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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862 추천 수 0 2013.10.05 17:3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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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4:25-3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sermon/7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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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창조절 둘째 주일, 9월8일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히틀러 시대에 독일 개신교회는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은 <Deutsche Chri stliche>이고 다른 한쪽은 <Bekennende Kirche>입니다. 전자는 <독일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후자는 <고백교회>로 불립니다. <독일 기독교인>은 나치즘에 대해서 방조 내지 묵인의 입장을 취했고, <고백교회>는 저항했습니다. 당시 <독일 기독교인>은 다수를 차지했고, <고백교회>는 소수였습니다. <고백교회>에 속한 목사와 신학자들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들이 칼 바르트와 본회퍼입니다. 특히 본회퍼는 무력을 통해서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결사 단체에 가입했다가 전쟁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사형 당했습니다. 미친 운전자가 운전하는 버스에 탄 목사는 사고 뒷수습만 할 게 아니라 운전자를 강제적으로라도 버스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본회퍼는 히틀러라는 전체주의적 독재자 앞에서 무기력했던 당시 독일교회가 값싼 은혜에 빠져 있다고 질타했습니다. 값싼 은혜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걸맞은 삶이 따르지 않았다는 걸 가리킵니다. 본회퍼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제자의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용어를 그대로 인용하면 <Nachfolge Chri sti>, 즉 ‘그리스도를 뒤따름’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예수님을 그대로 따르는 겁니다.


우리나라 목사님 중에서도 이런 부분을 강조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3년 전인 2010년 9월2일에 세상을 뜨신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이 추구한 한 평생의 목회는 평신도의 제자화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실제 삶이 변해야 한다는 말씀을 호소력 있게 전하신 탓인지 사랑의교회는 대형교회로 부흥했습니다. 옥 목사님은 평소 대형교회의 위험성을 경고하셨는데 본인이 목회하신 교회는 그런 교회가 되고 말았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입니다. 그분의 후임이 오신 뒤로는 교회의 대형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수천억원짜리 교회당을 짓고 있습니다. 어쨌든지 고 옥한흠 목사님이 일관되게 전한 제자화는 본회퍼 박사의 제자도와 더불어서 말이나 인식의 차원에 떨어져버린 신앙의 무게를 실제 삶의 변화로 옮겨 놓으려 했다는 점에서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깊이 새겨야할 가르침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에 대한 그림이 그려집니까? 이런 가르침의 출처는 예수님의 말씀 자체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제3독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 27).

 
예수님은 엄청난 요구를 하신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을 미워하라는 겁니다. 병행구인 마 10:37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태복음보다 누가복음의 표현이 더 강하게 말합니다. 마태는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제자로서 합당하지 않다고 한 반면에 누가는 아예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인간적인 결속을 완전히 해체해야 한다는 요구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내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십계명은 오히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부정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의 이런 요구를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에만 몰두하기 위해서 출가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수도원에 들어가기도 하고, 평생 오지에 선교사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도 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가족을 실제로 미워하라고 말씀하셨을 까닭이 없습니다. 본문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런 구절을 끊어내서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면 근본 의미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 맥락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였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보면 수천 명이 모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모인 동기는 각양각색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온 이들도 있고, 반로마 혁명의 기운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해보려고 온 이들도 있고, 도덕적인 교훈에 감동받은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에 대해서 뭐라 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관심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들이 다 흩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셨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엔가 실제로 예수님 곁을 다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누가 남았는지를 보면 이게 분명합니다. 여자 제자들 몇몇 외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열광했던 사람들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채 자신의 개인적인 동기에만 도취되었던 사람들에게서 나탈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제자가 될 준비가 없는 사람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입니다.


제자의 준비에 대해서 예수님은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망대를 세우는 작업니다. 망대를 세우는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를 미리 계산해야만 합니다. 그런 것 없이 시작했다가는 기초만 쌓고 끝나버립니다. 다른 하나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어떤 임금이 전쟁을 시작하려면 전쟁을 치러 이길만한 군사력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전쟁을 해봤자 질 거 같으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평화 협정을 맺는 게 좋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를, 그런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마지막 구절에서 소유의 문제와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제자가 될 준비는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유를 버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지요? 우리는 철저하게 소유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돈이나 집 같은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필요한 것들은 돈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고, 사회적 명예나 이념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성실하게 살기 위해서 붙들려고 하는 모든 것들까지 여기에 포함됩니다. 따라서 소유 자체를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소유 자체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을 설파하신 예수님께서 일상을 부정하셨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시장에서, 길거리에서, 호숫가에서, 성전 안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 일행을 가리켜 먹고 마시기를 탐하고 수준 낮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고 비난했겠습니까? 가족을 미워하라는 게 가족 관계를 해체하라는 말씀이 아니었듯이 여기서도 소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가 되는 것의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 다른 차원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께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왔다가 실망해서 돌아간 사람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종교적 만족을 얻어 보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 하면서 종교적 포즈를 취하기는 했으나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낙심하고 돌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를 보십시오.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만약 세속적인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방향을 잘못 잡은 겁니다. 마음 수련을 위해서 나온다면 그것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겁니다.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나온다는 말도 잘못입니다. 그런 요소들이 교회에서 하나의 종교현상으로 나타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에만 머물러 있는 한 어떤 경우가 되면 곧 실망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가 되는 것의 다른 차원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아는 것 같지만 잘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그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관점도 다르고 관심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 6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병이어 사건 뒤에 많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오병이어 자체에 매달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유대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만나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주는 떡은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8)

 
이 구절은 은혜로운 말씀이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말씀이 어렵도다.”고 불평했습니다.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고,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 못해서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갈 때가 많습니다. 신앙적으로 무엇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로만 아는 게 아니라 그 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걸 동양 언어로 말하면 돈오라고 합니다. 단순히 정보로 아는 게 아니라 크게 깨우쳐서 그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인식과 믿음으로 살아야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며,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산다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어렵다고 말한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결국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엄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앞에는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이라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소유의 길도 사실은 썩 괜찮은 길입니다. 성실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교양 있게 살아가는 모든 삶은 소유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실망해서 돌아간 대개의 사람들은 그와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서 어떤 분들은 그런 차원에 머물러 있을지 모릅니다. 아직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떠났을지 모릅니다. 떠나야겠다는 결단이 설 정도로는 예수님을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머물러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적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나 자신도 목사지만 그런 부류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소유의 길을 선택했다면 거기에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흔히 보듯이 나름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제자의 길은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결단이자 희망입니다. 이건 소유의 길과 전적으로 다릅니다. 소유의 길은 자기가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는 것으로 삶의 만족을 얻지만 제자의 길은 일방적으로 예수님에게만 집중함으로써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는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인정을 받든지 않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생명 사건과 비교해볼 때 그런 것들은 정말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까지도 부활의 빛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자의 길은 우리에게 가능할까요? 그래서 세상살이에 필요한 소유 문제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대략적으로 처리해버리고 제자의 삶은 세세하게 집중할 수 있을까요?


다른 한편으로 소유의 길과 제자의 길이 완전히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한 인격체 안에 겹쳐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 사람은 소유의 길을 가고, 나는 제자의 길을 간다기보다는 내가 소유의 길을 가기도 하고 동시에 제자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 번의 은혜 경험과 결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제자의 길을 가는 수행입니다. 소유에 지배받는 삶의 영역이 축소되고 예수 운명과 일치되는 삶의 영역이 확대되는 그 수행의 길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길을 함께 가는 영적인 도반(道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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