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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4: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소서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1667 추천 수 0 2013.09.20 19: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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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9-15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4: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소서
2010년 4월 17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6:9-15

  오늘은 주기도문 시리즈 네 번째 말씀인데, 먼저 주기도문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구조를 분석하는데 기준이 되는 것은 동사입니다. 주기도문에는 모두 일곱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동사를 기준으로 나누면 이렇습니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 나라가 임하시오며
3.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4.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5.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7.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처럼 일곱 개의 동사를 중심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일곱 개의 동사는 기도의 내용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청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주기도문에는 일곱 개의 청원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크게 두 개로 묶어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 기준은 호칭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 성경으로 보면 첫 번째 청원부터 세 번째 청원까지에는 ‘당신의’라는 단어가 각각 앞에 붙어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청원은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대한 청원이기 때문에 '하나님 청원'이라고도 할 수 있고, 각각의 청원 앞에 ‘당신의’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당신’ 청원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네 번째 청원부터 일곱 번째 청원에는 그 앞에 ‘우리’라는 말이 붙습니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네 가지 청원을 ‘우리’ 청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은 크게 ‘당신’ 청원과 ‘우리’ 청원으로 나눌 수 있고, 그 앞뒤에 ‘부름’과 ‘송영’이 있습니다. ‘부름’은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입니다. 그리고 송영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으로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다시 정리를 하면 이렇습니다.

I.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아버지)
II. ‘당신’청원(하나님 청원)
1.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3.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III. ‘우리’ 청원
4.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5.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7.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IV. 송영: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러한 분석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이미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인 주기도문은 당시 유대교의 기도와 연속성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차별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기도나 유대교의 대표적인 기도인 카디쉬와 ‘쉬모네 에스레’ 18개의 축복기도에도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하고, 하나님께 대한 청원과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청원이 있습니다. 또한 기도를 마무리하는 송영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기도와의 연속성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주기도문에는 차별성과 독특성이 있습니다.

  쉬모네 에스레라고 하는 18개의 축복 기도의 경우는 복잡하고 비슷한 말들이 반복되는 자칫하면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될 수 있지만, 이에 비해 주기도문의 경우는 매우 간결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지를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기도에 사용된 호칭인데, 이미 앞선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기도와는 달리‘아바’(아빠)를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바'(אבא)라는 호칭은 아람어로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으로 우리말로 아빠에 가까운 말입니다.

이 아바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즐겨 사용하셨던 것인데, 하나님을‘아바’라고 부르는 것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특징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이것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부르라고 하신 겁니다.

  유대교의 기도에서도 '우리 아버지'라는 의미의 '아비누'(אבינו)라는 말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아보테이누'(אבותינו)라는 말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쓰는 말인 '아바'(אבא)라는 말을 기도에서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예는 매우 드뭅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그러한 예가 거의 전무합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주기도문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면서 '아비누'(אבינו)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의도를 살려 번역하면 '아바 쉘라누'(אבא שלנו)라고 해야 합니다. 아비누는 히브리어로 아버지인 אב에 1인칭 복수 소유격 어미를 붙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직접적으로 아바라고 하셨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아바라는 호칭을 기도에 넣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게 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강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당시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이라는 구절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친근함을 동시에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 이해를 갖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오셔서 아바가 되주시고 임마누엘이 되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는 말이 바로 첫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청원에 있어서도 유대교의 쉬모네 에스레, 18개의 축복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 일상에 필요한 청원들이 먼저 이어지고, 그 후에 하나님에 대한 청원이 나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청원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일상에 필요한 청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기도의 강조점이자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중심은‘하나님의 나라와 뜻’입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말씀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이미 분석한 것처럼 주기도문이 일곱 개의 동사로 이루어진 일곱 개의 청원이라는 것인데, 이는 유대적인 전통과 관념에 따르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7이라는 숫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7은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천지창조는 6일 동안 이루어지고 제 칠일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심으로 7일째에 마치게 됩니다. 성막과 성전 안에 있었고 유대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메노라 역시 7개의 촛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대교의 삼대명절들은 칠일 동안 지킵니다. 유대인들의 결혼식에서는 일곱 번 축복기도를 하고 7일 동안 잔치를 베풉니다. 예수님께서도 용서를 말씀하실 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서도 일곱이라는 숫자가 여러 번 사용됩니다.

  7이란 숫자는 유대교의 전통과 관념에서는 구원과 승리의 숫자이며 완전성을 상징합니다. 주기도문이 일곱 개의 동사로 이루어진 일곱 개의 청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는 어떤 기도? 완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청원해야 하는가? 라고 질문할 때 그 답은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이 말은 주기도문 그대로 외워서 하라는 의미보다는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과 순서에 따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내용이 주기도문에 다 담겨져 있습니다. 정말 주기도문의 순서와 내용처럼 기도해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주기도문의 기도의 순서와 내용을 토대로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의 기도의 차원이 달라질 것입니다. 기도의 깊이와 폭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편협하고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기복적이고 나의 현실과 문제에만 치우진 기도인지 모릅니다. 그런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기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고쳐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을 다루면서 여러분 자신의 기도를 점검하십시오. 내가 바르게 기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바뀌길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단순히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기도문에 따라 기도를 하면 우리의 삶의 방향도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삶의 방향과 목적을 바꿉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거듭나고 그래서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까지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한 은혜가 말씀을 듣는 중에, 그리고 여러분들의 기도와 삶 가운데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주기도문의 일곱 개의 청원 가운데 첫 번째 것의 의미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입니다. 정확하게 읽으면, ‘당신의’라는 말을 넣어야 합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구절은 청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찬양입니다. 그 앞의 구절과 연결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 앞서 구조를 분석하면서 유대교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시작이 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찬양이 따르게 됩니다. 주기도문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찬양을 드립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 아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되어 있는데, 그 의미가 분명하게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영어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 성경의 경우 가정법을 취하고 있는데 그래서 마치 이런 의미로 들립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마치 '왕께서 만수무강하시길!'이란 표현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이런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왕이 고령까지 건강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바람이나 소망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이와 비슷한 뜻일까요? 그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원한다는 바람일까요?

  심지어 이렇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거룩히 여지기 않으면 거룩해지지 않는 듯한 느낌까지 들게 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거룩히 여기지 않아도 거룩하십니다. 그분 스스로 거룩하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그 자체로 거룩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성경이나 영어 성경의 해석이 모호한 것도 있지만 이 구절 자체가 번역에 있어 어렵다는 것이지요.

  원어를 보면 이 동사는 가정법이 아니라 간접 명령형을 쓰고 있습니다. 간접 명령형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소서."

  여기서 주체가 누구냐 라는 것이 문제인데, 누가 주체입니까? 누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보면 더욱 더 분명해지는데, 히브리어로 무엇이지요?

  우리 교회는 예배 마지막 찬양을 히브리어 주기도문송을 부르는 유일한 교회인데, 히브리어로 이 부분이 무엇입니까? 이트카데쉬‘יתקדש’입니다. יתקדש는 문법적으로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동사 형태에 있어서 재귀형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명령형이라는 것입니다.

  재귀형은 그 동작이 자신에게 귀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התקדש라는 말은 '부정한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시킨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 바로 거룩의 개념입니다.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קדוש인데, 이 말은 '분리되었다. 구별되었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부정한 것, 더러운 것, 죄로부터의 구별, 분리가 바로 거룩입니다. 주기도문에 쓰인 단어인 התקדש도 같은 어원입니다. 분리, 구별의 의미인데, 재귀형이기에 '부정한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시킨다.'는 뜻입니다.

  여기다가 간접명령형 יתקדש를 사용했기 때문에 '부정한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시키소서'가 됩니다. 무엇이 יתקדש되도록? 'שמך' '당신의 이름이' 그렇게 하시는 주체는 누구? 아바 하나님.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어떻게 읽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이름이 부정한 것들로부터 구별되도록 하소서"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그의 백성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백성들에게 알려주셨고, 그 거룩하신 이름을 경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질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 사람들에 의해.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로 거룩하십니다.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거나 거룩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서 그 이름이 거룩하게 대우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거룩하신 이름이 거룩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모든 것과 구별된 거룩하신 이름이 함부로 사용되고 더렵혀질 때가 있습니다.

  우선은 이방민족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방민족들이 나옵니다. 그때 이방민족들이 뭘 합니까? 이스라엘을 조롱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그랬을 때를 말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달라는 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는 것을 못하도록 그들을 잠잠케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이제 더 이상 원수들에 의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들을 멸하셔서 잠잠케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택한 백성에 대한 구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에 이러한 내용이 잘 담겨 있는데, 출애굽기 32:12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탄원을 합니다.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이 사건의 배경을 우리는 압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당도하였고, 모세가 홀로 시내산에 올라 십계명을 받을 때, 한참을 지났는데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그것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한낱 금송아지로 만들어버린 죄악을 범했습니다.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멸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가 한 말입니다. 무어라 말했습니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그 의미를 살려 읽으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이 백성들을 멸하신다면 애굽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야웨가 자기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모두 멸절시키려고 애굽에서 구해내었구나 하면서 비웃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비웃음거리가 되고 그렇게 되면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하시려는 겁니까?"

  이런 의미입니다. 비록 이 백성이 범한 죄악은 죽어 마땅하지만, 그로 인해서 원수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비웃음거리로 삼지 못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즉 무엇을 위한 간구입니까? 하나님의 용서의 자비와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용서해주시고 구원해달라는 간구가 이 기도 가운데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택함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거짓 신들을 섬길 때, 즉 우상숭배를 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더럽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죄악이 무엇입니까? 입으로는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나 실제로는 바알과 아스다롯 등 가나안 신들을 따르는 영적 간음을 행한 것입니다. 입으로는 야웨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바알 같은 우상들을 따르면서 온갖 더러운 죄악들을 일삼는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더렵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택한 백성들이 그러한 죄악을 범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백성들의 입에서 더렵혀지고,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더렵혀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백성들 가운데서 가벼운 이름으로 대우받고, 죽은 우상에 불과한 바알처럼 대우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불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는 죄에 해당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내가 함부로 대하고, 가볍게 여기고, 내 형편에 따라 타협하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내 욕심에 따라 묵살하는 그 불순종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죄입니다.

  성경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하신 말씀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명하신 말씀인데, 우리가 그 말씀을 함부로 대하고 가볍게 여기고 묵살하고 내 형편에 따라 타협하고 합리화하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이랬다 저랬다 한다면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불순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고 더럽히는 죄입니다. 백성들 가운데 불순종이 가득 차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도저히 있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떠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불순종을 밥 먹듯이 하는 이 백성을 치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어떤 의미입니까? 당신께서 택하신 이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불순종과 죄악으로 인해 더 이상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이 백성을 고쳐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백성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금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대우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바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지자들을 보내시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매로 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제 그러한 영적 간음과 불순종과 온갖 죄악과 거짓을 중단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대우하고 묵살하고 더럽히는 죄악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지자들을 통해 깨우치셨는데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을 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매로 치시는 것입니다. 매로 쳐서라도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결국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측면에서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원수들을 멸하사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달라는 간구이며, 비록 죄악으로 인해 죽을 죄인들이지만 당신께서 택한 백성들이니 다시금 용서의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간구이며, 동시에 당신께서 택하신 이 백성이 더 이상 이러한 죄악과 불순종 가운데 있지 않도록 이들을 깨우치게 해주시고 고쳐주시고 살려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간구가 담겨 있는 기도가 바로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에게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더럽힘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라고 하는 이들에게서, 성직자라고 하는 이들에게서, 그리고 거룩한 주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우스운 이름이 되고 조롱거리가 되고 욕되고 더럽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구해야 할 기도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이루어진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원수 마귀의 손에서부터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죄와 사망이라는 원수의 손에서부터 구원해내셨고, 원수 마귀의 손에서부터 구원해 내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죄용서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자비가 나타난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인류 구원의 길을 여심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거룩의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이렇게 드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 이제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음으로써 거룩하여 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부르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무리들을 잠잠케 하시되 그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사 구원받게 하사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또한 당신의 교회, 당신의 자녀라고 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욕되고 하고 더럽히는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다시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기시고 고쳐주시고 새롭게 하시어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거룩의 모습으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더욱 더 긍휼과 자비를 베푸사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용서의 구원을 받아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 욕되게 하고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교회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다시금 새롭게 되고 거룩한 공동체, 거룩한 무리인 성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에서 우리는 더욱 더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예수님 역시 거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슈아라는 이름 자체가 거룩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이름의 거룩을 거부합니다. 예슈아, '그분이 구원하신다'는 의미인데 이 이름을 예슈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고, 예슈라는 이름의 뜻을 '그 이름이 영원히 사라질지어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구원의 이름을 저주의 이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오신 거룩하신 이름을 저주의 이름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왜 그러는지를 압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교회로부터 받은 큰 상처가 있습니다. 수많은 박해로 인해 상처가 예슈아가 아닌 예슈로 부르게 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참으로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유대인들을 대해야 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거룩하신 독생자이신 예슈아의 이름이 더 이상 저주의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게 하소서. 유대인들의 입에서 예슈아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유대인들의 입에서 예슈아 하마시악(ישוע המשיח), 예슈아께서 메시아라고, 우리들의 왕이시라고 고백하는 그 날을 속히 허락하옵소서! 그래서 예슈아의 거룩하신 이름이 다시금 불려지게 하시고 그래서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이 예슈아의 이름을 통해 더욱 더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이 기도가 우리 가운데, 날마다의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의미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구원을 이루시는 의미지만, 우리 편에서도 큰 책임이 따르는 기도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로 거룩하시지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합당하게 대우받기도 하고 부당하게 대우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하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합당하게 대우받기도 하고 부당하게 대우받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십니다. 그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대우를 하십시오.

  영성 신학자로 유명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일화인데, 이분이 볼티모어에 있는 유대인-그리스도인 원탁 회의에 참여를 했었답니다. 정통파 유대교 랍비 열 명과 목사, 신부 열 명이 함께 모여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이었답니다. 그 모임에서 랍비들이 항상 공부할 히브리어 본문의 유인물을 가지고 왔답니다.

  그리고 공부가 끝나면 그 유인물들을 다 수거하는데 그 숫자까지 꼼꼼히 세더랍니다. 나중에 왜 그렇게 꼼꼼하게 수거하는지 물어봤답니다. 그 유인물들을 그렇게 수거하는 이유는 집으로 가져가서 경건하게 다 태워버리기 위해서랍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방인의 손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남겨 두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부주의하게 사용되거나 불손하게 취급될까봐 그리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좀 지나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진 피터슨 목사는 유대교 랍비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자세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영어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함부로 사용되는 현실인데, 그들의 그러한 태도에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어떠합니까? 이것은 한 예지만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대우를 합니까? 정말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거룩하게 대우합니까? 무엇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대하는 자세입니까?

  우선,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하게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지난 3주간에 걸쳐 말씀드린 것 중에 하나님의 친밀성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로 주기도문의 첫 단어인 '아바'라는 말이었는데, 이 호칭은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치 아이가 사랑하는 자기 아버지를 부르는 것처럼 '아바,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은혜이고 신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바, 아빠'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품으로 안길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자세는 경외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빠되심 가운데 무엇이 먼저인가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이 먼저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아바, 아빠'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요즘 보면 너무 쉽게, 아무런 생각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대합니다. 특히 영어 표현이 심각한데, 'Oh, my God!'이나 'Jesus!'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의 표현인지 아시지요? 이런 표현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부로 쓸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전에 말씀을 전한 것처럼 어떤 맹세를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쓰지 마십시오. 우리의 입으로 함부로 그분의 이름을 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또한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이름에 합당한 찬양과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나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는 곳이 예배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이름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곳이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예배의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예배의 자리가 여러분들의 일보다 중요하고, 상사보다 중요하고, 여러분의 계획보다 중요하고 돈벌이보다 더 중요합니다. 목숨 걸고 지키십시오.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드리십시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가 그 이름에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그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이고 하나님의 숨 막히고 황홀한 거룩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쉽게 말하면 잡탕입니다. 양다리 신앙입니다. 하나님도 잡고 다른 것도 잡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바알과 같은 우상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온갖 미신적이고 이단적인 것들을 따르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욕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것 좋아서 그것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드리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삶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하나님도 조금 사랑하고 다른 것도 조금 사랑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당신의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믿음 생활하십시오.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합당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사십시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의 십자가는 철저한 순종입니다. 이 사실을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철저한 복종입니다. 그분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순종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게세마네 동산에서의 그 처절한 기도를 통한 순종,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에도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신 그 순종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이요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그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셔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순종의 능력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냅니다. 순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삶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여러분, 순종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을 닮은 순종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순종을 드리십시오. 어렵다하지 마시고 하나하나 해 나가십시오. 그래서 당신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게 하십시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부당하게 대우받고 욕되고 더럽혀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소서'라는 이 기도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이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슈아의 거룩하신 이름을 통해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거룩하신 아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고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사십시오.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순종을 드리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대우하는 여러분들의 예배와 믿음의 삶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역사가 있기를 우리에게 참된 기도를 가르쳐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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