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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민6:2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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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8강.
민6:22-27
축복
97.4.6
교회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타락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은 '구별'의 명령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를 철저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서로 섞이고 타협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에도 하나님은 가나안의 모든 거민을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거민의 생활풍습과 사고방식을 따라서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만의 특성이 있는데 그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의 희생을 통해서 만들어낸 거룩한 모임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하다는 것은 이스라엘로 모인 사람들이 뭔가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이스라엘 되게 한 어린양의 피가 거룩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여김 받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구별이었습니다.
레위기 11:44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규례대로 하면 이스라엘은 땅에 기어다니는 것만 멀리 하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별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아닌 사람들은 땅에 기어다니는 것도 음식으로 먹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먹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구별되게 살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교회는 구별을 단지 이런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의 규례는 신약에 와서는 사라졌기 때문에 구약대로 음식을 가지고 구별되게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규례도 단지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단순히 땅에 기어다니는 것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규례의 의미를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규례의 의미를 모른 채 규례를 지키는 것은 구별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 11장에는 음식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분하시고 더러운 것을 먹지 말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전에 레위기 설교할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더럽다는 것은 동물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동물들의 특성이 구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더럽다고 하신 것의 공통점은 모두가 땅에 밀착해서 살아가고, 땅과 하나가 되고, 하늘을 날면서도 땅의 썩은 것으로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반면에 깨끗하다고 하신 것은 모두가 땅에서 벗어나 있거나 땅에서 하늘로 뛰어오르는 것들이고, 굽이 갈라짐을 통해서 하나가 아니라 둘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암시하는 등, 세상과 구별을 의미하는 것들을 깨끗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레 11:44절에서 땅에 기어다니는 것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더럽다고 하신 것은 어떤 특정한 동물들이 아니라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는 그 사고방식 자체를 더럽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은 세상과의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린양의 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고, 지금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무엇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었다'라고 생각합니까? 보면은 거의 모두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구별되었다고 여기는 옛날 이스라엘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규례의 의미는 무시하고 행동만을 가지고 구별을 자랑했듯이 오늘날도 행동만을 가지고 구별되었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 예배드린다는 것,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구약에서도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구별을 요구하신 것 같이 오늘날도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구별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 의 상식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의식이 있다고 해서 구별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구별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절대로 구별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의식이 신자와 불신자로 구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에는 자기들의 종교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형태는 다르다고 해도 자기들이 믿는 신 앞에 나와서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경배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배만이 아닙니다. 기도나 헌금이나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기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자신의 정성으로 제물(헌금)을 바치는 것도 동일하고, 자신의 종교를 보급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신을 전파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다르다면 각기 부르는 신의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부르는 신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종교가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복을 원합니다. 절간을 찾는 사람들이 부처 앞에서 두 손 모아 비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팔공산 갓바위를 찾아가서 빌고 또 비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상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후손들은 무엇을 빕니까? 신을 받았다고 하면서 작두 위에서 춤을 추면서 굿을 하는 무당들이 비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리고 기도원을 찾아서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이 비는 것이 무엇이며,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헌금바치는 자들이 하나님께 비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여기에 대한 구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승려들이 큰절간의 주지를 맡는 것이 소원인 것과 목사들이 큰 교회의 당회장이 되고 싶은 것이 소원인 것과, 일반 사람들이 직장에서 높은 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과 다른 것이 뭡니까? 승려가 자기 절에 찾아오는 불자가 많아지고 돈도 많아져서 큰절간을 짓고자 하는 것이나, 목사가 교인 수 늘려 가지고 큰 교회 짓고자 하는 것이나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 번창시켜 가지고 큰 회사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크게 되고자 하는 세상의 욕망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비록 종교의 모습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구별이 아니며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고방식이 같기 때문에 추구하는 바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갓바위를 찾아가든 하나님을 찾아가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는 것이나 갓바위를 찾아 기도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를 못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통해서 구별을 보이겠다는 것입니까?
오늘 주제가 축복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전에 장황하게 구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지금 기독교의 모습에는 전혀 구별이 없다는 것을 주지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기독교적인 종교의식이 있는 것으로 '나는 신자로서 구별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랑한다면'이란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불교 집안의 아들과 기독교 집안의 딸이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혼함으로서 오는 종교 갈등을 주제로 삼은 드라마인데, 부처를 믿는 할머니가 그 아들과 손자에게 '부처님을 믿으면 부처님이 우리를지켜주신다'고 하니까 그 아들이 하는 말이 '세상에 부처 믿는 사람이 잘되고 하나님 믿는 사람이 잘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다 못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잘만 삽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복을 말할 때 세상의 것이 우리에게 풍족하게 주어지고 아무 탈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복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아마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상식일 것입니다. 더구나 복에 대해서 아주 집착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라 하면서도 어디에서도 세상과 다른 구별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모습들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2주일 전에 저는 나실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실인은 한마디로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사람입니다. 나실인이 자기 몸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은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관심은 자기 몸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좀 더 풍족하게 좀 더 많은 것을 누리며 편안하게 살아볼까에만 모든 목적을 두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데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실인으로 사는 것만이 세상에서 구별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을 산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축복입니다. 23절에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나실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뒤에 축복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축복은 나실인 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친 나실인 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에서 나실인을 위하여 축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라고 하시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은 나실인으로 살아야 할 존재들이며, 나실인같이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자만이 하나님의 복안에 거하는 참된 이스라엘임을 가르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했다고 해서 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복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을 생각할 때 '내가 받는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그러나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복아래 내가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것을 복으로 잘못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7절에 보면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합니다. 제사장 마음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소위 축복권이라는 것을 가지고 교인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제사장은 단지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자이지 제사장 마음대로 복을 주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출 20:24절을 보겠습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말합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해놓고 그곳을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무엇입니까? 제물의 희생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희생이 있는 그 곳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고, 하나님은 그 위에 강림하셔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일을 기념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는 것인데, 기념하는 그 자리가 바로 제물의 희생이 있는 곳이라면 결국 제물의 희생 그 자체가 바로 여호와를 보여주는 일이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복이 강림한다고 하셨으니, 결국 여호와의 복은 여호와를 보여주는 희생이 있는 곳에만 강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셨고 누가 온전히 여호와의 희생을 보여주셨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제단이었고, 예수님 자신은 제단 아래서 여호와의 희생을 보여주시며 죽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복은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에게 강림하였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복이 되시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여호와의 복 아래 거하는 것이 됩니다.
'아이고 복잡해라!' 복잡하고 머리 아프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복이 되시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복이 되신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니까 복의 의미가 세상과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복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으로 이미 복을 받은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로 이미 우리의 마음이 부요한데 또 무슨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로 부요한 자는 더 이상 세상의 것이 복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욕심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희생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것이 곧 축복이 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희생의 모습이란 곧 나실인의 모습을 의미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헌신하는 상태에 있는 나실인 된 자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실인의 모습으로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서 구별되게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복 아래 거할 참된 신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복은 교회에 나온다고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실인같이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진짜 나실인의 모습을 보이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예수님에게 강림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복을 찾지도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 복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거짓된 복을 찾아 헤매이지도 마시고 참된 복을 누리십시오.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도 얻을 수도 없는 복이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신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실인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서 여호와를 기념하며 살기를 애쓰신다면 세상의 일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대로 하나님은 그런 신자를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함께 흘러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며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미련하다, 어리석다는 조롱과 업신여김이 쏟아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좋아서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그리스도로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복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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