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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망

이사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349 추천 수 0 2013.10.05 17:2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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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5: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sermon/70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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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망

이사야 5:1-7, 성령강림절후 제13주,

 2013.8.18

 

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오늘 우리는 2천7백 년 전 지중해 동편에 면해 있던 유대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이사야의 글을 설교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사 5:1-7절은 문학적으로도 아주 뛰어난 글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포도원의 노래’라는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그 소제목이 가리키듯이 본문은 당시 포도 농사를 지면서 사람들이 함께 부른 노래 중의 하나입니다. 포도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였습니다. 본문 1-2a절은 다음과 같은 노랫말로 시작합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짧은 구절의 이 노랫말에 당시 포도농사에 대한 전반적인 사연들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일궜습니다. 기름진 산은 포도 재배에 안성맞춤입니다. 여기서 산은 심하게 가파르지 않은 언덕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포도 재배에서 중요한 것은 배수와 햇볕입니다. 언덕은 배수가 좋습니다. 특히 언덕이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햇볕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고 최상품 포도나무 묘목을 심었습니다. 포도원을 가꾸기 위해서 주인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지금이야 트랙터나 포클레인으로 쉽게 밭을 일굴 수 있지만 당시는 모든 걸 사람의 손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서 망대도 세우고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술틀까지 팠다고 합니다. 이제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입니다. 좋은 포도가 맺기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아무 쓸모가 없는 들포도만 맺혔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들포도만 맺는 이유를 찾아서 해결하는 게 최선입니다. 처음부터 종자가 잘못됐다면 다시 갈아엎고 새 종자를 심어야겠지요. 거름이 부족했다면 거름을 보충해줘야 합니다. 심한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면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냥 참고 기다려야겠지요. 본문의 포도원 문제는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완벽한 조건인데도 들포도만 맺은 겁니다. 주인은 이렇게 결정합니다. 5,6절입니다.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포도원을 완전히 박살내겠다는 뜻입니다. 이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좋은 포도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농부는 절망했습니다. 포도원을 향했던 사랑의 크기만큼 분노와 절망의 크기도 큽니다. 영혼을 기울여 사랑했던 연인의 변절 앞에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포도 농사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한 비유로 전한 겁니다. 7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 민족이고, 포도나무는 유다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함께 거론하는 이유는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나라는 원래 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최상의 포도 묘목을 심는 농부의 심정으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선택했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남향 언덕에 심긴 포도나무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좋은 포도를 결실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절망했고 분노하셨습니다. 배신당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를 작파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화가 난 농부가 포도원을 불사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망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절망과 분노의 원인을 이사야는 본문 7b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은 유대민족에게 정의와 공의라는 좋은 포도를 기대하셨는데, 그들은 거꾸로 포학과 부르짖음이라는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정의나 공의는 똑같은 뜻입니다. 한데 묶어 사회정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사야는 당시 상황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이어서 나오는 8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 내용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의 편중입니다. 집과 땅의 독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다른 하나는 향락 문화에 젖어서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12절) 그들은 고급스럽게 살지만 하나님의 일과 능력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하던 시대가 지금부터 2천7백 년 전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읽으십시오. 당시에는 사회정의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에 사람들은 똑똑하고 남보다 노력을 많이 해서 부자가 되는 거고, 머리가 나쁘거나 불성실해서 가난한 자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는 빈부는 하늘로부터 타고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왕정시대였습니다. 왕과 왕족과 귀족들이 백성들을 지배했습니다. 이사야가 지금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대부분 그들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상위 1%, 또는 10%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왕과 귀족들이 이사야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귀 기울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말을 전하는 선지자를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선지자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마련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렇게 희생되었습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왕과 귀족의 마음에 드는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말입니다. 이사야는 목숨을 담보하고 사회정의를 외쳤습니다. 사회정의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당신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당신들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말입니다.


이사야가 오늘 대한민국에 다시 나타난다면 어떤 말씀을 전했을까요? 저는 오늘 대한민국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저의 능력을 벗어난 일입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서 배운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만은 전해야겠습니다. 앞에서 이사야가 두 가지 문제를 제시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을 하나로 정리한다면 부의 양극화 현상입니다. 부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가난한 자는 너무 가진 게 없습니다. 그것이 교정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돈과 재물을 신처럼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쪽은 그 상황을 만족해하면서, 다른 한쪽은 불만스럽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제 말씀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부자는 무조건 악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부를 가져야만 사회정의를 외면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힘듭니다.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를 소유하고 자녀들을 출가시킬 여유가 있는 사람을 양극화의 책임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저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경계를 나누려는 게 아닙니다. 부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시키려는 게 아닙니다. 이 문제는 그가 부자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이 시대 전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부의 양극화는 사회적인 질병현상입니다. 이걸 질병으로 느끼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느끼지 못하기에 더 심각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삶만이 파괴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떵떵거리는 부자들의 삶도 역시 파괴됩니다. 그게 어떤 건지 더 설명해야 할까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의 메시지로 대답하겠습니다. 이사야에 따르면 그런 상태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상태는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 5:16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대단히 놀라운 이사야의 영적 통찰입니다. 하나님이 높으신 분이라거나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의 근거는 그분이 정의롭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아주 파격적인 진술이지요. 신론의 사회적 차원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이사야에게 이스라엘은 버림받는 포도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높이지도 않고 거룩하게 여기지도 않는 민족이라는 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단순한 정의감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에서 정의와 공의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양극화는 세상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부자 교회는 너무 부자고, 가난한 교회는 너무 가난합니다. 소위 미자립교회가 전체 교회 중에서 30%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50%까지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잘 나가는 교회는 수천억, 수백억 원을 들여서 교회당을 건축합니다. 필요에 따라서 교회당을 건축할 수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선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목회를 해서 교회를 키우면 될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저는 지금 어느 한 두 개 교회의 잘잘못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양극화라는 질병에 걸렸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건 분명한 질병입니다. 이것을 병으로 알고 함께 해결하도록 노력하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아 더 심각합니다. 이사야가 대한민국에 오면 세상과 교회를 향해서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할 것입니다. 당신들에게 하나님이 절망하신다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사회정의를 주제로 하는 설교를 신자들은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작은 교회는 물론이고 큰 교회는 정의 문제를 완전히 기피합니다. 교회생활 잘하면 복을 받는다고 부추기거나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라고만 말합니다. 부의 양극화가 개인의 도덕심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순진해서 모르거나 너무 영악해서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사회정의라는 게 사회운동가나 정치인들이 감당해야 할 문제인지 소시민에 불과한 개별 신자들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옳습니다. 개별 신자들은 생존하기에 급급하기도 하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많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사회의 경제정의를 위해서 투사가 되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할 분들은 하십시오. 모든 분들에게 그걸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세상을 우리에게 기대하신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직면하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거기서 문제의식을 깨닫게 되면 뭔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을 겁니다. 그걸 우리는 성령의 활동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새로운 차원에 눈을 뜨게 하는 힘이니까요.


하나님을 절망하게 하는 포학과 부르짖음의 극치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막 12:1-12절에서 예수님의 비유로 그것을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관리를 맡겼습니다. 때가 되어 세를 받으러 보낸 종들을 농부들이 구타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했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 관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악한 세상을 멀리 하고 혼자만이라도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사회가 병들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역시 병든 겁니다. 암에 걸린 몸이면 다 병든 거지 눈만 건강하다고 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암으로 그 사람이 죽으면 성한 다른 장기나 지체와 더불어 온 몸이 죽는 거지 건강한 귀만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세상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절망이 이사야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게 절실하게 느껴진다면 여러분은 이사야의 영성에 가까이 이른 것이며, 그때부터 예수 사건이 실질적으로 여러분의 영혼에 구원의 능력으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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