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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롬15:1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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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삶
로마서 15장 14-16절
< 소외된 사람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 >
1998년에 노벨문학상을 탄 '주제 사라마구'는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책에서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믿게 된 과정을 여러 자료를 통해 이렇게 그려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전도하다가 동구 밖에서 실족해 다리를 다치셨습니다. 외딴 그곳에서 급히 찾아간 곳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 영업을 하던 집이었습니다.
그녀는 문밖에 계신 분이 점잖은 분인 줄 알고 "이곳은 창녀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바로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 책에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만약 그때 "더러운 것!" 하고 피했다면 위대한 주님의 여종 마리아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주셨습니다. 일주일 후, 예수님은 전도하다 그곳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녀가 궁금했습니다. "지난 번 대화로 마리아가 변화되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창녀 일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아직도 그 일 하느냐?"고 할 수 없어 "요새 손님이 많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녀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저도 한 여자로서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았고 "나를 따르라!"고 해서 여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임을 알았지만 그 집 문을 박차고 나오지 않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주님은 창녀에게도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해가 생길 것입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에 의해 이상한 소문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죽어도 오해할거야!"라고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 오해를 풀어주겠습니까? 억지로 오해를 풀려고 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이해시키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랑만은 하려고 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해라는 것에 너무 매달려 거룩한 삶의 용기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오해가 있어도 사랑의 자리를 회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우리는 지극히 멸시받는 자와 기쁘게 함께 하셨던 주님을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항상 환영받는 사람, 매력적인 사람, 있는 사람만 찾는다면 결코 성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 어려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
우리는 어렸을 때 "인기 있고 잘생긴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도 중학교 3학년 때 전교에서 최고로 잘 생긴 친구가 짝이 되었을 때 참 좋았습니다. 혹시 성인이 된 지금도 그런 생각은 없는지요?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그렇게 행동합니까?
멋있는 사람, 앞서가는 사람, 훌륭한 사람, 매력적인 사람과 가까운 것은 기분 좋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사람, 불쌍한 사람, 없는 사람과 사귀는 것은 사실상 더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약한 사람과 사귀면서 나의 명예를 나눠주는 기쁨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을 가까이 할 때 더 점수를 주실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특히 내가 가진 명예를 나눠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실 때 세리와 창기와 함께 하심으로 그 명예를 나눠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까지 얻으셨습니다. 주님이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도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말로만 친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말로만 정의감이 넘치면 오히려 혼란만 커집니다. 공산주의의 기반이 된 칼 막스의 철학은 노동자에 대한 애정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칼 막스의 전기를 기록한 폴 잔슨은 그의 삶이 자신의 철학과 전혀 달랐다고 합니다. 실제로 칼 막스는 중산층 지식인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노동자들을 무시했으며 일생 노동자 친구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항상 가족이나 이웃과 많이 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하녀 두 명을 데리고 살면서 누구보다 사치스럽게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정의를 말하는 사람의 정의롭지 못한 태도를 참 많이 목격합니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을 말하면서 노동자 친구가 하나도 없는 그런 정의가 참 많습니다. 성도도 말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과 반대되는 길로 가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실천이 없는 삶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수 없고 남과 나눌 은혜도 없게 됩니다.
< 서로 은혜를 권하는 자가 되십시오 >
오늘 본문 14절 말씀을 보면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권하는 자'였다고 합니다. 무엇을 서로 권했을까요? 서로 잘못한 것을 훈계하고 가르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15-16절 말씀을 보면 사실상 그들이 서로 권한 것은 '은혜'였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내게는 이런 은혜를 주셨어!" 하면서 서로 격려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서로 은혜를 권하고, 칭찬하는 말로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어야 합니다. 은혜를 나눌 줄 알고, 남을 칭찬해줄 줄 아는 사람이 결국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옛날에 황희 정승이 시골을 가는데 밭에서 누렁 소와 검은 소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황희 정승이 농부에게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대답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 황희의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검은 소가 잘해요." 황희 정승이 "왜 진작 말하지 않고 이제야 말합니까?"고 하니까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아까 물었을 때 누렁 소가 다 듣고 있었습니다. 나의 말을 누렁 소가 다 알아듣는데
일하는 소에게 힘을 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일하는 소에게 용기를 주어야지요."
그때 황희는 격려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하여, 훌륭한 재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짐승에게도 그처럼 용기를 주려고 하는데 사람에게는 더욱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고, 격려해 주고, 칭찬해 줄 때 그 사람이 큰 일을 하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유일하게 어머니만 자기를 칭찬해주셨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 한 분의 위로가 어떤 재산이나 능력보다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전도사 때 설교하면 언제나 어머니는 앞에 앉아 은혜 받고 눈물 흘리셨고, 간간이 "얘야! 오늘 설교에 참 은혜 받았다. 잘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처럼 어머니가 칭찬해 주시니까 부족해도 용기가 생겨서 꾸준히 목회를 했고, 15년간의 고생 끝에 아파트 단지에 입주할 때 함께 들어와서 큰 교회를 이뤘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부족해 보여도 그 부족함을 고치는 가장 좋은 길은 칭찬입니다. 칭찬을 통해 은혜를 서로 권해야 합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 은혜란 무엇일까요? >
그런 로마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간증을 합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1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된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선교를 통해 이방인들을 하나님 믿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최고의 은혜였습니다.
병이 낫는 것! 은혜입니다. 성공하는 것!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은혜는 이방인들을 믿게 하고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 선교에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비참하게 사는 나라가 많습니다. 그 나라들에는 대개 복음이 없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도 하지만 여러 다른 축복도 가져다준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긴다면 무엇보다 그들에게 복음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도 한때 참 비참하게 살았지만 선교사를 통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습니까? 수많은 선교사가 우리 나라에 와서 복음의 씨를 뿌렸고 그들의 피를 뿌렸습니다. 1960년대 이전까지 길거리에 다니는 외국인의 90% 이상이 선교사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양화진에는 230명의 미국 선교사를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들의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나라를 자기 나라보다 더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을 위해 희생을 피를 흘렸기에 우리 나라가 이만큼 사는 것입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지금 수천 명의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자녀들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고, 좋은 것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합니다. 지난번에 몽고에 계시는 김재호 선교사님 가정과 춘천닭갈비집에 가서 식사를 했을 때 두 아이들이 그 맵고 짠 음식을 "너무 맛있다!"고 하면서 배가 터지도록 먹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안쓰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흔한 음식이 그렇게 맛있었던가 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나 자신만 위해 살 것입니까? 부귀, 영광, 물질, 권세, 쾌락이 좋아 보여도 지나놓고 보면 얼마나 허무한 것입니까? 배고픈 영혼을 외면하며 살다가 천국이 가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요삼일육선교회를 조직해서 여러 선교단체와 선교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와야 할 예산에 비해 정기 선교 후원회원은 지극히 적은 실정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교인들이라도 먼저 솔선수범해서 후원회원으로 가입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작은 정성이 선교지에서 고생하는 분들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의 씨를 뿌리며 살아가는 분들이 되십시오. 빚을 갚는 자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정상 선교 나가지 못해도 선교사님들을 후방에서 많이 도울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대신 나가있는 선교사를 기도와 물질로 돕고 힘써 선교에 동참할 때 우리 영혼이 건강해지고, 우리의 삶의 지경도 넓혀지고,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황수 목사님이 오셔서 중국 선교에 대한 말씀을 전해주실 것입니다. 많이 참석해주십시오. 선교지 소식을 많이 들어야 기도도 구체적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선교를 외면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기복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기만 하지 말고 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삶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리 변명해도 기복주의일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이방인을 위해 마음을 여는 만큼 우리의 영혼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 장애인 선교에 힘을 쓰십시오 >
그런데 우리가 다른 나라에 선교하는 것 외에 꼭 힘써야 할 이방인 선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위에 있는 장애자들에게 복음과 사랑과 관심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편견으로 신음하고 고통받는 장애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 관심이 전혀 없는 신앙은 결코 정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병든 신앙일 것입니다.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그리스도인 부모님들이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면서 자신들의 영적 장애를 발견하게 된다는 고백입니다. 장애인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깨우치려 보낸 사랑의 편지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을 섬기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에 답장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인간문화재 가운데에는 병신춤을 추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장애인의 약점을 흉내내어 춤추는 사람을 인간문화재로 보호할 필요가 있을까요? 연약한 자의 약점을 흉내내면서 즐거워하는 이 모습이 얼마나 미성숙한 모습입니까? 연약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모습은 결코 천국 백성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로마 시대에 장애인은 부모에 의해 노예로 팔리거나, 투기장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심한 경우에 중증 장애아동은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광장에서 목매달아 죽였고, 후천적으로 장애를 입은 아동은 죽여도 전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시대에 주님은 사랑으로 장애자를 치료하시고, 장애자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장애자를 업신여긴다면 그 사람은 결코 주님의 사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
우리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 편견을 가지는 것이 더 큰 장애입니다. 외모보다 인격이 더 중요합니다. 큰 집, 큰 차, 골프 회원권보다 교양이 더 중요합니다. 요새 미인대회가 큰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누가 미인의 기준을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남태평양에 가면 뚱뚱해야 최고 미인이고, 아프리카 오지에서는 코를 뚫어야 미인입니다. 외적인 것만 평가하고 정신적인 면을 평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십시오. 그분들은 하나님이 참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것은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 편견을 버리면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사람이 바로 보이고, 하나님도 바로 보입니다. 모든 것이 바로 보이면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오해하지 않기를 원하면 우리의 시선을 장애인을 향해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장애인과 함께 울고 함께 웃기를 즐겨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들의 눈물을 헤아릴 줄 모르면 믿음의 축제 후에 남은 것은 허전함뿐입니다. 주님은 항상 큰 자의 모습보다는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어느 날 성 프랜시스가 십자군 전투에서 쓸쓸하게 돌아오는 한 패잔병을 만났습니다. 옷은 누더기가 다 된 채 쓸쓸하게 강아지처럼 빼빼 마른 말을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날 따라 몹시 추웠는데 바람이 부니까 이 노병정이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너무 안쓰러워서 프랜시스는 자기의 망토를 그에게 씌워주었습니다. 그날 밤, 프랜시스의 꿈에 주님이 그가 벗어준 망토를 입은 상태로 오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려운 자를 환대할 때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찾아주실 것입니다.
< 장애자를 어렵고 힘든 사람을 구체적으로 도우십시오 >
우리는 장애자의 눈물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그들의 필요에 반응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이해나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장애자들은 참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얼마 전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인 최옥란 씨가 자살했습니다. 그녀의 꿈은 소박했습니다. 9살 난 아들을 잘 키우며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지원하는 한 달 30만 5천 원으로는 너무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노점상을 하면서 살아보려고 했지만 약간의 수입이 생기면 정부의 지원이 줄고, 임대주택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말을 노점상을 포기하고 일하는 것도 포기합니다.
그녀에게 일의 포기는 아들을 포기하는 것이었고, 아들을 포기하는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장애인들에게도 살 권리를 달라고 싸우다가 끝내 죽음을 택했습니다.
"냉랭한 이 세상에서 더 살아서 무슨 낙이 있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장애인들은 더욱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어려운 장애 이방인들의 형편을 듣거나 보기를 꺼려합니다.
그들의 어려운 형편을 듣고 보게 되면 자신의 삶에 평온이 깨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으로 말씀을 봐도 선교나 후원에 관련된 글은 왠지 클릭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 내가 도와야 할 이웃이 보이며 내 삶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교지의 상황을 알면 나는 전과 같이 먹고 즐기며 살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면 현재 내 삶은 사치가 되고, 괜히 죄책감만 생길텐데 그러면 나만 피곤해!"
사람들은 대개 이웃의 고통에 마음을 열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 곁에 머물러 서지 않고, 바라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만치 멀리 서서 안타깝다는 듯이 말합니다. "왜 세상은 이처럼 불공평하지!" 더 심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하나님은 세상을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셨지!"
그리고 자기는 재빨리 일상사 안으로 숨어버리고,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이 편하긴 하겠지만 그런 삶에 행복이 찾아올까요? 사는 보람이 있을까요? 선교를 외면하고, 구제를 외면하면서 어찌 우리의 영혼이 맑은 영혼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장애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그들은 존중하고, 그들을 따뜻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삶의 어둠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영혼의 묵은 때는 조금씩 씻겨질 것입니다. 장애인 시설에 가서 정기적으로 목욕 봉사는 하는 한 소방 공무원의 말입니다. "제가 그들의 몸을 닦아줄 때 오히려 내 영혼의 때가 벗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과 가까이 할수록 우리 영혼은 맑아질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 합니다(전 3:12). 그러므로 진정 복된 삶을 원하시면 선교와 구제에 최선을 다해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장애 이방인들에게 위로와 사랑을 나눠주지 않는 신앙은 결코 복된 신앙이 아닙니다.
< 장애인과 하나되는 세상을 꿈꾸십시오 >
장애인과 하나되어 어울리는 세상!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모습을 아름답게 보실까요? 그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장애인들을 위해 무엇을 봉사해주고, 무슨 물건을 주고, 무슨 편의를 봐 주는 것보다 장애인들도 하나님 앞에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입니다. 내가 소중하듯이 저 사람도 소중합니다. 더 나아가 저 사람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철든 인생이 됩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과 장애 이방인들이 행복을 찾는 삶! 그런 삶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장애우)은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치 죄인처럼 위축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자기 스스로 갇혀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축되어 남 앞에 잘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보고 다가가면 그들은 마음을 열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편견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향하도록 환대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따뜻하게 대해주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그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환대하고, 용기와 격려를 주면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입니다.
때로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보다 작은 불꽃이 우리에게 더 희망을 주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작은 불꽃의 의미는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들은 우리의 삶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작은 불꽃입니다. 우리는 그 불꽃들을 큰 불로 피워내는 불쏘시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장애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낼 때 주님은 우리를 따뜻하게 보실 것입니다.
여러분! 장애자의 친구가 되어주셨던 주님처럼 장애자의 친구가 되는 삶을 사십시오. 장애자의 친구가 되어주는 삶이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복된 삶일 것입니다.
이한규 목사(분당샛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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