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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눈물

예레미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593 추천 수 0 2013.10.05 17: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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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렘8:18-9: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sermon/71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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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눈물

렘 8:18-9:1, 창조절 넷째 주일,

2013년 9월22일

 
 
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19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20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고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은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선지자는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의 역할은 아주 독특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학교와 비슷한 선지자 학교를 통해서 배출되는 선지자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신탁을 받아 선지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랍비로서 선지자 전통에 가까운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선포하고 병을 고치는 역할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로 읽은 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설교입니다. 20대 초반의 나이로 말씀 선포의 소명을 받은 후 60대 초까지 전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 모음집입니다. 그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대는 북이스라엘이 이미 백 년 전에 멸망하고 남유대만 명맥을 이어오던 때였습니다. 남유대도 점점 위태로운 상황에 빠져들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남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십여 전인 기원전 598/7년 경에 행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당시는 나라가 완전히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바벨론이 유대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시시때때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허황된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냐 같은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철퇴로 내려치시고 유대를 지켜주신다고 설교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유대 왕과 귀족과 민중들은 그런 말에 위로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보기에 그런 설교는 거짓말이었습니다. 거꾸로 그는 나라가 망하고 유대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잡혀간다고 설교했습니다. 예레미야 홀로 현실을 직시했던 겁니다. 그는 본문 20절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이 구절은 백성들의 호소이며 한탄입니다. 그들은 일정한 때가 오면 바벨론의 위협이 없어지고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했던 때가 왔지만 여전히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광풍에 휩싸여 있습니다. 22절에서 그 상황을 다시 반복합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길르앗은 요단 동편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곳은 향나무의 진으로 만드는 연고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유대가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약재와 훌륭한 의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의 운명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속담을 빌려 전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슬픔은 극에 달했습니다. 통곡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 마음을 그는 9:1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립니다. 오죽 했으면 ‘예레미야 애가’라는 이름이 붙은 글이 구약성경에 자리를 잡았겠습니까. 본문의 첫 구절인 18절에도 예레미야는 ‘슬프다.’고 호소합니다. 그 슬픔이 지나쳐서 자신의 마음이 병들었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청년 시절부터 정서가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라가 망할 조짐이 보일 때 큰 일 났다거나, 어떻게 생명을 보존할까, 하는 걱정을 하고 맙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안전은 안중에 없습니다. 순전히 자기 조국에 대한 걱정뿐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예레미야는 남 다른 애국자처럼 보입니다. 애국자들은 나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영웅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안중근과 유관순 이야기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는 그런 애국자들이 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런 애국자들이 나타납니다. 겉으로만 보면 예레미야도 분명히 애국자처럼 보입니다. 망하는 유대의 운명 앞에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단순한 애국자는 아닙니다. 그의 생각과 행동을 끌어가는 힘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애국자에 불과했다면 어려움에 빠진 유대를 살려내기 위해서 무슨 행동이라도 했을 겁니다. 하나냐처럼 거짓 설교를 통해서라도 낙심에 빠진 유대 민중들을 희망에 부풀게 할 수도 있고, 또 군사적인 저항운동을 펼칠 수도 있고, 전쟁 물자를 모으자는 애국 운동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오히려 나라가 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애국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한 겁니다. 예레미야는 주변 사람들에게 반역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나라로 인한 슬픔을 감출 길 없어서 자신의 머리가 우물이 되고 자기 눈이 눈물의 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던 예레미야가 실제로는 나라의 멸망을 받아들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레미야의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유대의 멸망을 단순히 국력이나 정치적인 문제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은 탓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개인이나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근본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습니다. 그 근본원인을 내버려둔 채 자기 민족이 살아날 길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역설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려면 나라가 망하는 게 옳을 수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악성 종양이 생겼다고 합시다. 진통제를 먹는 것으로 종양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비록 한 순간 고통스럽겠지만 전신 마취를 하고 환부 전체를 외과적으로 제거하는 게 최선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가 악성 종양에 걸린 환자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전체의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도 그는 그 문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이 구절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야훼께서 시온에 안 계시는가? 왕노릇 그만 하시려고 물러나셨는가? 이렇듯이 내 딸, 내 백성이 신음하는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려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우상을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어찌하여 남의 나라 허수아비를 들여다가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예레미야는 유대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이유를 우상 숭배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상숭배를 단순히 타종교의 의식을 따르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사람들이 부적을 집이나 가게에 붙인다거나 무당, 또는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불상 앞에 절하는 것 등으로 말입니다. 우상숭배는 훨씬 근원적이고 숙명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피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물론 고대 유대인들에게 우상숭배는 주로 가나안의 토착종교인 바알숭배를 가리킵니다. 바알은 모든 종교의 일반적인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풍요, 다산, 장수 등을 약속하는 신이 바알입니다. 이런 약속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 멋지게 살아보자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무조건 잘못된 건 아닙니다. 각박하고 척박한 세상살이에서 가능한대로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인지상정입니다. 문제는 그런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 시작하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 제3독서로 읽은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예레미야는 그 우상을 허수아비라고 지적합니다. 모양은 그럴듯하지만 생명이 없는 게 허수아비입니다. 이런 예레미야의 말을 당시 사람들만이 아니라 현대인들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현실성이 없는 헛소리라고 빈정댈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시대가 귀신 들린 것처럼 물신주의에 사로잡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시대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깊이 결탁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유치원부터 대학교, 그리고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가 총체적으로 돈을 버는 것에만 몰두하게 합니다. 그 방식으로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유혹이자 명령입니다. 돈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인간 삶을 지배한 적이 지난 인류 역사에서 지금 말고 또 있었을까요? 거대한 맘모니즘이 광기를 부리는 듯한 세상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분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생명의 현실로 경험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단순히 종교적 덕담으로 치부하고 자신은 다른 방식으로 생명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우상이 왜 허수아비라고 말하는 걸까요? 이 말에 동의하시나요? 이 질문에 바르게 대답할 수 있어야만 유대의 멸망이 우상숭배에 기인한다는 예레미야의 주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걸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일반적인 역사학자들은 유대의 멸망이 우상숭배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바벨론 제국의 확대정책과 유대의 잘못된 외교정책 때문이라고 분석하겠지요. 누가 옳은가요? 우리의 경우로 봅시다. 70년 가까운 남북분단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과 소련의 분단정책이 원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북한의 호전성이라고도 말하겠지요. 만약 어떤 목사가 우상숭배 탓이라고 말한다면 학자들은 말도 안 된다고 비판할 겁니다. 예레미야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거들떠보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상숭배 문제는 기본적으로 생명(삶)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물질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건 오랜 경험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의 사람들은 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압니다. 물질 없이 우리가 생존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방식으로 얻어지는 생명을 참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렇게 성실하고 인격적으로 살면 됩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저는 그런 삶을 무조건 불행하다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것을 허수아비, 즉 헛된 것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깊이 들어갈 때 사람은 생명을 경험한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사람을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것은 피조물입니다. 자체적으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허수아비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가능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서 술 한 잔 하고 티브이를 보거나 책을 보려고 서두릅니다. 속도가 빠르고 승차감이 좋은 차를 타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가야만 합니다. 이 사람은 그걸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면서 자기의 노력으로 뭔가를 이뤄보려고 애를 씁니다. 다른 한 사람은 얼마나 빨리 가는지, 무슨 차를 타고 가야하는지, 남보다 앞서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이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영혼을 걸어둡니다. 그래서 길을 가면서 바람을 느끼고, 나비나 벌과도 대화하고,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과 삶을 나눕니다. 삶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철학적인 용어로는 존재론적인 삶이라고, 기독교적인 용어로는 은총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 은총에서만 생명을 풍요롭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은총의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런 교리가 영혼 깊은 곳에서 뜨겁게 전달되나요? 아니면 상투적인 표현으로 들리나요? 이런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그리고 그의 운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어떤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사실은 곧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하나님의 파루시아, 즉 예수 운명에 하나님이 현재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사건 이후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종말의 부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더 이상 다른 수고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표현으로 그것은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총)입니다. 이 사실에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여러분은 기독교 전통에서 한발 비껴난 것입니다. 다시 전통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십시오.


오늘 우리는 누란(累卵)의 운명에 떨어진 유대 민족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마음 아파하는 예레미야의 뜨거운 외침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이와 같은 정도의 영적 민감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제2의 예레미야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참된 신앙을 배울 수는 있습니다. 거짓 생명을 약속하는 우상은 그럴듯해도 헛된 것들입니다. 그 사실을 뚫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세계로 깊이 들어간다면 무엇이 헛된 우상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분량만큼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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