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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2: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535 추천 수 0 2013.09.20 19:29:16성경본문 : | 마6: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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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2: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2010년 7월 24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6:9-15
오늘은 주기도문 열두 번째 시간으로 송영에 해당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송영이 무엇인지 아시죠? 기도문에는 처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원과 마지막에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이 있습니다. 주기도문 역시 기도문으로써 사용되었기에 마지막에 송영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송영에 해당하는 이 부분이 괄호로 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송영 부분이 원래 없던 것임을 뜻합니다. 가장 오래된 마태복음 사본에 보면 송영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영 부분이 우리 성경이나 오늘날 모든 성경에 첨가된 이유는 기도에 대한 관행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모든 기도에는 송영이 있습니다.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는 시편을 봐도 마지막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으로 마무리합니다. 유대교의 경우 대개 기도문을 모은 기도서를 보고 기도를 하는데, 모든 기도문에는 송영이 있습니다. 송영 없이 기도를 마치는 경우는 없습니다.
주기도문이 초대교회의 기도문으로 사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송영이 첨가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면서 문제가 생겼는데, 이방인들의 경우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기도 관행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른 기도를 가르칠 필요가 있었기에 이 송영 부분이 첨가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 끝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송영으로 끝나는 오랜 성경적이고 유대적인 전통을 가르치기 위해 이 부분을 첨가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이 송영 자체가 오랜 성경적이고 유대적인 전통이고, 그 내용을 보면 주기도문의 중심 내용을 잘 담고 있기에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이 송영을 포함해서 주기도문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민감하신 분들은 우리가 예배나 기도 때 외워서 사용하는 주기도문과 성경 본문에 나오는 주기도문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송영 부분인데, 어떤 차이일까요? 한 단어입니다. ‘대개’라는 단어인데, 찬송가 앞에 보면 주기도문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대개’라는 말이 붙어서 송영이 시작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런데 마태복음 본문에는 ‘대개’라는 말이 없습니다. 우선 대개라는 단어의 뜻인데, 무슨 뜻으로 생각되십니까? 이 뜻을 잘 알고 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대개라고 하니까 대략, 대체적으로, 대부분, 거의라는 뜻으로 압니다. 그런 뜻이라면 송영이 어떻게 됩니까? “대개, 대략, 대체적으로, 거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가 됩니다. 좀 이상하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는데, 그럼 다 있는 것이지 대략, 대체적으로, 거의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말이 안되죠.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그건 매우 잘못된 경우입니다. 이건 번역상의 문제인데,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송영 앞에 접속사가 있습니다. ‘호티’라는 접속사인데,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의 ‘키’(כי)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인가하면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읽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을 했을까요? 그것은 1930년대에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을 할 때 중국어 성경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경에서 '大槪, 大蓋'로 번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죠. 사실 중국어 성경에서 '대개(大蓋)'는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대개라는 단어가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대체적으로, 대략적으로, 거의"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이후 이를 바로잡았는데, 중국어 성경도 '왜냐하면'이란 의미의 단어인 '以나 因爲'로 바꾸었고, 우리 한글 성경 역시 다시 번역을 하면서 '대개'라는 단어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해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배 때 사용하는 주기도문은 여전히 "대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주기도문을 개정했는데, 개정된 주기도문에 보면 '대개'라는 말이 빠져있습니다.
'대개'라는 단어를 뺀 것은 잘한 것입니다. 이 말은 '대략, 대체적으로, 거의' 이런 의미로 오해하다보니까 그래서인지 주기도문도 대략 그런 것 같고, 기도도 신앙도 대략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대개'라는 단어를 뺀 것은 잘한 것인데, 원어에 있는 '호티'라는 단어, 우리말로는 '왜냐하면, 이는'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접속사를 생략한 채 개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본문의 내용이나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접속사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12:1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 접속사는 단순히 다음 말을 하기 위한 연결이 아니라 그 앞의 모든 내용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말한 것은 참된 믿음과 복음의 내용입니다. 로마서를 복음의 진수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과 믿음의 내용을 가르친 후에 12장부터는 우리가 받은 복음과 믿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삶에 대한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연결하는 접속사가 바로 '그러므로'입니다. 우리가 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접속사의 역할을 제대로 모르면 이 본문을 가지고 이상한 해석을 합니다. 제가 전에 어느 형제에게서 들었는데, 선교단체에서 이 본문을 가지고 가르치기를 우리 몸이 거룩한 제물이고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니까 구태여 교회에 가지 않고 자기들끼리 예배드려도 괜찮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그만큼 성경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 접속사의 역할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접속사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시 주기도문 송영으로 돌아가서 보면, 새로 개정된 주기도문도 그렇고 성경도 그렇고 헬라어 원문에 있는 '호티'라는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은 채 생략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접속사를 생략해도 주기도문의 의미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나 내용이 손상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접속사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쉬움이라는 것이지요.
'호티'라는 접속사, 우리말로 '왜냐하면, 이는'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를 살렸을 때는 주기도문 송영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의미는 매우 분명하고 주기도문의 전체와 중심 내용을 명확하게 전달해줍니다. '왜냐하면'이라는 이 접속사는 무엇을 받을까요? 주기도문 전체를 받습니다. 특히 앞의 세 가지 청원은 그대로 받고 있습니다.
앞의 세 청원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 지게 하시고,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것 아닙니까? 이 세 가지 청원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 바로 송영입니다.
하나하나 볼까요? 송영의 순서대로 보면 나라에 해당되는 것이 두 번째 청원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입니다. 그 다음 권세에 해당하는 것이 세 번째 청원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입니다. 권세는 그 사람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권세에 대한 청원입니다. 영광에 해당하는 것은 첫 번째 청원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 지게 하시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청원입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의 처음에 나오는 세 가지 청원들이 마지막 송영에 다시금 반복되고 있는데, 이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주기도문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 이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실제적인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해야 할 핵심 내용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중심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우리의 삶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 하나님 나라를 쫒아가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강해하면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들어가는 천국의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에 따름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됩니다. 그 나라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임했고, 확장되어가고 있고,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부인을 요구합니다. 죄의 본성이 자기주장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부인 없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따른다는 것은 자기부인 없이 불가능합니다. 끊임없이 내가 주인 되고 하나님 되어 내 욕심대로 내 뜻대로 살려고 하는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철저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는 이 자기부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고 누릴 수 있고 확장해나갈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에도 이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네 번째 청원부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청원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고 동시에 물질을 하나님처럼 여기고 탐욕을 부리는 맘모니즘에 대한 거절입니다. 일에 대한 자기부인이고 물질에 대한 자기부인입니다. 일에 대한 자기주장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우상시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일에 대한 자기주장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의존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맘모니즘을 거부하고 자족과 감사와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 답이 바로 송영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에 대한 자기부인, 물질에 대한 자기부인을 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존하고 자족과 감사와 나눔과 이웃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기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나의 능력을 의지하고 일을 의지하고 물질을 하나님처럼 여기면서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송영입니다.
다섯 번째 청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의 빚,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용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용서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입니다. 우리의 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 빚진 우리를 용서해주심으로 시작된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용서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이 지옥입니까? 그 안에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를 명하십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 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섯 번째 청원 "우리가 시련을 당했을 때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유혹에 빠졌을 때 속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구하여 주옵소서." 왜 이렇게 구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권세로 충만합니다. 우리가 시련을 당했을 때 우리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입니다. 왜 우리가 죄의 유혹을 멀리해야 합니까? 왜 거부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 청원, "우리를 악에서, 악한 자에게서 구하시옵소서." 왜 이렇게 구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승리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악한 자를 능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덧입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자 사탄은 우리를 삼키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덤벼들고, 때로는 광명한 천사의 모습처럼 다가오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능히 마귀의 유혹과 궤계를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을 받으면서 수식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송영입니다. 따라서 이 송영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과 기도의 내용과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근거와 우리의 기도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아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 쓰신 것이 바로 "아바'입니다. 아람어인데,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사용하셨던 언어였고, 이 아바라는 단어는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매우 친근한 호칭입니다.
주기도문의 서두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인데, 여기서 우리는 초월적인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신 거룩하신 분이시며,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고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녀 삼으시는 아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참아주시고 품어주시고 만져주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초월적인 하나님과 아빠이신 하나님, 어찌 보면 전혀 상반되는 모습이지만, 이러한 분이 바로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아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무섭습니다. 솔직하지 못합니다.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을 달래는 그런 기도를 합니다.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빠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하면서 죄를 가볍게 여기고 이런 저런 이유로 자기합리화와 변명을 해대면서 불순종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도 거룩하신 하나님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죽은 신도 아니고 무능한 신도 아닙니다. 능히 우리를 구원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벌레 취급하면서 뚝 떨어져 있으면서 나 몰라라 하는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으며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최고로 좋으신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최고의 경배를 드리십시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정직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우리의 아빠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정직한 기도를 원하십시다. 그분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맛보십시오.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기도에서 구체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합당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죄인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교인들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교인들과 교회를 통해, 예배와 삶을 통해, 그리고 나의 믿음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돌려질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믿음을 구하고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주장하려고 하고 내가 주인 되려고 하고 내 욕심대로 살려고 하는 자아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따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여 따를 수 있는 영적 분별력과 순종의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일이나 성공, 물질이 나의 삶을 지탱해주고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을 늘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맘모니즘을 거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자족하고 청빈할 수 있고, 물질의 욕심에서 벗어나 물질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고 나누어줄 수 있는 삶, 물질관에 있어서도 거듭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특히 돈은 하나님만큼의 힘이 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야 합니다. 지금도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보다는 복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와 분노, 서운함과 미움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으로 씻어주시고 채워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힘입어 나도 용서하는 사람 되게 해달라고 구해야합니다. 용서의 가치를 알지만 실제로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구하시고 그 용서에 힘입어 나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인간관계에서, 세상에서 용서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련을 당했을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그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달라고 구해야 하고, 그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힘, 멀리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악한 자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주위에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 기도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이고 소망이고 삶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영원이란 개념이 사실 없습니다. 백년도 제대로 못사는 존재가 영원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진화론에서 우주의 기원을 말할 때 주장하는 이론이 빅뱅이론입니다. 대략 150억 년 전에 빅뱅이 일어났고 그래서 우주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질문합니다. 그럼 빅뱅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답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무(無)입니다.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간에게는 영원이란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시작한 진화론의 끝은 결국 무입니다. 아무 것도 대답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유한하기 때문에 영원이란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눈앞에 있는 것에 끌려 다닙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다인양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 끌려 다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뛰어넘는 영원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왜 낙심하고 왜 좌절하고 왜 두려워하고 왜 욕심에 끌려 다닙니까? 영원을 바라볼 수 있으면 현실의 문제는 별거 아닙니다. 능히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사십시오.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기도하십시오. 영원하다는 말은 변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고 소망하는 가운데 기도하고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보면 자기중심입니다. 기도는 하는데 많은 경우 자기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나라, 자신의 권세-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경우, 자신의 영광을 구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중심을 보면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기도는 가치관과 삶을 반영합니다.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바꾸십시오. 자기중심의 기도에서 하나님 중심의 기도로 바꾸십시오. 내 나라, 내 권세, 내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로 바꾸십시오. 삶 역시 자기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꾸십시오. 기도가 바꿔야합니다. 기도가 바뀌어야 삶이 바뀝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은 서약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께 구하는 청원이지만 동시에 서약입니다. 하나님께 청원한대로 실제적으로 살아가겠다는 서약이고 다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면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를 부인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자기부인과 나눔, 이웃사랑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용서와 비슷하게 쓰이는 말이 용납인데, 저는 어떤 면에서는 용납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용납은 쉽게 말하면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죄지은 사람 받아들이는 용서도 용납이지만,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납입니다. 용납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 아닐까요? 여전히 심각하고 남아공 월드컵 때도 문제가 되었던 인종 차별, 우리나라의 경우 전라도와 경상도, 보수와 진보. 이것은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 용납의 문제입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싫다는 겁니다. 교회까지도 그런 데가 있어요. 정말 심각하게 회개하고 회개할 일입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해요. 용납이 중요합니다. 용서가 필요하다면 용서해야 해요. 용납도 안하고 용서도 안하는데 무슨 사랑을 말합니까? 울리는 꽹과리지.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으면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힘들고 외롭다고 자살할 생각하지 말고 이겨내는 겁니다. 유혹의 상황에서 실제로 멀리하고 거부하고 죄짓지 않는 겁니다. 주위에 그런 사람 있으면 같이 하지 말고 그 사람 유혹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한 것처럼 실제로도 악을 따르지 않는 겁니다.
주기도문이 청원이면서 동시에 서약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제자도의 삶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관념적이고 소극적인 경건주의입니다. 신앙을 그저 관념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에서만 찾는 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경건하다고 하면 대번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술 담배 안하고 제사 안지내고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하고 교회 봉사하는 것, 이러한 것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러면 대개 믿음이 좋다, 경건하다 그렇게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면 정말 경건하고 믿음이 좋은 것일까요?
한국 교회는 복음이 전래된 시기의 사회적인 상황이 많이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구한말에 조선 사회는 술과 담배, 축첩과 도박으로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정하게 된 것이 바로 금주, 금연, 축첩금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잘했다고 생각도 듭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술 문화를 보면 엉망인데, 그마나 선교사들이 금주 금연을 강조해서 그마나 나아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이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술 담배 안하고 제사 안지내면 경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다 덧붙이면 주일성수와 십일조입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계명으로 주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 담배 안하고 제사 안지내고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하는 것으로 신앙 좋다고, 경건하다고, 하나님의 백성의 삶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럴까요? 아닙니다. 만일 이것을 경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바리새적인 소극적인 경건주의에 불과합니다. 바리새적인 소극적인 경건주의가 무엇입니까? 먹는 것과 손 씻는 것과 그릇을 씻는 것으로 경건을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정결한 음식 먹고 손 씻고 그릇을 씻고 안식일에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나는 안식일 지키네 하면 그것이 경건입니까?
우리나라로 하면 술 담배 안하고 제사 안지내고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면 그것이 바로 경건입니까? 그럼 천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오천만 전 국민이 술 담배 안하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임할까요? 건강해지고 깨끗해지긴 하겠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샬롬이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술 담배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하라고 권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하면 절제하는 것이 좋아요.
요는 이것입니다. 그런 소극적인 경건주의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인 제자도의 삶을 살라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건의 척도는 사랑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얼마나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정말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도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웃 사랑은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도와 실제적으로 이웃을 돕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용납하고 용서하고 나누고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삶에 있어서도 거룩의 삶을 사는 겁니다. 유혹의 상황에서 미적거리지 않고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뉴스를 통해 보신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어느 국회의원이 술자리에서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여학생에게 성희롱 발언을 해서 문제가 되고 결국 당에서 제명을 당했는데, 그 국회의원이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 집사라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꼭 그런 것들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5.18 광주학살의 주범 중에 하나인 장세동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교회 집사이고, 교도소에서 그를 보면 늘 성경을 읽고 굉장히 경건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경건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도 없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더러운 것인지, 죄인지 모른다는 겁니까? 알지요. 아는데도 따라간다는 것이죠. 그래도 교회에서는 집사이고 장로라는 겁니다. 믿음 좋다고 경건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무엇이 경건입니까? 그저 술 담배 안하고 제사 안지내고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고 교회 봉사하고 집사, 권사, 장로 직분 받으면 그것이 믿음 좋고 경건하다는 근거가 됩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자기 부인의 삶을 살고 세상에서, 직장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정직과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 물질에 대한 맘모니즘을 거부하고 자족과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용납하고 용서하고 죄의 유혹을 거절하는 가운데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없다면 그러한 것들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책망하셨던 바리새적인 소극적인 경건주의일 뿐입니다. 경건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지요.
제가 늘 가는 복사가게에 가면 복사기마다 쓰여 있는 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쓰여 있는데, 로 요드임 로 메짤(레)밈(לא יודעים לא מצלמים)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모르면 복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모르면 할 수 없습니다. 모르면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동적인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행함을 전제로 하고 항상 행함과 같이 갑니다. 그래서 행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시죠? "내가 너를 안다." 그래서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내가 너를 붙들고 도와주고 인도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고 했을 때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사랑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알기에 행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알기에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진정한 앎을 줍니다. 빵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앎입니다. 자기부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입니다. 물질에 대해서 용서에 대해서 시련과 유혹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분명한 앎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매우 간결하고 분명한 이유는 다른 것 아닙니다. 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잘 깨닫고 잘 알고 잘 기억하면서 그렇게 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아는 자답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실제적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로 요드임 로 하임(לא יודעים לא חיים), 알지 못하면 살지도 못합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앎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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