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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8:1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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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3.9.16 ⓒhttp://www.john316.or.kr |
가나안의 축복을 얻는 길
(신명기 8장 15-20절)
서부 영화를 보면 아무리 고난이 심해도 끝은 반드시 의인이 이기도록 각본이 되어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도 승리의 각본을 이미 꾸며놓으시고 그 각본대로 잠시 광야를 허락하실 때가 많습니다. 인생에서 광야 공부도 중요합니다. 돈은 있지만 사람이 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느 날, 한 의사가 다리 저는 아이를 고쳐주었습니다. 그 아이가 20년 후 살인죄로 감옥에 갔습니다. 걷게는 되었지만 걸어갈 길은 못 배운 것입니다. 그처럼 가나안에 빨리 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직선거리로 14일 거리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출애굽 후 가나안 남방인 가데스 바네아까기 가서 거기서 정탐꾼 12명을 가나안에 보냈습니다. 그때 10명 정탐꾼이 부정적인 보고를 하자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된 것으로 여기시고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게 하셨습니다.
몸은 교회에 왔는데 마음과 생각과 태도는 애굽의 모습 그대로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복주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얻는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섬길 목적이 아닌 얻을 목적으로 교회를 다니면 교회도 어려워집니다. 옛날에는 교회 장로 선거가 치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장로 선거 후 큰 홍역을 치르는 교회가 많습니다. 교회의 리더가 되어 교회를 움직이는 것에 세상적인 매력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요새 신분상승의 기회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의사가 되면 바로 신분상승이 이뤄졌습니다. 요즘은 그런 기회가 점차 줄면서 ‘사’자 들어가는 호칭을 얻어도 신분상승이 쉽지 않습니다. 이때 가장 얻기 쉬운 ‘사’자 호칭 중의 하나가 바로 ‘목사’입니다. 지금 편법과 속성으로 단기간에 목사 안수를 주는 군소신학교가 몇 백 개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길로는 도저히 신분상승을 이룰 수 없는 사람이 신분상승을 꿈꾸고 사명을 내세워 뒤늦게 목사가 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정황 때문에 목회자를 청빙할 때 나이가 들어 신학을 한 사람은 담임목사나 부교역자로 아예 받지 않으려고 나이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젊어서 신학교에 간 사람을 무조건 신뢰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반 대학에 갈 실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신학대에 가는 경우도 많은 것을 알고 청빙할 때 학력까지 상세히 따지는 교회가 많습니다. 사명이 학력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워낙 사람을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서 그런 분야까지 따지고 드는 세태가 된 것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결국 지금은 목사 안수를 받아도 사역할 곳이 없고 신분상승은커녕 “목사님!”이란 호칭도 억지로 해줄 때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점차 교회에 설 자리가 없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상처를 교회에서 무의식적으로 자꾸 토해내니까 문제와 분란이 생기면서 더 무시되고 외면되는 상황에 내몰린 무임 목회자가 요새 얼마나 많습니까?
일반 성도가 보기에 별로 목사 자격이 없어 보이는데 목사 안수를 받았다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목사님!”이란 호칭이 진심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담스러워서 멀리하는 것입니다. 요새 택시 운전사나 트럭 운전사 중에 목사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이 때가 되어 “사실은 제가 목사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히면 주변 사람의 놀라움과 함께 더 외면되는 상황에 처하면서 목사 안수 받은 것을 후회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사명은 ‘신분상승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하락을 감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업에도 성공하고 세상적인 길이 많은 사람이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교에 간다면 성도들도 “와아!” 하며 존경심을 표하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세상적인 길이 없는 사람이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교에 간다면 “에이!” 하며 좋게 봐주지 않고 은근히 무시합니다. 또한 ‘서울대학교’에 갈 실력이 있는 사람이 신학교에 간다면 “와아!” 하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지 못해서 신학교에 간다면 “에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자기검열을 중시했지만 지금은 사회검열이 강화되어 타이틀만으로 급격한 신분상승을 이루는 것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좋은 신학대학원을 가겠다고 삼수 사수를 하고 교단 총회장이 되겠다고 몇 억 원을 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가 세속적인 매력을 추구하면 반드시 그 앞에는 광야가 펼쳐집니다.
물론 광야가 반드시 죄와 허물에 대한 징계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더욱 복된 존재로 만들려고 하나님이 광야를 허락하실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광야의 순간에 처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광야가 하나님의 선하신 각본 아래 주어진 것임을 믿고 더욱 하나님을 신실하게 꼭 붙잡고 감사하며 나가면 조만간 그의 앞에 반드시 가나안의 신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 가나안의 축복을 얻는 길 >
인생에서 광야 교육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한 교육 기회가 생기면 그 회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과 같은 명절을 신앙교육을 위한 기회로 잘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특별히 3가지 말씀을 전했습니다. 첫째, 과거에 받은 수많은 기적적인 은혜와 축복을 회상해 감사하게 했습니다. 둘째, 앞으로 가나안에서 받게 될 큰 축복의 비전을 그려주었습니다. 셋째, 가나안의 축복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도전을 주었습니다. 가나안의 축복을 준비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고난의 시험을 이겨내십시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잊어버립니까? 의식주가 해결되고 물질이 많아지면서 마음이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12-14절).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해서 마침내 복을 주시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15-16절). 그처럼 하나님은 복을 주실 때 먼저 겸손하게 낮추는 시험을 하신 후 마침내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오면 그 시험을 통해 먼저 복 받을만한 가난한 심령이 되십시오.
큰 시험을 당하면 막막하고 길이 없는 것 같지만 그때도 주님은 피할 길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오면 곧 축복도 뒤따라 올 것을 믿고 용기를 잃지 말고 더욱 주님 붙잡고 열심히 사십시오. 특히 하나님은 어떤 분야에서 축복을 주실 때 먼저 그 분야에서 시험을 치를 때가 많습니다. 즉 물질 축복을 주시기 전에 물질로 시험하고 자녀 축복을 주시기 전에 자녀로 시험하실 때가 많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은 자녀 및 후대의 축복을 받았다는 뜻인데 그런 축복을 받은 것은 그가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는 자녀 시험을 잘 치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갈 때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아들을 바치라는 그 음성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었을까?” 수많은 의문과 고민 끝에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대학 입학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합니다. 그 대학 입학시험은 어린이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주어집니다. 결국 시험이 있다는 것은 축복받을 기본자격이 준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두려워하거나 시험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그런 때일수록 더욱 사명과 직분에 충실하십시오. 그러면 내일 당장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아도 조만간 반드시 축복된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왜 여러 가지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까? 시험 후에는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면 여러 가지 복을 받고 큰 시험을 당하면 큰 복을 받습니다. 시험은 곧 다가올 복의 전조이자 복으로 가는 징검다리입니다. 그래서 시험 칠 때는 힘들지만 시험이 끝나면 비로소 그 시험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큰 시험을 만나면 “곧 큰 축복이 따라오겠구나!”라고 믿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에 합당한 시험을 합니다. 보통 때의 말과 행동으로는 믿음의 점수를 알기 힘들지만 시험을 쳐보면 믿음의 점수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바로 그 점수대로 대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시험을 통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앞으로 더욱 큰일을 감당하게 하소서!” 시험을 잘 치르면 시험 당한 것 이상의 복을 받습니다.
2. 재물 얻을 능력을 구하십시오
본문 17-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재물이 생기면 그것을 스스로 얻은 것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이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셔서 얻었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물질을 구할 때 무조건 물질을 구하지 말고 물질을 얻는 능력을 구하라는 암시도 있습니다.
흔히 “거부는 하늘이 낳는다.”고 하는데 그 말은 사실입니다. 이삭이 어떻게 거부가 되었습니까? 그는 원래 양떼를 치는 축산업 종사자였지만 창세기 26장을 보면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농사를 통해 백배의 결실을 얻고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직업과 생업이 바뀌고 해고가 되어도 그것이 오히려 백배의 축복을 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어떻게 일하느냐?”보다 “예배하며 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십시오. 필요하다면 전업도 하십시오. 인간적인 성실함과 수완도 중요하지만 예배하는 삶을 기초로 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수완으로는 2배의 결실도 얻기 힘들지만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백배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작은 부는 본인이 노력하면 얻지만 큰 부는 하나님이 복 주셔야 합니다. 그처럼 거부는 하늘이 낳지만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거부의 몰락도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한 예배자의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삶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많은 영혼을 위해 큰일을 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재물의 축복을 주셔서 그 재물을 통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그리고 그 전에 제가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자신이 ‘제물’이 될 때 ‘재물’을 얻는 지혜도 생깁니다.
재물 얻는 능력이 없으면 다른 능력을 구하십시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동물도 다 다릅니다. 말은 잘 달리고, 소는 힘이 세고,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과 역할이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각 사람을 기성품이 아닌 맞춤형 명품으로 만드셨기에 하나님이 주신 자기 재능과 은사를 감사하면서 그 재능과 은사를 개발해 하나님이 쓰시도록 내어 드리십시오. 그처럼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 누구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재능을 살려 일하면 밤을 새워도 즐겁습니다. 그러면 남들에겐 어려운 일이 자기에게는 아주 쉽게 여겨지고 열매도 많이 나타납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주신 자기 분복과 재능대로 사역하면 됩니다. 요즘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이렇게 하소연을 합니다. “내가 이 정도 사역밖에 못하는 존재인가?” 그러나 큰 교회를 섬겨야만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그것이 성공입니다.
돈을 잘 버는 분들을 보면 재물 얻는 능력이 탁월해서 돈의 흐름을 읽고 돈 버는 길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재물 얻는 능력만이 최고의 능력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만의 선천적인 능력과 기회를 활용하면 누구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기 모습 그대로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면 자기가 몸담은 분야에서 더 유능해지면서 점점 영권과 인권과 물권도 따라올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이 진짜 성공입니다. 그런 성공을 구하십시오.
3.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십시오
왜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당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편애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면 가나안 족속들처럼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 중심적으로 살라고 도전합니다(19-20절). 사람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 중심적으로 살 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얻습니다.
미국에 조지 베브리 쉐아(G.B. Shea)란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 자녀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는 굵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기에 나중에 인기 있는 대중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기가 올라가면서 왠지 공허했고 자기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느낌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어릴 때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시절에 대한 깊은 향수를 느끼면서 다짐했습니다. “인생을 이렇게 낭비하지 말자!”
바로 그때 미국 NBC 방송국에서 전보다 몇 배의 보수를 줄 테니 전속계약을 맺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그가 대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전화를 조금 늦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노래할 겁니다.” 그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갑자기 속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솟아났습니다. 그때 그가 작곡한 찬송이 바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란 찬송입니다.
그 후 그는 빌리 그래함의 평생 동역자가 되어 빌리 그래함 목사가 설교하기 전에 언제나 감동적인 찬송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여는 세계적인 복음성가 가수가 되었습니다. 집회 때 그의 찬송이 끝나고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치면 그는 늘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박수갈채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찬사와 박수도 예수님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이 물질이나 명예나 인기보다 더 귀한 줄 아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얻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명예가 없으면 고독하지만 이상하게도 세상적인 명예를 얻으면 더 고독해집니다. 물질이 많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옛말에 “천석꾼은 천 가지 근심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재물이 많아지면 근심도 그만큼 많아집니다. 인기가 있으면 만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왜 인기 있는 연예인들이 자살합니까? 잠깐의 인기 후에 찾아올 대중의 외면에 대한 깊은 불안감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영혼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 영생의 물을 추구하십시오 >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왜 그녀는 아무도 물을 길러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정오 시간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까?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사회의 버림을 받고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했습니다. 정오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동네 사람들의 조롱하는 혀를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운 모습입니까?
많은 현대인의 모습이 바로 그 여인의 모습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으로 향할 때는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결국은 패잔병처럼 된 자신의 모습에 좌절한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세상을 비관하고 더 고독한 자리로 숨습니다. 세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을 더 많이 경험하는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외로움과 상처와 불안으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복음과 말씀입니다.
또한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다섯 남편이 있었습니다. 마치 섬기던 교회가 다섯 개 있던 현대 교인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섬기는 교회가 많았다는 말은 그만큼 공허했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옮기면서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했겠습니까? 새들은 먹이를 찾아 국경을 넘습니다. 그처럼 목마른 영혼이 갈증을 해소하려고 맑은 물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마십시오.
안타까운 것은 맑은 샘물을 찾다가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또한 샘물을 찾다가 사이다와 콜라의 단맛에 취해 이빨과 내장이 썩는 것이 안타깝고 대형교회로 휩쓸리며 자기 존재의미를 사장시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 참고 참다가 교회 담을 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교회는 넘어서는 안 될 나바론의 요새가 아닙니다. 다만 교회를 옮길 때는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2가지 원칙을 반드시 따르십시오. 즉 신분상승을 추구하기보다는 신분하락을 감수하며 옮기고, 교회로부터 유익을 얻을 생각보다는 교회에 유익을 줄 생각으로 옮기십시오.
이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몰입되어 범사에 감사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룩한 나눔의 비전을 가지고 나눔을 실천하며 살게 하소서! 무엇보다 인간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논리에 익숙해지고 항상 말씀을 추구하며 살게 하소서!”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했고, 안식을 얻었고, 찬란한 비전을 발견했고, 그 비전을 향해 달려 나가는 힘을 얻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중심적인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고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말씀중심적인 삶은 기복주의와는 정반대의 삶이란 것입니다. 사실 물질과 건강과 성공과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복음을 이용하고 예수 이름을 내세우면서 나눔의 삶에 인색했던 기복주의로 인해 공허한 현대 교인들이 양산된 것입니다. 요새는 신앙의 반대말이 ‘불신’이 아니라 ‘기복주의 신앙’이라는 역설도 들립니다.
왜 요새 기독교 신앙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잘 주지 못합니까? 기독교 신앙의 구체적인 핵심 열매는 결국 ‘말씀의 나눔’과 ‘물질의 나눔’ 2가지인데 그 동안 몇 단계 성경공부나 각종 세미나 등을 통해 말씀을 나누려는 교인은 많이 양산했지만 물질을 나누려는 교인은 많이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은 은밀하게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삶을 실천할 때 영적인 공허함도 사라지고 한국 교회는 다시 이 시대의 희망 발전소가 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을 통해 참된 축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기복신앙을 깨뜨려야 합니다. 어떻게 기복신앙을 깨뜨립니까? 무엇보다 나눔을 체질화시켜야 합니다. 지금은 돈이 돈을 버는 시대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돈을 휩쓸어가는 시대입니다. 인기 있는 게임 하나만 개발해도 1조를 법니다. 그처럼 무서운 속도로 펼쳐지는 기계화 및 정보화로 인해서 사람의 노동력이 점차 설 땅을 잃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나눔의 뜻을 가진 사람이 없으면 부의 지나친 편중으로 인해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뒤집어집니다.
그런 비극이 충분히 예고되는 상황에서 잘 나눌 줄 아는 인물 성도가 나눌 줄 모르는 세상 사람에게 물질이 무섭게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물질적인 영역을 정복해서 자발적으로 나누는 거룩한 조정자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진 인물이 되고 그런 인물을 만드는 것이 바로 교인 및 교회의 중요한 책무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나눔의 비전을 이루도록 성공도 구하고 물질도 구하십시오. 성공이나 물질을 최종 목표로 삼지 말고 나눔을 최종목표로 삼으십시오. 나눔이 최선의 성공입니다. 그리고 나눌 때는 신앙과 나눔을 도전하는 특별한 목적 외에는 나눔을 드러내지 말고 은밀하게 나누십시오. 바로 그때 영혼을 채우는 은밀한 행복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나눔의 목표를 가지고 힘써 땀을 흘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전해주고 영생의 물이 흘러넘치게 하는 복의 근원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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