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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처럼 비상하고 구절초처럼 아름다워라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856 추천 수 0 2013.10.20 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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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26-3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3.10.13 주일 http://sungamch.net 
새처럼 비상하고 구절초처럼 아름다워라
마6:26-34

예수님의 짧은 일생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밖’과 ‘예루살렘 안’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도시와 비도시, 도시 문화와 자연 문화, 지배 권력과 지배당하는 백성의 구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다시 종교적인 타락과 새로운 종교가 출현되는 장의 대비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안은 떠들썩한 정치, 종교 권력, 모함, 배신, 술수가 자라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밖은 가난과 추방, 고난과 아픔이 있지만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안과 밖 어디에 그의 생각과 삶의 거점을 두고 사셨을까요?

그렇죠. 예루살렘 밖입니다. 예루살렘 안은 비극이 서려 있고, 끊임없이 욕망에서 잉태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안에서는 독설을 퍼붓고 피눈물을 흘리셨고, 쓰라린 배반의 아픔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안에서 십자가의 고통도 감내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악의에 차서 어떻게든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만 했습니다. 예수뿐만이 아닙니다. 누구든 예루살렘 안에서는 그곳의 기득권자들과 같지 않으면 정죄하고, 단죄하고, 추방했습니다. 사람의 허물을 찾아내기에 혈안이 된 곳이 예루살렘 안입니다.

도시를 세운 최초의 인간은 카인입니다. 도시는 카인의 후예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도시는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이리가 되는 역설적인 황무지의 터다’라고 홉스라는 이가 말했듯이, 예루살렘 안은 인간이 인간에게 이리가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밖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 밖에서 존재한 분입니다. 병을 고치는 일, 사람과 밥을 먹는 일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 밖에서 하신 일들입니다. 예루살렘 밖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안에서 둘러엎은 상을 도로 반듯하게 놓으신 다음에 거기 밥을 차려 사람들과 함께 잡수셨습니다.      

우선 태어나신 곳이 예루살렘 밖 ‘베들레헴’입니다. 그리고 자라기는 ‘나사렛’이라는 촌 동네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을 갈릴리라는 가난뱅이들이 사는 바닷가에서 사셨습니다. 이렇게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가르치고, 만나고, 먹는 장소는 모두 예루살렘 밖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바보들이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성안에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에, 삶에,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자, 이제 예루살렘 밖과 안이라는 말이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정신적인고도 신앙적인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종교는, 신앙은 그러므로 성안의 신앙이 아닙니다. 성 밖의 신앙에서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어떻습니까? 성안의 정신과 삶을 지향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썩어문드러지는 것입니다. 이런 성안의 신앙은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욱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이기적이기 때문이고, 탐욕적이기 때문이며, 권모술수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오늘날 기독교 현실입니다. 예루살렘 성 밖의 종교가 되어야 했는데 그만 예루살렘 성안의 종교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 안의 존재’냐 아니면 ‘성 밖의 존재’냐를 바탕으로 예수의 설교,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그가 하시는 모든 가르침과 말씀은 ‘예루살렘 밖’의 사람들, 예루살렘 밖의 가치들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삶의 장소는 갈릴리 해변과 그 주변입니다. 지중해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날아온 갈매기들이 호수 위를 날아다니고, 멀리 북쪽으로 헬몬산의 서늘한 바람이 능선을 타고 도는 어느 날 그는 그를 따르는 ‘예루살렘 밖’사람들에게 말씀을 합니다. 마치 우리가 토요일에 산에 가듯이, 가다가 이런 이야기 저런 대화를 나누듯 그렇게 하는 겁니다. 호수 곁으로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습니다. 유채꽃 같은 것들이 언덕을 뒤덮고 있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성 밖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에 겨워 박수를 치고 얼굴 가득하게 웃음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들판의 계절 꽃들과 새들을 보며 말씀을 하십니다. 대단한 말씀도 아닙니다. 그런 장소에서 누구나 할 만한, 다른 설명이 깃들이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저 공중에 나는 새들을 보라, 창공을 자유로이 비상하는 저 새들을 보라.”
“저 백합화(아네모네)를 보라. 솔로몬의 영화보다 아름다운 저 새들을 보라.”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근방의 산 언덕에서 들판의 꽃들과 새들을 바라보고 있는 군중들은 사실, 사람을 얽매는 제사장적 종교 즉 ‘예루살렘 안’의 틀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갈 수도, 그곳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없는 무지랭이 들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성 밖의 사람들’유대인의 율법에 의해 저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가 말하고 계신 겁니다. “저 공중에 나는 새들을 보라, 창공을 자유로이 비상하는 저 새들을 보라.” “저 백합화(아네모네)를 보라. 솔로몬의 영화보다 아름다운 저 새들을 보라.”

예루살렘을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서울을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63빌딩을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난 사람들을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거물이 큰 성전을 보라고하지 않습니다. 들판의 꽃, 하늘의 새를 보라는 겁니다.

무슨 의미가 담긴 말씀일까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받아 들였을까요? “진정한 신앙은 예루살렘에 있지 않다. 거기서 하는 사람들의 형태에도 있지 않다. 신앙은 예루살렘을 지향하는 게 아니다.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저 새들처럼 하늘을 나는 것이다. 자유로이 비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안에서 지지고 볶고 모함하고 추방하는 게 아니라 저렇게 비상하는 것이다. 해방되는 것이다. 쩨쩨하게 바리새인의 율법에 얽매여 사는 게 아니다. 너희들은 성 밖으로 쫓겨난 게 아니라 저런 녀석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니 주눅 들어 하지 말고 어깨를 펴고 창공의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라. 저 새들보다 너희가 못난 게 무어란 말이냐?”이런 의미가 담긴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겠습니까?

기독자가 된다는 것은 ‘예루살렘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밖’으로 날아 나오는 것입니다. 사회. 종교적으로 이미 ‘예루살렘 밖’에 살 게 된 이들은 그걸 저주라고 생각지 말고 축복의 기회로 여겨 당당 하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루살렘 안’에 사는 사람들은 거기 있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지 말고 부끄럽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성 안’에 있는 걸 특권인양 하고 그게 행복이라고 오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내 던지고 예루살렘 밖으로 나오라는 말입니다.

가을 들판의 쑥부쟁이를 보고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솔로몬의 영화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성 밖에서, 성안의 삶을 동경하고 기웃거리는 세상을 향해 화살처럼 던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성 밖에서 성 안으로, 기득권 밖에서 기득권 안으로, 힘없는 자리에서 힘 있는 자리로 들어가는 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기독자의 축복이라고 설교했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거, 꽁지에서 머리가 되는 게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를, 예수를 크게 오역하고, 크게 잘못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모독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이란 게 뭡니까? 개인주의의 영화입니다. 자기 혼자만 누리는 영화입니다. 정치적인 영화입니다. 남을 종처럼 부릴 때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물질적인 영화입니다. 남의 몫을 빼앗아 내 것을 삼는 기쁨입니다. 이게 성전 안에서 도모되는 영화였습니다. 이게 솔로몬의 영화입니다. 이걸 사람들은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걸 거부합니다.

이런 영화, 이런 축복, 이런 기쁨을 거부하라고 들판의 쑥부쟁이, 가을 국화, 구절초의 영화를 말하고 계신 겁니다. 성 밖의 이것들은 예루살렘 안의 그것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 밖의 영화, 하늘을 비상하는 철새의 자유는 남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혼자만의 기쁨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늘로 오르기만 하면 되는 열려진 무한의 행복입니다.

오늘 말씀은 모름지기 기독자라면 성 밖으로 나가 이런 영화를 추구하라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이런 영화는 ‘예루살렘 안’에서는 얻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가을 쑥부쟁이와, 하늘을 나는 철새들의 군무는 오늘 우리에게 성서와 진배없습니다. 예수님이 현현하셔서 나타내시는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적인 메타포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비상의 기개와, 호연지기의 자유와, 이름 없음의 역설과, 좋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예수님의 이 문장은 위대한 비젼이고, 위대한 시어입니다.

이제 이 말씀은 좀 더 진화하여 이런 문장으로 우리에게 바뀌어졌습니다.

“너희들은 공중을 나는 새처럼 살아라. 너희들은 가을 들판의 쑥부쟁이, 구절초, 가을 국화처럼 살아라. 쩨쩨하게 세상이 지어놓은 울타리 안에, 경쟁과 욕망의 울타리, 배반과 탐욕의 울타리, 분노와 절망의 울타리 안에서 피터지게 싸우지 말고 자유 하라.”

이게 예수 복음, ‘예루살렘 밖’예수의 삶이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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