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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9: 용서하게 하소서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1976 추천 수 0 2013.09.20 19: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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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9-15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9: 용서하게 하소서

2010년 7월 3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6:9-15

  오늘은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청원으로 용서에 관한 것이다. 먼저 이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인생은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사람 人 날 生, 한자 그대로는 사람이 태어나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인생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참 많은 말들이 있다.

  나는 인생은 은혜라고 생각한다. 생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니 은혜다. 내가 태어나 숨 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은혜다. 인생은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인생은 축복이다. 결코 인생은 고통이 아니다. 허무도 아니다. 우연도 아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인생을 적시고 있다.

  그런데 이 은혜를 가리는 것이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고 막고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무엇인가? 죄다. 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가린다.

  죄는 은혜의 반대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생에 은혜는 없다. 은혜 없는 인생은 고통이다. 고통의 인생이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 없이 은혜 없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를 통해 죄용서 받고 하나님의 은혜에 젖어야만 인생이 축복이 된다. 예수 없는 인생은 고통이다. 허무이고 비극이다. 그러나 예수 있는 인생은 은혜이고 축복이고 살맛나는 행진이다. 예수 믿으라.

  죄는 은혜의 반대이며 모든 관계를 끊어놓는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는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인생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인생이 어떨 것 같은가? 비극이고 고통이고 무의미고 허무이다. 그뿐인가? 죄는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놓는다. 관계는 인격적인 것이다. 죄는 인격적인 관계를 끊어놓는다. 죄는 모든 것을 비인격화시킨다.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우상숭배로 비인격화시킨다. 관계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껏 나의 욕심을 이루는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겸손하게 부탁하고 감사하게 받는 인격적인 관계 대신 억압과 탈취로 비인격화시킨다.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는 거짓과 과장으로 비인격화된다. 부부의 하나 됨을 위해 주신 성은 음란과 포르노로 비인격화된다. 공평과 정의를 이루어야 할 정치는 억압과 부정으로 비인격화되고 권력은 전쟁으로 비인격화된다.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용서가 필요하다.

  인생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뜻처럼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금 용서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죄용서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 34;6-7에서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시나 그 죄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를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다. 에덴동산도 마찬가지 아닌가? 죽을 죄를 지은 인간에게 비록 벌이 주어지지만 용서하시고 추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가? 성경 전체를 통해 죄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반드시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완전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회개하며 돌아오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용서다. 이 용서의 은혜를 받아야만 인생은 정말로 은혜이며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예수 믿는 사람이란 무슨 뜻인가? 죄용서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청원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는 용서의 청원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청원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청원이 아니다. 전제와 같은 것이 있다.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들리는가? 참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그냥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라고 하시지 왜 앞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을 붙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안에 미움이 있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용서를 위한 청원에서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자, 잘못한 자, 상처 준 자를 용서할 것을 요청하신다. 그냥 읽으면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내 죄도 용서해주시지 않으실 것 같다. 이어지는 14-15절을 보면 더욱 그러한 것 같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부분은 주기도문의 연장선이다. 특별히 용서에 대한 청원에 대한 부연강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기도문 강해를 하면서 본문에 이 부분을 포함해서 계속 읽은 것이다. 이 부분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 잘못한 자들, 상처를 준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으신다는 말로 들린다.

우리의 용서가 전제조건이란 말인가? 우리가 용서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면 그 횟수에 따라 하나님도 용서하신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죄 용서에 따라 좌우된다는 말인가?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본문을 잘못 이해하면 공로사상이 되기 쉽다. 공로 사상이 무엇인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사상이다. 내가 선한 행위를 하고 어떤 노력을 해서 하나님께 택함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러한가? 아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의 실존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다.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인간적인 도덕적인 기준에서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선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뼛속까지 부패한 죄덩어리일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용서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참된 회개이고 용서의 근거는 회개를 받으시고 사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원은 우리의 용서를 전제로 하고 있다.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보기 위해서는 원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 시간 어려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자세하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헬라어 본문에는 '카이' και라는 접속부사가 두 번 나온다. '그리고, 또한, 역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히브리어 번역 성경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 '감' גם이란 단어가 나온다. και나 גם이란 단어는 '누군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했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준 누군가가 누구인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원어 성경의 순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이 먼저다. 순서와 και라는 단어의  뜻을 살려 번역을 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아버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가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었습니다."

  조금 의역을 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의 죄도 역시 용서해주십시오."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용서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는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용서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을 언어적으로 해석하는 신학자들의 연구에서도 비슷한데, 그 가운데서 요아킴 예레미야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말에 '사하여 주었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아페카멘(αφηκαμεν)인데,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완료형이 맞다고 한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었다. 그리한 것처럼 우리의 죄도 용서해달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헬라어가 아닌 아람어였다. 그래서 이 헬라어 본문을 아람어로 번역을 하면 완료형은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에 가깝거나 '동시성의 완료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동사 형태라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앞서 '역시, 또한'이란 뜻을 가진 και,גם이란 단어도 보았는데, 이 두 가지 언어적인 분석에 따라 읽으면 최종적으로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아버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당신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겠습니다."

  이해가 되는가? 즉 이 청원은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로서 우리 역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 받고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이 동시에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은가? 용서는 누가 하는가?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만이 자신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를 구할 수 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비유이다. 마태복음 18:23-35이다. 이를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자.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다.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애원하기를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였다.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 그를 놓아 주고, 빚을 삭쳐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기를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른 바 '무자비한 종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 의하면 만 달란트 빚는 자가 나온다. 여기서 빚은 죄를 말한다. 주기도문의 죄라고 번역된 것도 정확한 뜻은 빚이다. 유대인들의 개념에서 죄는 하나님께 대한 빚이며, 이웃에 대한 빚이다. 특히 죄를 하나님께 대한 빚으로 보는 것인데, 이것은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은 죄를 어떤 도덕적인 것으로 보는데 죄는 하나님께 대한 빚이고 사람들에 대한 빚이다. 빚은 다 갚아야 해결된다.

  여기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나온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왕에게 빚진 자다. 그런데 왕이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즉 용서해주었다는 말이다. 만달란트가 얼마인지 아는가? 달란트(Talent)는 저울로 무게를 다는 최대의 단위를 말하는데, 신약시대에는 1 달란트의 무게는 약 20.4kg 정도 되었고 6천 데나리온(드라크마)에 해당되었다. 1 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삯이다.

그렇다면 1달란트는 장정이 6천일 동안, 그러니까 하루도 안 쉬고 16년 5개월 10일 동안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돈이다. 그러면 일만 달란트는 얼마인가? 6천만 데나리온이다. 장정이 164,383년 하고도 반년을 더 일해야 얻을 수 있는 돈이다.

  얼마인지 상상이 되는가? 예수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세금이 이백 달란트였다. 이와 비교해보면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돈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고 했다. 자기의 능력으로 갚을 수 있을까? 장정이 164,383년 하고도 반년을 더 일해야 얻을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 불가능하다. 죽어도 못 갚는다. 그런데 왕이 이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해 주었다.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의 죄, 하나님께 대한 빚의 무게가 이렇다는 것이다. 도저히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죄의 무게인데, 하나님께서 값없이 탕감해주셨다는 것이다. 용서해주셨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용서 받은 우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빚진 자가 있었다. 얼마를 빚졌는가? 백 데나리온이다. 장정이 백일동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돈이다. 하루에 5만원을 일당으로 받는다고 한다면 5백만 원이다. 자기에게 빚진 자에게 어찌했는가? 빚을 갚도록 감옥에 가두었다. 자기는 일당 5만원으로 하면 3조원이다. 어마어마한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5백만 원 빚진 자에게 탕감은커녕 무자비하게 대한다.

  이를 알게 된 왕은 노하여서 그 빚, 일만 달란트의 빚을 다 갚도록 감옥에 가두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비유의 끝에서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가?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무엇을 말하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진 작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으면 자신의 죄에 대한 탕감은 무효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용서 청원과 같은 내용이다.  

  이 비유는 하늘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이다.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용서를 말씀하신다. 무슨 말인가? 용서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들이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빚을 진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빚을 탕감해주셨다. 용서해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된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용서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막히게 된다.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내가 나에게 잘못한 자들, 상처준 이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막는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 막는 일이고, 하나님의 용서의 흐름을 막는 일이다.

  용서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샬롬이다. 용서 받은 자에게 임하는 은혜가 바로 샬롬이다. 용서 없이 샬롬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샬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 나는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고 있다면 어찌 샬롬이 있겠는가?

  용서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샬롬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용서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샬롬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사람마다 용서를 실천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용서는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관계의 회복이다. 인격적인 관계의 회복에는 상대방을 이용해먹거나 속이거나 상대의 것을 빼앗는 약탈은 없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까?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많이 평등해지지 않을까? 경제적인 평등도 가능해질 것이고, 정치적인 면에서도 훨씬 더 투명하고 정직해지지 않을까? 갈등이나 전쟁도 훨씬 줄지 않을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관계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 둘을 말씀하셨다. 무엇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는 것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39절)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관계다. 앞서 죄는 관계를 파괴한다고 했다. 그러나 용서는 관계를 살린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살아났다.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너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무엇을 원하시는가? 더욱 깊은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단순히 구원받아 하나님 믿고 적당히 복 받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뜻을 주고받는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를 만나신다고 하셨다.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을 가까이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과 순종을 말한다. 그런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어떻게 되는가?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하)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자에게 말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관계다. 깊은 관계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잘 아시는데, 내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에게 드러내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라.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아는 자가 되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만으로도 인생의 방향과 의미가 바뀌는데,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어떨 것 같은가? 하나님을 모르면 망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그래서 교회는 다니는데 정작 하나님을 모른다 라고 했을 때 어찌 되겠는가?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라. 말씀도 잘 듣고 성경 공부도 잘 해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깬다. 멀게 만든다. 희미하게 만든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라. 우리에게는 완전한 해결책이 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다. 우리가 구원받았을지라도 우리는 연약하다. 불완전하다. 그래서 언제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 보혈에 의지해서 나아가라. 의미 없는 중언부언의 회개가 아닌 중심의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전적으로 사랑하라. 하나님과 친해지라. 하나님과 친해지면 신나는 일이 많아진다.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다. 이웃과의 관계는 용서와 사랑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냥 친한 것과 구별하라. 친한 것은 같은 직장을 다니거나 같은 교회를 다니거나 나이가 비슷하거나 스타일이 비슷하거나 하면 된다. 하나님은 그것 원하시는 것 아니다. 사랑의 관계다.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 나와 가까운 사람,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내 마음에 힘든 사람, 내게 상처준 사람, 내게 해를 가한 사람까지도 품고 사랑하는 차원이다. 그래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 없이는 그런 사랑은 불가능하다.

  친한 사람, 가까운 사람,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도 용서와 사랑이 필요하다. 용서와 사랑이 없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언제 깨지고 멀어질지 모른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에는 용서가 필요하다. 사랑이 필요하다. 용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께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다.

  죄에 대한 용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왜 우리의 죄용서만 구하면 안되는가? 그냥 우리의 죄만 용서해달라고 구하면 안되냐 하는 말이다. 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요구되는가 말이다.

  생각해보라. 여전히 내 마음에는 사람에 대한 미움과 복수, 원한과 증오심이 있는데 그런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저 놈만은 용서할 수 없어'하면서 그 마음을 꽉 움켜쥐고 있으면서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은 '하나님, 그 죄 말고 다른 죄들만 용서해주세요.'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는가?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꼭 이런 꼴이다. 말이 안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웃과의 관계 회복이다. 이웃 사랑이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하는지 아는가? 이웃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런 우리가 여전히 이웃에 대해 미워하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용서는 헛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용서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가로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를 통해 이웃들에게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의 배후에는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는 불변하는 일정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 일정하지 않고 변하기 쉽다. 그래서 구해야 한다.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해야 한다. 용서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덧입어야 한다.

  용서가 힘든가? 어려운가? 용서한 것 같은데 자꾸 마음 가운데 미움이 올라오고 분한 마음이 치미는가?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그럴 때 마다 구하라. 십자가의 은혜로 나를 덮어달라고, 주님 닮은 용서와 사랑을 하게 해달라고, 용서의 굳은 결심을 하고 실천하게 해달라고 구하라.

  영화 밀양이 있다. 남편이 죽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에 내려가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했던 여자의 삶은 유괴범에 의해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괜히 돈 있는 척 했던 여자의 허영이 발단이 되기는 했지만 유괴범은 결국 아들을 죽였고, 그 유괴범은 다른 사람이 아닌 아들이 다니던 학원 원장이었다. 빚에 쪼들려 돈이 있어 보이는 이 여자의 아들을 유괴하였던 것이고 결국 죽이고 만다.

  아들의 죽음 이후에 극도의 슬픔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와중에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용서도 경험하고 마음에 안정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교도소에 있는 유괴범을 만날 생각을 한다. 원수도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란다. 그래서 교도소에 갔다.

그런데 유괴범의 얼굴이 환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그래서 죄 용서 받았단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평안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겠단다. 그 말에 이 여자는 충격을 받아 쓰러진다. 그러면서 다시 분노가 치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당신이 먼저 용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내용인데 이 영화가 상도 받고 했지만, 이 영화에는 용서가 없다. 용서를 말하는 것 같은데 용서가 없다. 시나리오 작가도, 감독도, 배우도 모두 용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용서가 무엇인가? 정말 용서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가? 평안이겠지. 맞다. 죄 용서 받은 후에 나타나는 현상은 평안이다. 그 평안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빠진 것이 있다. 철저한 회개 후에 임하는 평안이다.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회개는 피해자에게도 철저한 회개가 따르게 된다. 정말 죄 용서를 받아 평안하다면 자기가 죽인 아이의 어머니를 보았을 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것이 용서다.

이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용서하기 위해 만나려 했던 것이 아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이 어떤지를 보고 자신이 용서해주면 어떻게 나올까를 보고 싶은 일종의 자기 의에서 갖게 된 마음이다. 자기 아들을 죽인 아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여자가 용서를 하겠다고 한다면 철저하게 주님께 의지하고 용서의 힘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없다.

  나는 지금 영화를 평론하자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용서는 관계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힘들지만 진정한 용서를 통해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 영화 밀양은 이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용서도 아무 것도 아니다.

  기억하라. 용서는 관계 회복이다. 용서를 통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명하신다.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나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나 역시 나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습니다. 용서할 수 있도록 힘주시고 실제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용서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내 마음에 다시금 미움과 증오심이 생길 때 용서해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금 용서하게 도와주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움과 증오, 원한과 보복, 대립과 갈등이 만연한 세상에서 용서를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이루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기억하라. 용서와 사랑이 우리의 정체성이자 우리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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