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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2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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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2010년 8월 14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6:24-32
어떤 남자가 어두운 밤에 가파른 산길을 가다가 그만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는 순간 “하나님, 살려주세요!”하고 외쳤다.
순간 손에 나뭇가지가 잡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점차 흐르자 힘들어져 손을 놓칠 지경이 되었다. 기도했다.
“하나님, 한 번 더 도와주세요!”
그러자 응답의 소리가 들렸다. “도와 줄테니 먼저 네 손을 놓아라.”
이 남자가 어떻게 했을까?
“아 참, 그것 말고요. 위에서 밧줄을 내려주시던가 해주세요.”하면서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을 생각을 안했다. 그러다 결국 떨어졌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살았다. 바로 2미터 아래에 땅이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가? 그것이 당신의 삶에서 정말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저 교회에서만 고백되는 믿음인지 실제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고 실천되는 믿음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내 삶을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오늘 본문은 재물과 염려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다. 아주 유명한 말씀이다. 그 핵심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너무나 관념적이고 내면적이고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믿음을 실제적인 문제 앞으로 끌어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는 부분이 바로 본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이 부분은 지난주에도 그랬고 산상수훈을 강해하면서 자주 강조했던 내용이다. 24절은 앞의 19-23절을 받고 있다.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24절 역시 너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한 사람이, 즉 한 사람의 종이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드물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 생길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기게’된다는 것이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한다’는 말은 유대인들의 표현방법인데, 일종의 관용어이다. 온전한 헌신과 부분적인 헌신을 구분지어 말할 때 쓰는 관용어다. 즉,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경우 이런 경우가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종이 해야할 의무는 주인에 대한 온전한 충성과 헌신인데, 두 주인을 섬길 경우 이러한 온전한 헌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두 주인이 누구인가?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재물로 번역한 단어가 ‘맘몬’이다. 재물의 신으로 쉽게 말하면 돈이다. 하나님과 맘몬, 돈이 두 주인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돈을 주인의 자리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비교 대상이 안 되는데 이렇게 두 주인의 자리에 놓고 비교하는 이유는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 믿음의 연수와 깊이가 어느 정도냐는 둘째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내 마음과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으로 바뀐 사람들이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 바로 그 의미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 즉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가가 문제이긴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이러한 인식이 있고 나름대로 그러한 고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우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돈이 우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만큼 돈이 가지고 있는 힘이 강력하다는 것이고, 우리의 본성이 돈의 마력에 너무나 쉽게 끌려간다는 것이다.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의 주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삶에서는 여전히 돈이 나의 주인 자리를 턱하니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좀 솔직해지자.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름대로 다짐을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기준은 돈인 경우가 많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고 선행을 하기를 원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더 자비롭고 자족하는 사람이 돼야지 마음먹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사야할 것이 너무 많다.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 보다는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더 일을 하고 부업까지 한다.
누가 그러더라.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께는 주일날 한 시간만을 드리고 있고, 맘몬에게는 그 나머지를 다 바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돈이 우리의 실제적인 주인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실제적인 삶에서는 돈이 나의 주인행세를 하고 돈이 나의 결정과 판단의 기준이 되고 영향력이 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하지 못한다.
돈뿐만 아니다. 돈은 가장 강력한 대표일 뿐이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이 나의 마음과 생각과 실제적인 삶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나의 결정과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되고 영향력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다 드리는 온전한 헌신을 절대 할 수 없다. 아무리 수십 년을 믿고 직분을 받고 겉으로는 경건해 보여도 하나님이 실제적인 나의 삶에서 주인이 되지 않는 한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은 드릴 수 없다.
우리 솔직해지자. 아닌 척 하지 말자. 자신을 속이지 말라. 그건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 실제적인 삶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말은 하는데 실제적인 나의 욕구와 결정과 삶은 그렇지 못한 나를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자. 제발 아닌 척, 믿음 있는 척, 경건한 척 하지 말자.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묻자. 도대체 누가 나의 주인인가? 누가 실제적으로 나의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가? 무엇이 나의 생각과 결정과 판단을 좌우하며 나의 행동을 이끌고 있는가? 나의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질문하고 답해보자.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이 솔직하고 조금은 힘든 질문이 있어야 한다. 자주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 하나님 아닌 다른 것, 돈이 주인 되거나 나 자신이 주인 되거나 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신앙의 연수가 늘어나고 집사, 권사, 장로가 되어도, 심지어 선교사가 되고 목회자가 되어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갈멜산에 가면 무크라카라고 불리는 엘리야 기념 수도원이 있다. 성지순례의 코스 중 하나인데,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한바탕 싸움을 한 곳이다. 그때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자리에 오게 하는데,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묻는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왕상 18:21)
이 당시의 북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엘리야의 이 말이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이 둘은 하나님과 바알이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다. 비를 내려주는 신으로 풍요의 신이고 물질의 신이고 동시의 음란의 신이다.
바알은 가나안의 신들 중에 폭풍의 신으로 비를 내려주는데, 바알이 비를 내려주기 위해서는 하나의 의식이 필요했다. 바로 바알의 부인에 해당하는 아세라와의 합방이다. 둘이 잠자리를 같이 해야 비가 온다는 것이다.
이곳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지역이다. 9월 말에서 10월에 있는 수콧, 초막절에 이른 비가 내려야 하고 봄 유월절 때쯤 늦은 비가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 기간에 적절하게 비가 내려야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고 일 년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런데 비가 안 온다. 가뭄이 들었다. 이것은 지금 바알과 아세라가 사이가 안좋아서 합방을 안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냥 합방할리는 없고 이 둘이 합방을 하도록 자극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바알이나 아세라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들이 집단으로 성교를 하고,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인 자극을 받아서 합방을 하게 되고 그래서 비가 내리게 한다는 것이 바알을 섬기는 자들의 행위이다.
그러니 얼마나 음란한가? 그저 풍요에만 집착하고 소유에 대한 탐욕과 성적인 음란함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 의식이다.
문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따랐다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 족속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이다.
왜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진멸하라고 했는가? 왜 이들과 결혼하지 말고 이들을 멀리하라고 하셨는가? 이 때문이다. 너무나도 음란하고 탐욕적이고 죄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게다가 원래 유목민이었다. 농사를 짓는 법을 잘 몰랐다. 그래서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들이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기웃거린다. 그러다가 보니까 바알과 아세라가 비를 내려준다며 그런 음란한 제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들 안에 있는 탐욕과 음란함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그들도 바알과 아세라 제의에 참여를 하고 심지어 이스라엘 땅 안에 바알과 아세라 산당을 세우면서 그런 짓거리를 행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다 버린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실제적으로는 바알과 아세라가 그들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거짓되고 음란한 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탐욕을 하나님으로 만들어 따르는 우상숭배요 간음한 자들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엘리야가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이에 대한 백성들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렇게 이어진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지금 엘리야는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는데 백성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왜? 왜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는가? 유구무언,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너무 죄송스러워서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엘리야가 촉구하는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마음이 하나님 아닌 바알에게 빼앗겨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 빼앗겨 있어서 엘리야가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선택하라는 촉구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 하나님을 주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두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야 때만 그랬나? 아니다. 이후에도 그랬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종교 개혁이 일어날 때도 그랬고, 안타깝게도 오늘날도 이런 모습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위기가 이것 아닌가?
언제나 영적인 위기는 이렇게 찾아왔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따라야 할 이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이 실제적인 주인노릇을 할 때였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탐욕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음란함이든 무엇이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이 주인노릇을 할 때 영적인 위기가 왔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교회 다니니까, 주일에 예배드리니까, 나름대로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고 봉사도 하니까 괜찮겠지 하는 영적 안일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이 나의 주인노릇을 할 때 위기가 온다. 아니 그 자체가 위기다. 내 영혼과 삶에 위기다. 경제적으로 파산이 나고 건강의 문제가 와야지만 위기가 아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이 나의 주인 노릇할 때가 위기인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 아니다. 하나님만을 너의 주인으로 삼고 그분을 따르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주인이고 돈이나 다른 것도 주인인 그런 두 마음을 품는 것 이제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고 그분만을 실제적인 주인으로 삼아 따르고 온전한 헌신을 하라는 것이다.
내가 주인 삼고 있는 것들 다 내려놓으라.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나의 마음을 두기로 결정하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라. 나의 생각과 판단과 결정과 행동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게 하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두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두어서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따르기를 축복한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말씀, 즉‘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비 콕스라는 사람이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데, 신학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세속도시’, ‘바보제’, ‘영성, 음악, 여성’이라는 책들로 유명한 분이다. 하비 콕스가 하버드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예수님에 대해 가르쳤을 때의 내용과 경험을 토대로 쓴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바로 이 말씀이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하비 콕스의 표현에 따르면 이 말씀은 가장 서정적이고 가장 잘 알려지고 그리고 가장 화나게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니? 들의 백합화(이건 우리가 아는 백합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꽃으로 칼라닛, 아네모네와 같은 들꽃들을 말한다)를 말하는데, 들의 백합화가 솔로몬의 영화보다 낫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백합꽃은 취업 면접에서 잘 보이려고 할 필요도 없고, 친구들과 시내를 갈 때 요즘 유행이 뭔지를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요즘 미국의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의 경우 ‘무엇을 입을까’의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일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이 유행에 맞게 입는 것일까, 너무 튀지는 않나? 이렇게 입어야 하나,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내가 입는 것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누구와 어울려 다니는지 등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문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말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먹고 마시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사는 자신들의 경우도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의 문제는 꽤나 신경 쓰이는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먹으려 하는 것이 자신들의 몸에 군살을 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끊임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콜라를 주문해도 다이어트 코크를 주문해야 하고 먹을 때도 칼로리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인가? 아니다.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는 그 앞의 전제가 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의 문제이고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의 문제다. 즉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생존 자체에 대한 문제이다.
예수님 당시의 일반 서민들에게 이 문제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앞에서 말한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정말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의 문제였고 몸을 위해서 무엇을 입을까의 문제였다. 생존 자체가 그리 만만치 않았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여기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염려와 집착이다. 생존은 필연적으로 문제꺼리, 염려꺼리가 생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에게도 문제꺼리, 염려꺼리는 생긴다. 예외는 없다. 그것이 정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생존 자체에 대한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취업의 문제, 진로의 문제, 건강의 문제, 가족의 문제, 관계의 문제이든 생존은 필연적으로 문제꺼리, 염려꺼리가 생긴다. 그럴 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문제꺼리, 염려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문제는 염려하고 집착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먼저 염려를 보자. 문제꺼리가 생겼다. 염려꺼리가 생겼다. 이것과 실제로 염려하고 염려에 사로잡히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단순히 염려하는 것이 아무 해결도 되지 않아서일까? 그것은 염려가 가지고 있는 독성 때문이다.
염려의 원어적인 의미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두 가지 의미를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마음을 분열시키다, 어수선하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염려는 마음을 분열시킨다. 그렇지 않은가? 염려의 가장 큰 독성은 우리의 마음을 분열시키고 어수선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그 마음을 두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염려의 독성을 안개에 비유할 수 있는데, 어느 지역을 30미터 두께로 덮을 수 있는 안개를 물로 담으면 얼마쯤 되는지 아는가? 고작 물 한 컵이다. 한 컵의 물이 600억 개의 물방울로 변하면 안개가 된다. 물 한 컵은 별거 아니다. 그러나 그 물이 600억 개의 물방울이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앞이 안 보인다. 안보이니 어수선해지고 마음이 불안하다, 답답하다, 길을 찾지 못한다.
염려가 딱 이렇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니다. 염려 생길 수 있다. 염려꺼리가 있는데. 염려가 생길 수는 있지만 그냥 놔두고 계속 염려하다보면 그것이 안개가 되어버려서 내 내면을 덮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앞이 안 보인다. 하나님도 안보이고 하나님의 뜻도 안보이고 응답의 손길로 안 보인다. 안절부절, 어수선하고, 길도 못 찾겠고, 망할 것 같고 죽을 것 같다. 그러니 어찌 그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점집 가고, 사람 줄 잡고 세상 줄 잡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염려가 가지고 있는 독성이다.
염려는 또한‘목을 조인다’는 뜻을 갖고 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면 정말 목이 조여 있다. 그러니 제대로 숨을 못 쉰다. 그러다 간신히 숨을 쉬면 나오는 말이 ‘아이구’다.
염려에 사로잡히면 목이 조여진다. 내 생각의 목이 조여지고 판단의 목이 조여진다. 내 마음의 목이 조여진다. 내 영혼의 목이 조여진다. 목이 조여지는데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어찌 하나님께 온전히 내 마음을 두고 따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 목을 풀어줄 수 있나 저것이 풀어줄 수 있나 하면서 기웃거리고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염려를 가볍게 보지 말라. 염려가 가지고 있는 독성은 치명적이다. 괜히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염려하는 대신 어떻게 하라?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 생존에 관한 부분들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전에 누구에게서 들은 말이다. 어느 모임에서 그런 질문이 있었단다. ‘하나님이 무섭나 사람이 무섭나’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말이 대뜸 나왔단다. ‘사람이 더 무섭죠.’ 그 말을 듣고 참 솔직한 대답이다 생각을 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대답이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질문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이 말의 의미를 아는가? 이 두려움은 단순한 무서움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정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고백이고 믿음이고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어도 하나님보다 세상이나 사람을 더 두려워하지 않는다.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만 두려워해라. 세상이 두려운 것 아니고 사람이 두려운 것 아니다. 세상이 두렵지 않으면 염려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내 이야기-교회 부임 전, 청빙 제의를 받고나서... 가장 큰 문제는 생활이었다... 결혼 전세금 가지고 왔고 그것도 얼마 못 가 성지순례 안내로 생활하던 시절... 나나 우리 부부야 굶으면 굶는 것... 문제는 아이들... 아무 것도 없었다... 절벽 끝에 선 느낌... 눈을 뜨면 슬며시 염려가 찾아오고... 눈을 감으면 목회에 대한 구상이 들고...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다는 확신... 믿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안 죽고 잘 살고 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늘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그분의 자비로운 섭리에 따라 다루신다는 사실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염려에서 자유한 사람 되기를 축복한다.
셋째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룰 것인데,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점은 다른 것 아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하비 콕스 교수의 이야기를 했는데,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말을 듣고 학생들 중에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있었던다. ‘정말 근심 걱정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든 것 다 던져버리고 마음껏 스키를 즐기거나 남부 유럽을 마음껏 여행했으면 하는 부러움을 가지더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 걱정 근심, 염려가 없는 상황을 만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 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의복의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는 생존에 필요한 것들로 기본적인 것인데 그러고 나서는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정말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의복의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의 관심이 달라질까? 생각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 문제가 삶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이다. 여기서 그리 벗어나질 못한다. 더 벌어야 한다. 더 가져야 한다. 더 올라가야 한다. 더 높아져야 한다. 결국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문제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더 집착하게 된다. 이 집착이 문제라는 것이다. 염려하는 것도 문제지만 삶에 대한 집착 역시 문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이다. 삶이란 단순히 생계를 이어가는 것 이상의 것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하는 문제가 기본적인 문제지만 오직 그것에만 가치를 두고 거기에 집착해서 온갖 관심과 노력과 정력을 쏟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생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와 의가 우리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다. 단순히 평생을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만 집중하고 그것에 모든 관심과 정력과 노력을 쏟다가 가는 허무한 인생으로 우리를 만드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인생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라는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이 정말 의미 있고 풍요하고 열매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첫째 내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둘째로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세상과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셋째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축복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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