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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민3: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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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3강
민 3:5-13
레위인
97.2.23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모시고 사는 것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어른과 함께 사는 것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른이 집안에 있으면 모든 중심은 어른입니다. 어른을 중심으로 집안이 움직입니다. 음식을 해도 어른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해야 합니다. 어디 놀러를 가고 싶어도 어른의 눈치가 보여서 마음대로 가지를 못합니다. 날마다 어른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고 잘못이 있을 때는 어른의 책망도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모시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혹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어른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면 어른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 간섭 안하고, 해준 대로 먹고, 귀찮게 안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의 삶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을 모시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른을 모시므로 인해서 주어지는 혜택 때문에 모시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맞벌이여서 아이를 맡기기 위해서랄지, 아니면 재산이 많아서 지금 잘 모시면 나중에 재산을 물려받을 때 유리할까봐서 모시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진심으로 어른을 모시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지금 우리 나라의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잘못이 있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책망도 받고,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많은 신자들은 자기를 위한 삶을 버리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자기의 삶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게 잘못됐다, 저게 잘못됐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는 간섭을 싫어합니다. 내 삶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나님은 주는 용돈이나 받고 가만히 있으라는 식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간혹 환경이 나빠지거나 하던 일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하시느냐고 불만과 원망을 터뜨립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되면 입이 벌어지면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떠듭니다.
자식이 부모를 멀리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로부터 왔는가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아니었다면 나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부모를 무시하거나 함께 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은 신자된 내가 누구로부터 온 자인가를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자입니다. 신자는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믿고 싶어져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부름 받지 않았는데 스스로 주님을 믿는자는 없습니다. 물론 스스로 교회에 나온 자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단지 종교인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들 스스로가 그런 자를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판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일은 마지막 때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갈 때 신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 은혜를 모르면서도 신자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너무 무시하고 삽니다. 부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되는 것으로 멸시합니다. 동창회 모임이나 계모임은 절대 빠질 수 없어도 교회는 얼마든지 형편에 따라서 빠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만약 교회에 빠질 때마다 천둥이 친다거나, 집안에 일이 생긴다면 빠질 마음이 나겠습니까? 교회에 빠져도 아무 일이 없으니까 안심하고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교회에 빠질 때마다 무슨 일이 있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자가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에 빠질 때마다 몸이 아프게 한다거나 문제가 생기게 할 때 두려워서 교회에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억지로 나오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직장을 다녀도, 사업을 해도, 교회를 나와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서 움직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선택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부름받을만 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꼭 무엇을 생각하느냐면 하나님은 일꾼을 불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불렀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놓고 그냥 놀고먹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부름 받은 신자로서 할 일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일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위해서 뭔가를 하는 일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꼭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일꾼을 찾습니다. 전도 잘하는 일꾼, 봉사 잘하는 일꾼, 교회일 열심히 하는 일꾼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 일꾼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일꾼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일꾼입니까? 아니면 단지 교회라는 사람들의 단체를 위한 일꾼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목사를 위한 일꾼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일꾼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어디 능력이 없어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꾼을 부르셨겠습니까?
하나님은 교회 부흥을 기대하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구제나 하고 선교나 하라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제발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신자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포도원 품꾼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을 품꾼을 부르신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부를 때 포도원을 위해서 일할 일꾼을 부르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일할 사람을 불렀다면 아침 일찍이 정한 수요만큼 부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5번씩이나 불렀고, 마지막은 일이 다 마칠 시간에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품꾼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나 이런일 저런일 많이 했습니다'는 자랑이겠습니까? 애당초 일을 기대하고 부르신 것이 아니니까 그런 자랑은 주인의 마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가장 잘 안다면 놀고 있는 자기를 불러준 주인의 긍휼과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일을 내세우게 되면 먼저 부름 받은 품꾼같이 부름 받은 긍휼과 은혜는 무시해 버리고 자신의 일의 양을 내세우며 그만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가 왜 부름을 받았는가를 잘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레위인을 택한 이야기입니다. 7절에 보면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 하되"라고 말합니다. 레위인은 아론의 제사장 일도 담당하며 또한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즉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해야 할 일은 레위인이 특별히 뽑혀 나와서 대신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레위인을 바라보고 그 레위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했던 것입니다. 즉 레위인이 희생하고 섬기는 그 모습이 바로 자기들이 희생하고 섬겨야 할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앞에 레위인을 세워 놓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레위인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레위인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희생을 배우고 섬김을 배우는 것입니다. 결국 레위인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기준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정상적이지 못한 모습을 깨달아라고 우리 앞에 정상적인 모습을 가진 한 분을 세워놓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앞에 완전한 제사장, 레위인으로 서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의 희생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의 섬김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당장 반발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같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삽니까?' 예, 맞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것을 기대하고 우리 앞에 예수님을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알아라는 것입니다. 내딴에는 헌신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헌신을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고, 섬긴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섬김을 보니까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남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보니까 내 희생은 그야말로 태양 앞에 반딧불보다 더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라면 뭔가 했다고 해서 교만한 것이 아니라 좀더 주님의 마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12,13절에 보면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이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있었던 마지막 재앙은 장자 재앙입니다. 모든 처음난 것은 다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만은 죽음을 면했습니다. 어린양이 죽음을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린양이 대신해서 살아난 자를 가리켜서 처음난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양을 레위인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을 레위인이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레위인의 희생 때문에 생명을 얻은 자, 그자를 처음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처음난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생명을 얻을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부름 받은 것이 귀한 이유는 마지막 때 살아나는 처음난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안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희생, 섬김이 나를 살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자기를 대신해서 희생하는 어린양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는 레위인을 뽑아서 어린양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누구를 들어서 어린양의 자리를 대신합니까? 그자가 바로 부름 받은 자입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을 부르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양의 자리, 즉 십자가의 자리에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양의 희생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나님이, 레위인의 희생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이제는 뽑혀 나온 자를 통해서 누군가를 살리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자리에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일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보여주는 십자가의 자리에서 사는 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자가 바로 레위인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레위인을 보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역할을 위해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역할을 감당하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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