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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왕상1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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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3.8.5 ⓒhttp://www.john316.or.kr |
열왕기상(41)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열왕기상 17장 1-7절)
엘리야는 길르앗 디셉 사람이었습니다(1절) 길르앗은 요단강 건너편 지역으로 우리나라로 말하면 두만강 건너의 변방지역입니다. 그 중에서도 디셉이란 지명은 성경에 딱 한 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시골지역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골 출신의 엘리야를 불러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내일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현재 자신이 가진 것만 가지고도 무한한 행복의 가능성이 있고 그것만 가지고도 하나님께 충분히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열등감조차 창조적인 기회로 활용하고 자기를 향상시키는 추진력으로 삼으면 됩니다. 병적인 열등감은 문제이지만 적절한 열등감은 창조와 성취의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한 사람도 버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비하하지 말고 자신도 비하하지 마십시오.
2. 헌신된 사람
아합 왕에게 가서 엘리야가 어떤 선포를 합니까?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무명의 엘리야였지만 얼마나 당당합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님의 뜻에 드리면 이처럼 당당하게 됩니다. 그처럼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면 그를 통해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형통하면 제일 잘 믿는 것처럼 하다가 조금만 어려우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 감정의 파도타기는 신앙생활의 행복을 빼앗고 그런 태도가 끊임없는 훈련을 초래합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이 그를 훈련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훈련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끔 훈련도 필요하지만 끊임없는 훈련과 시험은 끊임없는 기웃거림과 머뭇거림의 산물임을 잊지 마십시오.
3.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 명령대로 왕 앞에 갔으면 끝장을 내야지 왜 하나님은 곧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하셨을까요? 더 나아가 차라리 순교하거나 굶으라고 하시지 까마귀에게 얻어먹으라고 하니까 얼마나 자존심상하는 훈련입니까? 그처럼 가끔 자존심 상하는 고독한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지 말고 더 감사하고 더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축복하기를 원하시지만 때로는 그 축복을 위해 먼저 고난도 주십니다.
결국 엘리야는 까마귀가 아침저녁으로 물어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그릿 시냇가에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고독한 장면입니까? 그 상황을 어떻게 엘리야가 이겨냈을까요? 무엇보다 기도하며 이겨냈을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는 기도 굴과 똑같았습니다. 그때 기도하며 훈련을 받았기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불을 끌어내는 능력 있는 선지자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4. 인내하는 사람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이끄셨을까요? 당시 그릿 시냇가는 너무 조그만 냇가여서 지금은 어딘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큰 강물이나 폭포로 인도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강물과 폭포수의 축복은 잠깐의 찬양은 줄지라도 자칫 우리의 입술에서 꾸준한 찬양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축복은 큰 것에 있지 않고 꾸준한 것에 있습니다.
또한 왜 하나님은 까마귀를 보내어 매일 아침저녁을 먹이셨을까요? 10년 먹을 풍족한 양식을 한꺼번에 공급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10년 먹을 풍족한 양식은 자칫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아침저녁으로 까마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축복을 주실 때 축복을 홍수와 같이 주지 않고 이슬비와 같이 주시는 이유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이제까지 저의 목회를 살펴보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난 세월은 매주, 매달, 매년이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양식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지나온 세월이었습니다. 돌이켜 볼 때 폭포수와 같은 축복은 없었지만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끊어질듯 하다가 까마귀와 같은 존재를 통해서 주어지는 영혼과 육신의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하며 이때까지 지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매일 새벽은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가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벽에 무릎 꿇으면 신기하게도 까마귀가 필요한 것을 가지고 날라 왔습니다. 그것을 통해 믿음이 자라니 시냇물의 축복과 까마귀의 축복은 결코 부족한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곧 마르고 끊어질 듯한 축복을 통해 믿음을 훈련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더욱 헌신된 믿음의 용사를 만들기 위해서인 줄 믿습니다.
때로 너무 살기 어려우면 믿음과 성품이 좋은 사람도 가끔 회의가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간신히 살게 하실까?” 이제 그런 회의를 가지지 말고 어려움 속에서 나를 들어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어려움을 통해 믿음을 배양하고 더욱 하나님 앞에 헌신된 한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그처럼 믿음 안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내 맡은 일을 할 때 언젠가 꿈같은 축복의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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