이지요. 그것 외에는 없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과 ‘우리’라는 연고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감히 비교조차도 할 수 없고, 비슷한 구석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우리’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우리셨던 예수님께서 그 우리 안에 나를 초청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나는 우리입니다. 나와 예수님은 ‘우리’라는 연고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과 나는 우리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 속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언제나 나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7:2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우리의 온전한 구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잘 살다가,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성장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 보좌 앞 심판대에 설 것인데, 그때 우리의 믿음과 삶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아 영생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내가 곧 예수님의 우선 관심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항상 살아계셔서 나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기도가 늘 나를 향해 있음을 아십니까? 깨닫고 사십니까? 느끼며 사십니까? 예수님께서 이처럼 나를 위해 늘 간구하고 계시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마음이 생기십니까? 위로가 됩니까?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까? 나도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까?
많은 분들이 기도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나의 종교적인 의무로 생각을 합니다. 이제 교회 다닌 지도 좀 되었고, 직분도 맡았으니 그래도 기도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하고, 설교 때도 그렇고 성경을 봐도 그렇고 하도 기도를 강조하니까 교인이라면 해야 하는 의무로 생각합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닙니다. 기도는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언어가 바로 기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언어가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라는 언어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언어이고 관계입니다. 친밀한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항상 살아 계셔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왜요? 나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나 역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나누셨던 것처럼 나 역시 기도를 통해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친밀하고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고 그러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예수님 자신과 같은 존재로 ‘우리’로 부르신 것은 나 역시 기도로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야, 누구야. 나는 나의 아바이신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깊은 친밀함을 나눈단다. 나는 너도 나처럼 아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길 원한다. 너와 나는 우리다. 우리 같이 기도하자.”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우리’로 나를 부르시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아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우리’로 나를 부르시는 겁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는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을 때도, 내가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하지 못할 때도 예수님은 나를 위해 늘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도 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26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나를 기도로 초청하시는 말씀이 바로 ‘우리’입니다. 같이 기도하자는 겁니다. 같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고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내용이고 산상수훈의 내용이고 복음서와 성경의 핵심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는 홀로가 아닙니다. 기도할 때 외로우십니까? 울며 기도할 때 혼자라고 생각되십니까? 나 혼자만 기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할 대 언제나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기도하십니다. 기도를 통해 나는 예수님과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와 예수님이 우리가 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닙니다. 부담되는 의무가 아닙니다.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예수님과 우리가 되는 시간입니다. 어떠세요? 기도하고 싶지 않으세요?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시진 않습니까?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스스로 이유를 대시진 않습니까? 예수님도 참 바쁘십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나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많으십니다.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그리고 예수님과 우리가 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점 점 늘이십시오. 점점 우선순위에 두십시오.
기도는 언제나 ‘우리’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우리가 되는 것이 기도일 뿐만 아니라 나와 네가 우리가 되는 시간도 기도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너와 나는 우리가 됩니다. 아무리 친해도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너와 나는 우리가 아닙니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할 때, 네가 나를 위해 기도할 때 비로소 너와 나는 우리가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이른바 중보기도는 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내가 우리가 되는 것처럼 기도를 통해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친밀한 교제입니다. 즐거운 교제입니다. 영적 교제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가족, 또한 우리 교우들, 지금 함께 있는 교우들이건 한국에 있는 교우들이던 내가 기도할 때 비로소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로 만나십시오.
하루 중에 가족과 만나는 시간이 얼마나 되십니까? 배우자와 만나는 시간 얼마나 되십니까? 이야기 나누는 시간 얼마나 되십니까? 자녀와 만나서 이야기하는 시간 얼마나 되십니까? 사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회사 다녀올게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가 아니라 ‘집에 다녀오겠습니다.’가 실제 모습 아닙니까? 실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교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우들 일주일에 몇 번이나 봅니까? 매주 예배 나오고 주중에 기도회나 다락방, 제자훈련에 나오는 분이라면 2-3번 정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의 경우는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빠지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입니다. 그런 만남에서 얼마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기도로 만나십시오. 사랑하는 가족, 기도로 만나세요. 기도로 충분히 남편을 만나고 아내를 만나고 자녀를 만나고 부모님을 만나세요. 사랑하는 교우들, 기도로 만나세요. 저도 기도로 만나주시고, 다락방 식구들도 기도로 만나주시고, 교우들 기도로 만나세요. 기도로 먼저 만나면 달라집니다. 누가 달라져요? 그 사람이? 아니요. 내가 달라져요.
기도로 먼저 만나면 내가 달라져요. 그럼 그 사람 실제로 볼 때 좋아져요. 힘들지 않아져요. 이해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고 관심 가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되요.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여러 번 만나도 정작 기도로 만나지 않으면 나빠져요. 안 좋아져요. 오해가 생기고 아쉬움이 생기고 서운함이 생기고 마음이 힘들어지고 상처받아요.
기도로 먼저 만나십시오. 남편과 자녀들 직장과 학교로 보내고 나서 기도로 충분히 만나세요. 그래서 우리가 되세요.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영적 가장이 되십시오. 기도를 통해 아내를 만나고 자녀들을 만나세요. 그래서 우리가 되세요. 이것이 영적 가장의 모습입니다.
주일 예배 전에 먼저 교우들을 기도로 만나세요. 다락방 모임 전에 먼저 기도로 만나세요. 기도회 전에 먼저 기도로 만나세요. 그래서 먼저 우리가 되세요. 기도를 통해 충분히 만나 우리가 되면 예배가 달라지고 모임이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집니다. 왜요? 기도를 통해 나와 우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나와 너를 우리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기도는 나와 우리가 되신 예수님 안에서 나와 네가 우리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눈으로 그 사람을 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고 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눈을 뜨고만 너를 보는 사람은 나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눈을 감고 만나는 사람은 상대방을 품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우리’라는 말을 쓰신 겁니다. 기도를 통해 나와 예수님이 우리가 되고 나와 네가 우리가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또한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라는 말에는 너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즐겨 쓰는 우리라는 말에는 배타성이 있습니다. 집단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비슷한 점이 있고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만이 우리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남입니다. 그래서 배척하고 외면하고 따돌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배타성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이나 지금의 유대인이나 우리 한국인들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이러한 배타성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백인우월주의도 이러한 예이고, 2차 대전 때 나치에 의한 인종청소도 우리라는 이름하에 자행된 범죄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나오는 우리는 이러한 우리가 아닙니다. 비슷하거나 같기 때문에 생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녀된 존재로서의 우리입니다. 크게 말하면 모든 인류는 우리입니다. 모든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작게는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우리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도 편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에는 그 어떠한 배타성도 배척도 거부도 존재하지 않으며 집단이기주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평등한 우리가 존재할 뿐입니다.
에베소서 2:1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여기서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배척했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이상하고 고집 센 민족이라고 경멸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원수 된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높게 쳐져 있던 이 담을 허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이 둘을 친히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원수 된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버려 하나 되게 하시자 원수처럼 여겼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공동체에 있게 됩니다. 서로를 형제라고 자매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눈 한 몸이라고, 사랑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원수를 우리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원수 된 사람들을 우리로 만드신 공동체입니다.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상관없던 사람들,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 서로 다른 사람들을 우리로 만드신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우리가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귀족과 노예가 우리가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우리가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우리가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어른과 청년과 어린아이들이 우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너를 우리로 부르신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우리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우리입니다.
그 의미가 바로 주기도문에 있는 우리라는 말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와 다릅니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친목회나 동창회나 향우회가 아닙니다. 비슷한 사회적인 지위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근사한 친목회가 아닙니다.
전에 한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부임을 해서 부임심방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구역장이 그랬다죠? “우리 교회는 모두 장급이에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뭐라고 했다고요? “모두 여관을 하시나보죠?”
비슷한 사회적인 지위나 비슷한 사람들이 모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배타적인 우리,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가까이 하는 배타적인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우리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에서 제일 먼저 깨버려야 할 것이 바로 잘못된 우리의식입니다. 전라도나 경상도가 아닌 지역에서 전라도 교회가 존재하고 경상도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 내에서, 노회와 총회에도 지역, 학교 등의 연고가 존재합니다. 가난한 사람, 못 배운 사람들 주눅 들게 만드는 엘리트 교회, 부자들의 교회, 높은 사람들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 내에서 엘리트 그룹, 특정 그룹들이 존재합니다. 뭐가 엘리트입니까? 뭐가 특별합니까?
이러한 잘못된 우리의식을 깨버려야 합니다. 산산이 깨어버려야 합니다. 이런 잘못된 우리 의식으로 인해 진정한 우리가 망가지는 겁니다. 원수 된 둘을 하나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고 둘을 하나로, 우리로 만드신 그리스도의 몸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입니다. 무언가 비슷해서, 무언가 같아서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기에 우리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입니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비슷한 것 때문에 우리가 되려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동시에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서 제외시키려고 하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우리가 우리인 것은 비슷해서가 아니라 달라서입니다. 너와 내가 같기 때문에 우리가 아니라 너와 내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의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 가끔 전두환 놀이를 합니다. 성경공부 마지막에 짝 기도를 하는데, 보통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나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기도 짝을 정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가끔 제가 전두환처럼 지정을 합니다. ‘너하고 너 짝해.’ 그럼 그 사람들은 무조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가끔 하는 전두환 놀이입니다.
하나님은 폭군이나 독재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것도 다 다릅니다. 생긴 것도 다 다릅니다. 성격도 다 다릅니다. 취향도 다 다릅니다. 기질도 다 다릅니다. 하다못해 지문도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재자였다면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어느 누구도 똑같은 사람이 없어요.
이스라엘 12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 사람들이 한 민족인지가 의심스러워요. 왜 그렇게 잘나셨는지. 예수님의 12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숭아 학당입니다. 다 달라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좋아하십니다. 서로 다른 것을 존중하십니다. 서로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우리로 부르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틀린 것은 틀린 것이지만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단의 경우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는 틀린 겁니다. 그건 분명한 겁니다. 그러나 다른 것, 즉 사회적인 지위가 다르고, 사는 것이 다르고, 학벌이 다르고, 직장이 다르고, 출신지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다른 겁니다. 다른 그대로 우리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인들 간에도 다른 것으로 인해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다른 것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서운함이 생길 수 있고 마음이 힘들 수 있습니다. 상처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래도 너와 나는 우리입니다. 만일 그 다른 것 때문에 너를 우리에서 떼려고 하면, 혹은 그 다른 것 때문에 내가 우리에서 나오려고 하면 그것은 둘을 하나로 만드신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다르지만 너와 나는 여전히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너와 나를 우리로 부르시고 만드신 주님의 뜻을 따라 더욱 ‘우리됨’을 힘쓰는 겁니다.
앞서 너와 내가 우리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라고 했는데 이 말에는 아주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너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즉 누구의 입장에서 너를 봐야 하는가 하는 겁니다.
영어에서 이해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understand입니다. understand, 무슨 뜻입니까? 밑에 선다, 거꾸로 선다는 뜻이지요? 누구의 밑에? 상대방의 밑에. 무슨 뜻입니까?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 밑에 서서, 즉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서 봐야 이해할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내 입장에서만 보면 절대 이해 안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어때요? 이해가 되요.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누구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까? 예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너나 나나 같아요. 둘 다 죄인이고 연약한 존재이고 잘난 것 없어요. 그리고 나나 너나 둘 다 하나님은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내가 이해하기 힘든 너도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고 너로 인해 힘들어 하는 나도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눈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품어집니다.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품어집니다. 그런 말 하죠? ‘이해는 하겠는데 싫어. 이해는 하겠는데 마음에 안 들어.’이해에는 한계가 있어요. 기본적으로 내가 너가 아니기 때문에 다 이해 못해요.
그런데 너의 입장에서 너를 보고 나아가 하나님의 눈으로 너를 보고 기도하는 사람은 너를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이해보다 큰 것이 품는 겁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다 이해하고 품습니까? 어미의 심정으로 품는 겁니다. 그러면 이해가 되요.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어보세요. 그러면 너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감히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며 우리이신 그 자리에 나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는 예수님과 우리가 됩니다. 또한 너를 위해 기도할 때 너와 나는 우리가 됩니다.
더불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원수 된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너무나 다른 너와 나를 우리로 부르셨습니다. 너와 나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입니다. 한 몸입니다. 서로 다르지만 너와 나는 우리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너와 나는 우리입니다.
너의 입장에서 너를 봅시다. 예수님의 눈으로 너를 봅시다. 그래서 너를 이해하고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와 나를 우리로 부르신 우리 공동체를 더욱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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