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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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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영혼의 병
2010년 9월 4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7:1-6
오늘날의 사회를 말하는 데에 있어 인터넷을 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터넷 없이는 살기 어려운 세상처럼 되고 말았는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은 참 유용한 도구이다.
그런데 문제도 참 많다. 그 문제 중에 하나가 악플일 것이다. 악성 댓글을 말한다. 악플은 인터넷이 시작되면서부터 같이 시작된 것인데, 비판적인 시각을 빙자해서 인신공격성 비난과 욕설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래서 사이버폭력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안티를 위한 안티도 매우 많다. 정말 어떤 문제가 있어서 안티가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싫다는 것이다. 그냥 싫기 때문에 공격 대상이 되고 악플을 서슴없이 단다.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을 이용해서 그러한 짓들을 하는데, 이 악플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의 병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 영혼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다. 인터넷을 제 2의 사회라고까지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영혼의 병은 매우 심각하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병이 신앙공동체에도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경우 그러하다.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경우가 많고,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들의 가정과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병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부정적이고 공격적이고 무책임한 비난의 말이 오가고 인신공격성 비난과 험담이 오간다. 그래서 관계에 상처를 받거나 깨어지고 공동체가 병드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나는 그런 일의 피해를 겪어봤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겠으나 어느 한 사람의 무책임한 말 한마디에 좋았던 관계가 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매우 큰 상처를 입었던 적이 있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경우가 없는가? 그런 피해를 입었거나 반대로 그런 피해를 주었던 경우는 없었는가? 이런 경우가 없으면 좋겠으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부정적이고 공격적이고 무책임한 비난이 수도 없이 일어나고 인신공격성 비난과 험담들을 즐겨하는 우리의 고약함이 있다. 그것이 그저 말로만 끝나면 별 것 아니겠으나 그로 인해 사람들이 상처받고 관계가 깨어지고 공동체가 큰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혹시라도 우리에게 그런 모습이 없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 나에게도 이런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이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면서 말씀을 듣기를 바란다.
사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주신 처방전이시다. 사람의 영혼에 큰 상처를 주고 관계를 깨뜨리고 신앙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영혼의 병에 대한 처방전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교만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다. 이 시간 겸손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께 주신 처방전을 듣고 그래서 치유되는 은혜가 임하길 바란다.
주님께서 주신 첫 번째 처방전은 나는 의로운 재판관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1절을 보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 말씀을 언뜻 보면 그 어떠한 비판도 하지 말라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니 참 어렵다. 정말 우리가 살면서 그 어떠한 비판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불가능할뿐더러 모든 비판이 악한 것은 아니다. 어떤 비판은 약이 되기도 하고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비판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즉 이 말씀은 모든 비판을 금지하신 것이 아니다. 때로는 비판이 필요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에게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식하는 가운데 분별력 있는 비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 성경에는 비판으로 되어 있으나 좀 더 정확하게 읽으면 심판이다. 재판이다. 내가 마치 재판관이 되어서 너는 유죄! 하는 그런 식의 비판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재판관이란 말은 나는 의롭고 너는 불의하고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내가 의로운 재판관이 된다. 내가 의로운 재판관이 되어서 사람들을 마구 판단하고 정죄하고 공격하는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나는 재판관도 아니고 게다가 의로운 재판관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을 심판하실 수 있는 의로운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다.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앞부분의 우리가 비판을 받게 하는, 즉 우리를 심판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심판하실 수 있는 의로운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이것은 세상의 법정이나 재판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인의 인간관계에서, 신앙공동체에서 나 자신이 의로운 재판관 노릇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죄인이 죄인을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관이 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는 죄다.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헤아리실 것이라는 말씀인데, 이는 우리가 마치 의로운 재판관인양 함부로 형제자매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상처주고 험담하고 공격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결코 가볍게 다루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들이었다.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어마어마한 빚을 하나님께 진 자들이다. 그것이 죄의 무게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조건으로 값없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삭감해주셨다.
그런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들을 마치 자신이 의로운 재판관인양 심판하고 정죄하고 공격을 하고 상처를 준다면 그것을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결코 가볍게 다루시지 않으실 것이고, 그 책임을 물으신다는 말씀이다.
기억하라. 나는 의로운 재판관이 아니다. 다른 형제자매들을 부당하고 무책임하고 공격적인 자세로 심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 나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일뿐 결코 의로운 재판관이 아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는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과 자신이 다 모른다는 무지의 겸손이다.
3절을 보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자기가 마치 의로운 재판관인양 다른 사람들을 마구 심판하고 정죄하고 공격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눈 속에 들보가 있는 자가 자신의 그런 모습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티만 보고 심판하는 자로 규정을 하신다.
즉 이 말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전에 누구를 먼저 살펴보라는 것인가? 먼저 자신을 살펴보라는 말씀이다. 다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보았을 때 그것을 가지고 심판하고 공격하고 정죄하지 말고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런 실수를 하진 않았었는지, 지금 그런 비슷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4-5절을 보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물론 당시 목수라는 직업이 단순히 목수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건축일도 하는 일종의 건축기술자의 의미지만, 주 작업은 목재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티는 목재로 작업을 할 때 생기는 톱밥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목수 둘이 일을 하다가 그만 톱밥이 눈에 들어갔다.
그것을 빼야하는데, 그 상대가 어떻다? 들보가 그 눈 속에 있는 사람이다. 이 들보는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 서민들의 집을 지을 때 쓰는 나무 기둥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영어 번역 성경 중에는 나무판자로 해석한 경우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것이 눈 속에 들어가 있다. 그것이 진짜로 눈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고, 이것은 비유인데 무엇을 말하는가?
눈이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자신의 죄와 허물과 거짓과 위선이라는 들보로 그 눈이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눈이 가려져 있으면 그만큼 보기가 어렵다. 잘 안 보인다. 잘 안보니까 무엇만 보이는가? 상대방의 눈에 있는 톱밥, 티다.
아는가? 상대방을 다 못 보면 한 가지만 잘 보이게 된다. 어떤 것? 상대방의 실수, 상대방의 잘못, 상대방의 결점이다. 그것도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그것만 보인다. 그러니 어떻게 되는가? 그것 가지고 안달이다. 그 톱밥 눈에서 빼내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고 공격하고 정죄한다.
아는가? 상대방을 많이 알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그것이 잘 안보이게 된다.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
내게 그런 경우가 있었다. 교회를 맡기 전에 성지순례 안내를 했었다. 순례객들의 여행 가방을 버스에 실어야 하는 일이 있는데, 대개 호텔 벨보이들이 하고 그들에게 팁을 준다. 그런데 한국 성지 순례객들은 그런 것이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대개 본인들이 하거나 가이드나 버스기사가 도와주길 바란다. 사실 이것을 가이드나 버스기사가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도 했고 버스 기사도 그리했다. 섬김이라고 생각하고 말이다. 나와 함께 일했던 기사들이 대부분 가방 실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한번은 다른 기사와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 친구가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다. 덩치는 나보다도 좋은데 도무지 도와주질 않는다. 다음에 또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 여전히 하질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나서 왜 가방 싣는 것을 도와주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렇게 해도 한국팀들이 팁을 적게 주어서 그러냐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대꾸도 없이 불만스런 표정을 짓더니 그냥 차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때 기분이 참 상했는데, 그날 저녁 식사 하는데 나보고 자기 방으로 오란다. 나도 감정이 상해서 할 말도 있고 해서 갔다. 그런데 보자마자 윗도리를 벗는 것이다. 이 친구가 뭐하는 짓인가 했더니 가슴부터 배꼽 아래까지 수술 자국이 있는 것이었다. 허리 쪽에도 있었다.
아차 싶었다. 왜 이 친구가 승객들 가방 실어주는 것을 못 도와주는지 알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큰 이유는 수술로 인해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이 무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 깨달은 것은 나는 상대방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다 모르는데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판단하고 기분 상해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렇지 않은가?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알면 이해가 된다. 물론 다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 그 이후로 나는 한 번 더 생각하려고 하는 노력을 한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하는 생각을 하면서 성급히 판단하고 결정짓지 않는 태도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자는 것이고 한 번 더 기다려주는 것이다.
기억하자. 나는 상대방에 대해 다 모른다. 다 모르고 다 본 것 아니다. 특히 직접 보지도 않았고 직접 듣지도 않은 것 가지고 흥분하고 판단하지 말라. 많은 경우 그래서 실수를 한다. 나는 상대방에 대해 다 모르고 다 본 것이 아니라는 무지의 겸손을 배우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형제자매를 심판하는 뿌리는 교만이다. 나는 너보다 옳다는 것이다. 너보다 낫고 너보다 옳고 더 보다 의롭다는 것이다.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 뿌리는 교만이다. 반대로 나보다 나은 네가 싫다는 것이다. 나보다 잘나고 나보다 옳은 것 같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것 같고 나보다 나은 네가 싫다는 것이다. 열등감이다. 비교의식이다. 열등감과 비교의식은 교만의 다른 이름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 안에 깊게 뿌리 잡혀 있는 교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이 우월감이든 열등감이든, 비교의식이든 그 뿌리는 교만이다. 이는 그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다다는 증거다. 그 영혼에 병이 있다는 증거다. 그 영혼이 건강한 사람,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은 이렇지 않다. 자기 우월감이나 자기 열등감에 사로잡혀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정죄하지 않는다.
만일 여러분들이 누군가에 대해 큰 이유 없이 무시하거나 질투하거나 판단하거나 험담을 한다거나 공격한다면 그것은 아직 여러분의 영혼에 병이 있다는 증거다.
왜 무시하는가? 하나님이 온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영혼을 내가 누구기에 무시하는가? 왜 비교하고 불평하고 질투하고 험담하고 화가 나는가? 하나님은 나 역시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기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합당한 많은 은혜를 주셨다. 왜 함부로 판단하고 험담하고 공격하는가? 내가 의로운 재판관인가?
이것은 다른 것 아니다. 지금 내 영혼의 병이 있다는 증거다.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만일 형제자매에 대해 그런 마음이 들고 그런 경험이 있던가 그러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내 영혼에 병이 있다는 증거이고 그 병이 다 치유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볼 줄 알고 깨닫는 자는 형제자매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관의 자리에서 내려와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세 번째는 관계가 우선이고 공동체가 우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개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3-5절에서 ‘형제’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이는 신앙공동체에 대해서 하신 가르침이다.
즉 예수님의 관심은 신앙공동체며,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멤버들의 관계라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되시는 신앙공동체다. 예수님의 뜻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이해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섬기면서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사랑과 믿음과 소망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뜻을 깨뜨리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형제자매를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험담하고 공격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관계는 말로 시작한다. 말을 나눔으로써 관계는 시작하고 발전하고 성숙한다. 동시에 말로 인해서 관계는 금이 가고 상처받고 파괴되고 만다. 그만큼 말의 중요성은 크다.
우리는 말에 있어서 성숙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자주 실수를 하고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말에서도 거듭나야 한다. 변화되어야 하고 성숙해져야 한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주의하고 노력해야 한다. 비판보다는 격려의 말을 하라. 근거 없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말을 하지 말라. 남을 깎아 내리고 무시하는 말을 하지 말라. 험담을 하지도 말고 귀담아 듣지도 말라. 특히 제 삼자의 말을 듣고 판단하는 일을 삼가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사람이 아닌 문제에 초점을 맞추라. 우리 대부분의 잘못된 태도 중에 하나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초점을 문제보다는 사람에 맞춘다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를 공격하기 보다는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 사람이 아닌 문제에 초점을 맞추라.
그리고 관계를 우선시하고 공동체를 우선시하라. 우리 공동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왜? 우리가 성인군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 구원받은 죄인일 뿐이다. 여전히 죄성이 있고 많은 허물과 결점과 모순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차이들과 우리 자신의 문제들로 인해 갈등이 생길 수 있고 마음이 어려워질 수도 있고 관계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차이보다 관계가 우선이고 문제보다 공동체가 우선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높이고 우선순위다. 하나님은 우리의 차이를 아신다. 우리의 문제도 아신다. 서로 다르고 많은 문제와 모순을 갖고 있는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공동체, 사랑공동체, 소망공동체를 세우길 원하신다.
기억하라. 관계가 우선이고 공동체가 우선이다. 부부가 다르다고 이혼할 것인가?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파괴이고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파괴일 뿐이다. 힘들어도 차이를 인정하고 관계를 우선시해야 한다.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지만 공동체를 우선시해야 한다. 거기에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무책임한 비판은 삼가라. 교회 역시 문제가 있다.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에 속한 나 자신이 완벽하지 않은데 어찌 완벽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비판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책임한 비판은 삼가라. 마치 그 교회 교인이 아닌 것처럼 비판하는 태도를 삼가라.
그 교회의 멤버는 무책임한 비판을 하지 않는다. 교회의 멤버는 분별력 있고 책임감 있는 태도로 문제를 보고 그 문제를 가지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사랑의 섬김과 수고를 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분별력 있고 책임감 있는 멤버들이 되길 바란다. 우리 교회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에 여러분들이 있는 연수는 그리 길지 않다. 몇 개월에서 몇 년이다. 그 기간 동안 잠시 머무는 교인이 아니라 성지에 세워진 이 교회를 섬기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더욱 든든히 세울 수 있는 분별력 있고 책임감 있는 멤버들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스라엘을 떠나 한국이나 다른 곳에서 섬길 교회에서도 그런 모습으로 섬기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처방전은 하나님의 은혜다. 지금까지 본문을 토대로 세 가지 처방전을 정리했으나 이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죄성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꿈틀대고,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우월감과 열등감이라는 교만도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고, 자꾸만 내가 의로운 재판관인양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험담하고 공격하는 내 영혼의 병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런 노력들을 해야 하지만 노력만 가지고는 안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나의 심령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야 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고치시고 나를 변화시키시도록 해야 한다.
한국에서 청년들을 지도할 때 형제 한 명이 있었는데,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친구였다. 무엇을 하던 긍정적이질 않다. 특히 교회 일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대해 부정적이고 삐딱했다. 문제는 이 친구가 소그룹 리더였고 임원이라는 것이었다. 리더가 이 모양이나 멤버들 역시 그 영향을 받게 된다. 이것이 늘 나의 고민이었다. 참 똑똑하고 재주도 많은 친구인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것이 문제였다.
하루는 소그룹 리더들과 함께 회의를 했는데, 내가 기도하면서 고민하면서 추진하려고 하는 계획을 말하고 있는데, 대뜸 못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잘못되고 무리한 일을 말한다면 모를까 다른 모든 리더들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일에 대해 그리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 마음이 상해서 회의 도중에 나왔다. 그 자리에서 그 형제를 혼내면 상처가 될 것 같아 그리 했다. 한 30분쯤 후에 와서 내게 용서를 빌었는데, 그랬던 친구가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던 친구가 ‘예, 할 수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할 수 있겠는데요’ 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하는 친구로 변화된 것이다.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예배와 제자훈련을 통해서였다. 내가 늘 강조했던 것은 예배자가 되라는 것이었고 예수 닮은 제자로 성장하라는 것이었다.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한다. 예수 닮은 제자로 성장해야 한다. 제자훈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채우고 고쳐나가는 작업이다. 예배와 제자로서 성장하려고 하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그 형제를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에서 긍정적이고 분별력 있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의 오른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고, 지금은 두 아이의 아버지고 집사인데 지금도 나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교제를 나누고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 심령이 채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면 아래에 내가 있어야 한다. 그 은혜가 내 심령에 채워져 그 은혜를 내 영혼의 병을 고치고 나를 변화시켜 주시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노력들을 하라.
지난 목요일 세상을 떠나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정말 존경하고 한국 교회의 어른이신 분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옥목사님 생전에 하셨던 말씀이다.
“하나님을 가까이서 보는 이들은 자신의 추함을 볼 것이고, 멀리서 보는 이들은 자신의 잘남을 볼 것이다.”
너무나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는 말씀 아닌가? 하나님을 가까이서 보는 이들은 자신의 추함을 볼 것이고, 하나님을 멀리서 보는 이들은 자신의 잘남을 볼 것이다. 이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가까이 가서 하나님을 보라. 그럼 내가 보인다.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게 된다. 그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고치고 나를 새롭게 하고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언제고 멀리서만 있지 말고 이제는 믿음의 발을 떼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의무적으로 습관적으로 무엇을 얻을까 예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는 예배를 드리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 성경 일독도 하고 큐티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 기도의 시간을 가지라. 그리고 순종의 훈련을 하라. 이것 없이 안된다.
일주일 내내 말씀도 없이 기도도 없이 순종도 없이 살다가 주일에 교회에 오면 예배가 될까? 예배도 힘들고 은혜 받기도 쉽지 않다. 예배자가 되고 주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의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사모함이 있어야 하고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고 입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 채워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끝으로 나의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 내가 잘한 고백을 하면 좋겠는데 이틀 전에 잘못한 일이 있어 그것을 이 시간 고백한다. 아내가 내게 어떤 일을 요청을 했는데 아내가 기억하지 못한 무슨 일로 인해 내 마음이 좀 불편해졌다. 그래서 대뜸 한 말이 ‘사모 맞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하고 서재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는데, 내 안에서 들리는 말이 ‘너, 목사 맞냐?’하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주 청년들과 함께 공부했던 내용도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공격하라는 것이었고, 게다가 그날 오전에 읽고 묵상한 말씀이 오늘 이 본문이었다.
그런데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초점을 맞춘 말이 된 것이다. 물론 이유는 있다. 허나 그 말을 들은 아내의 마음이 어땠을까?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어찌나 아내에게 미안하고 주님께 죄송스러운지... 곧 바로 아내에게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용서와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놈이 아직도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덮어주소서. 예수님의 은혜로 나를 채우사 나를 더욱 더 고치시고 성숙해지게 하소서. 이놈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그리 기도했다.
잘한 일도 아니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고백을 하는 이유는 우리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다는 것이고, 그러나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솔직한 고백과 사과이며,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은혜가 나를 주장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고치고 나를 새롭게 하고 나를 성숙하게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리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만날 수 있는 예배와 경건의 시간을 가지라. 말씀을 붙잡고 순종의 훈련을 하라. 이것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포기하지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그 은혜가 여러분을 고치고 새롭게 하고 성숙하게 하고 나를 주장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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