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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2:5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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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
창세기 22장 54-62절
< 첫 사랑을 지속시켜보십시오 >
첫 사랑의 감정을 다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설렙니까? 교만한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약간 수줍음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참 좋게 보입니다. 물론 첫 사랑이 다 좋지는 않습니다. 감정적이기에 금방 무너지는 약점도 있습니다. 그런 약점만 빼고 첫 사랑의 좋은 감정을 오래 유지하면 신앙생활이 참 예뻐집니다. 이틀 전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외모가 내세울만한 목사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얼마 전에 대화 중에 "나는 촌뜨기 목사라 별 볼일 없지요!"라고 말하니까
한 여자 집사님이 "그래도 목사님의 속은 참 세련됐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참 힘이 났는데, 그 여자 집사님은 항상 그렇게 말해준다고 합니다. 또 며칠 전에는 갑자기 두 분의 집사님이 그 목사님 사무실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책상 위가 너무 지저분해서 "집사님이 오는 줄 알았으면 치워놓을 걸..." 하니까 연대 교수로 계시는 한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목사님! 무슨 말씀이세요? 공부하니까 그렇지 공부 안 하는 사람 책상이 깨끗해요."
그 말을 듣고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는데, 항상 변함없이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오래 같이 있다가 보면 첫 사랑의 좋은 감정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사랑을 성숙시켜 가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런 첫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가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그런 첫 사랑의 회복을 도전하는 음성이 아닐까요?
< 벧엘의 하나님 >
오늘 본문을 보면 첫 사랑을 도전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나옵니다. 먼저 본문 앞 창세기 33장을 보면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한 후 세겜성에 거하는데 거기서 세겜 성 추장의 아들에게 야곱의 딸 디나가 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성 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을 모두 몰살시켰습니다. 이제 그 지역 사람들도 복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아주 다급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왜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리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까? 그곳은 에서를 피해 도망갈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의 약속, 축복, 그리고 야곱의 순수한 서원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벧엘은 야곱에게 있어서 생각만 해도 힘이 되는 신앙의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려움에 빠진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1절)"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1. 첫 사랑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돌아와서 세겜 땅에 머물면서 편안하니까 예배를 잊어버립니다. 사실 세겜 땅이 황량한 벧엘보다 훨씬 살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입니다. 벧엘은 살기는 힘들어도 하나님을 만난 체험과 약속이 있는 땅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디나 사건을 통해 야곱을 벧엘로 돌아가 첫 사랑을 찾게 만듭니다.
왜 시험이 옵니까? 시험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다시 새롭게 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과 약속했던 그곳, 나타났던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과거의 첫 사랑으로 돌아가서 열심을 다할 때 환난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첫 사랑을 하던 때처럼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단을 쌓아야 합니다. 벧엘은 야곱이 낮아진 곳입니다. 벧엘에서 야곱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겜에서 야곱은 가진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음까지 높아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됐다!"고 할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벧엘로 가게 하십니다.
항상 첫 사랑의 뜨거움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뜻일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삭개오가 가끔 말없이 집을 나갔다가 얼굴이 퉁퉁 부어 돌아오니까
하루는 이상히 여긴 그의 아내가 삭개오의 뒤를 조용히 미행하며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뽕나무로 가서 그 나무에 물을 주고 난 후, 그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기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삭개오의 뽕나무'처럼 은혜 받은 자리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기억하며 그때 하나님을 예배하던 그 열심과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2. 안식하라는 말입니다.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안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쉬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에게도 "공부하라!"는 말만 하지 말고 쉬는 시간을 가지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쉬면 뒤쳐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쉬게 하면 훨씬 유능하게 됩니다. 오래 책상에 앉아 있다고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쉴 때는 쉬는 것이 좋습니다.
자녀들을 쉬지 않게 하고 끊임없이 몰아서 그들이 좋은 대학에 가면 다 됩니까? 어떤 분은 집사님인데 교회 여름수련회에까지 아이들을 공부하라고 보내지 않습니다. 그때 공부 조금 더 한다고 더 좋은 대학을 가고, 더 좋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을 '공부만 잘하는 마마보이와 마마걸'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에 공부만큼 중요한 것도 많습니다. 믿음, 사랑, 예의, 사회성, 창조성, 인간성, 지도력 등 중요한 덕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덕목들은 사실상 부모의 배려로 잘 쉴 줄 아는 아이들에게 더 발달됩니다.
며칠 전 지방에서 목회하는 어떤 목사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회 회장을 했는데, 그때 학생회 임원 중 반 이상이 새벽기도회에 나왔고, 가끔 철야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 생각으로는 큰 난리가 날 것 같고, 인생의 낙오자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그때 임원들 대부분이 사회를 이끄는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놀 줄 모르면 정신이 황폐하게 됩니다.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어야 합니다. 쉴 때 누군가 나를 앞설 것이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짜 걱정도 팔자입니다. 오히려 그 걱정이 나의 발전에 방해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암적인 요소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쉬면 그 쉬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정신도 맑아지게 됩니다. 인디언들은 앞으로 달릴 때 가끔 서서 뒤를 돌아보고 무언인가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무엇을 기다릴까요? 자기를 아직 좇아오지 못한 자기의 영혼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때로는 그런 인디언의 모습처럼 우리도 가만히 서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의 삶을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3. 예배를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쉬는 것과 안식하는 것의 차이가 있다면, 안식은 하나님 품에서 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쉬는 것도 유익하지만 하나님 품에서 쉬는 것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때만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쉬는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빠지면 그것은 참된 안식이 아닙니다. 특히 위기에 빠졌을 때는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급한 야곱에게 먼저 하신 말씀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입니다. 예배의 회복은 영혼과 육신의 건강 회복의 기초이고, 축복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잠언4: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그러나 예배를 가볍게 여기고 멀리하면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모든 축복도 사라집니다.
일전에 어떤 존경하는 귀한 목사님의 막내아들이 예배 드리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자기들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하나님까지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포기하면서 그분은 한 10여 년 동안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을 다시 찾고 예배를 회복하면서 큰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분이 바로 주기철 목사님의 막내아들이신 극동방송 부사장 주광조 장로님입니다.
< 예배자가 가져야 할 바른 자세 >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예배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어려움을 통해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야곱은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가족과 모든 종들에게 단호한 조치를 취하게 합니다. 어떤 조치를 취합니까? 본문 2절에 보면 세 가지 조치가 나오는데 이것은 예배자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1) 이방 신상을 버려야 합니다.(영적인 변화)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이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 그들 중에 이방 신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그때그때 필요한대로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처럼 지금도 교회는 나오지만 마음속에 이방 신상을 그대로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리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바로 이방 신상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아직도 돼지 대가리 놓고, 육갑(六甲) 떨고, 사주 팔자를 보면 안됩니다. 상팔자는 생년월일로 지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으면 다 상팔자가 될 것입니다.
2)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마음의 변화)
계속해서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신을 정결케 하고..." 왜 자신을 정결케 합니까? 문제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피해의식'을 가지면 원망만 생깁니다. 그러나 문제 속에서 "내가 가해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면 원망은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를 돌아보고 다듬으려는 모습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거울에 우리 얼굴을 비치듯 하나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비춰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의 창에 비친 내 마음속에 욕심과 위선과 거짓의 모습이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면서 점차 우리의 마음은 정결한 마음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그릇도 쓰시고, 돌그릇도 쓰십니다. 그러나 더러운 그릇은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바꾸면 하나님은 그 모습을 대견히 보시며 축복하실 것입니다.
3) 의복을 바꿔야 합니다.(태도의 변화)
계속해서 2절 말씀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의복을 바꾸라." 마음을 바꾸는 개심(改心)을 했으면 실제로 겉모습을 바꾸는 개혁(改革)도 해야 합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하면 생활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은 사실 큰 실패가 아니라 작은 나쁜 습관입니다. 작은 것이라고 해도 나의 장래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들이라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개혁과 갱신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개혁하고 갱신하면 삶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1851년 미국에서 영적 각성이 일어났을 때 술집 주인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습니다. 어떤 술집 앞에는 이런 팻말을 붙어있었습니다. "폐업 공고. 어제 주인이 회심했음." 우리가 진정 복 받는 인생이 되려면 끊임없이 신앙을 새롭게 하려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렇게 야곱이 결단하니까 가족과 식솔들은 자기들의 이방 신상들을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그 모든 이방적인 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벧엘로 떠납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떠나니까 하나님은 야곱 일행을 추격하는 자가 없게 하셨습니다(5절). 이 장면에서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면 아무도 우리를 대적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잠언 16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잃어버리면 사람들이 우리의 대적이 될 것이지만 예배를 회복하면 원수와도 잘 지낼 수 있고 우리를 돕는 자가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잘 하는 길은 무엇보다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 최상의 길입니다. 사실상 예배가 회복되면 우리의 삶의 모든 얽히고 병든 부분도 같이 회복될 것입니다.
<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바른 예배 자세 >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를 중시하는 것을 우리의 태도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까? 몇 가지만 살펴볼까요?
1) 시간을 잘 지켜야 합니다.
시간 잘 지키는 것은 인격과 인격이 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상대방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면 반드시 시간 전에 나와 먼저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저 그런 사람이라고 여기면 시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의식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무시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시간 관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지혜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예배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 하나님이 정말 소중한 분이고, 예배가 정말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이제부터 예배 시간을 잘 지키려고 더욱 애쓰시길 바랍니다. 나의 시간과 나의 인격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분의 시간과 인격도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마음 안에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능한 성도보다는 마음을 드리는 성도에게 더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2) 정성스럽게 예배드려야 합니다.
어떤 분은 헌금할 때 꼭 새 돈으로 합니다. 그 새 돈을 보면 정성이 느껴집니다. 꼭 그렇게 해야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정성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복장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오면 그 모습 속에서도 정성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많은 능력'이 아니라 바로 '정성'입니다.
주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 중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가장 칭찬하시면서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라고 그들의 정성을 칭찬하셨습니다. 빌라델리아 교회는 능력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은 없었지만 정성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뱃세다 광야에서 어린아이가 드린 떡 5개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것이 적어도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우리가 비록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주신 능력 안에서 정성껏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그 정성을 받으실 것입니다.
3) 예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백성들의 불평이 참 많이 나오는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말라기서입니다. 말라기서 곳곳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불평을 요약하면 "정말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십니까?"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면 왜 우리가 이렇게 어렵습니까?"하는 것입니다.
그 불평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약하면 "너희가 어렵다고 불평하지만 정말 정성을 다해 예배 드렸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불평이 생기려 하면 "내가 정성을 다했나?"를 먼저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때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흉내만 내기보다 마음을 다해 해야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억지로 일하는 모습을 봐도 민망한데 억지로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민망합니까?
참 예배란 내 뜻이 주님의 뜻에 완전히 몰입되어 기쁨이 나오는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예배에서 내가 주인공처럼 최선을 다해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인정받으려면 주인의식이 필요하듯이 예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의 설교, 장로님의 기도, 성가대의 찬양을 들으며 구경꾼으로 있으면 안됩니다. 기도 할 때도 "아멘"으로 화답하고 말씀을 들을 때도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분은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해서 손님처럼 "예배 본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손님으로 예배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항상 첫 사랑의 열정이 넘치는 예배로 은혜의 길을 열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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