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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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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요3:16-17
2010. 10. 3, 오전
* 창세기 강해를 조금 쉽니다. 금년이 다 가는데 '독수리 같이 비상하는 교회'라는 주제의 말씀을 전하여 모든 성도가 함께 비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에 이어서, 세상을 섬기는 교회, 그리고 왜 비상해야 하는가?로부터 어떻게, 언제? 누가 비상한 사람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주 간단한 주제인데 원고보다는 쉽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핵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믿음의 사람들이 중요시 하는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나라와 이 세상이 연결되어 설명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우리 신앙의 요소가 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역동적인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며, 다음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기에 이 본문은 하나님 말씀가운데서 말씀이고 신앙생할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열쇠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나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와 이 세상을 대표하는 사회, 두 세계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삶의 모습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교회 밖은 세상입니다. 복음은 교회 안에서만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담과 영역을 뛰어넘어 세상 속으로 퍼져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천상의 세계, 즉 하늘나라를 떠나 세상에 오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도 교회를 떠나 세상에 확산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명제는 교회가 선교와 선포를 주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실천장입니다.
우리 사회는 멸망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세상이요 예수님이 밟으신 이 땅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요 그리스도의 지체된 우리들이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신앙의 실천현장이자 사랑의 실천현장입니다. 세상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예수를 욕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욕을 먹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 12월에 부흥회를 합니다. 만약 "회사일 잠시 쉬고 이번 부흥회기간 3박4일 동안 교회차 운전하고 교회일 해야 복받는다"고 한다면, 회사 사장님과 사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복음이 아니라 저주요, 안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생활도 잘 해야지만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도 성공적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보냄을 받은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사랑을 실천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세상이란 어떤 뜻이 있습니까? '전적으로 자력에 의존하고 복음의 적대자로 등장하는 이방인의 사회' 멸망하도록 결정된 전인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세계가 하나님 나라의 영역입니다. 세계는 위대한 하나님의 활동무대입니다. 그것은 화해된 세계요(고후 5:19),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계요(요 3:16), 그리고 그분이 사랑으로 승리한 세계입니다(요 16:33).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씨가 심겨진 밭이요, 따라서 세계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무대입니다.
이런 세상을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를 위해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의 한 부분으로서 사용하게 되는 범위에서만 참으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에큐메니칼', 즉 온 세상을 지향하는 일 외의 다른 존재방식은 없습니다. 교회는 자신을 떠나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것이고, 세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단이요 도구입니다. 교회의 참 존재의 근거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다는 것을 아는 교회는 교회 자체가 곧 선교가 됩니다. 교회는 바로 세상을 향하고, 세상을 위하고,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선교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없고,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선교가 되지 못한다면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는 「흩어지는 교회」에서 올바른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질서는 하나님-세계-교회이지, 하나님-교회-세계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질서에서만 교회가 교회 밖으로 제대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이기에 교회는 밖으로 나가 세상 속에 흩어져야 합니다.
호켄다이크는 오늘 우리는 탈출 문화(an exodus-culture) 속에 있다고 합니다. 탈출은 시대적 유행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기치를 휘날리지도 않고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이, 그리고 새 주거지를 알려 주지도 않고 그들의 옆 거주지로 떠나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도시 교회들이, 사람들이 왔다가 다시 훌쩍 떠나가 버려서, 비둘기집 같은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고 있습니까? 흩어져 버린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이렇게 흩어진 속에서 여기저기 작은 집단으로 밀려다니는 '교회의 백성'을 찾게 될 것이며, 교회는 디아스포라 교회(diaspora-congregation)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정죄 밑에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벌써 심판 밑에 놓여 있습니다. 정죄되어 있는 세상을 위해 교회는 화해와 사죄와 용서의 복음을 가지고 그 속에 들어가기 위해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에, 불신으로 이미 정죄된 사람에 대한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그냥 있을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롬 8:1). 신자는 최후의 심판에서 제외되었지만 세상은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 사람은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그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로부터 심판 아래 놓여 있던 그들이 유일한 용서의 기회요, 방법인 믿음을 거부함으로써 그 심판이 이미 확정된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이 정죄 밑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해 교회는 흩어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섬김으로 그들을 자발적으로 주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정죄 밑에 있는 심판받을 삶이란 긴장, 경쟁, 사회부정의, 착취, 불안, 수치, 죄책, 질병, 비극 등 이 모든 것이 매일의 생활에서 반복되는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의 필연적 삶의 편린들입니다. 타락된 세계에서 타락된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폴 틸리히는 죄책, 불안, 비존재에의 공포를 현대적 상황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판과 정죄 밑에 있는 세상 사람의 정황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가지고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진리의 빛을 몰아낸 어둠의 세력 때문에 교회는 또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진리의 빛을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이 어둔 세상을 향해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둠의 세상을 향해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진리의 좋은 소식입니다. 희망의 좋은 소식, 평화의 좋은 소식, 하나님의 약속의 기쁜 소식, 영생의 좋은 소식, 사랑의 좋은 소식,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복음, 즉 진리의 소식이 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못했다가(욥 23:3), 그가 오심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수의 신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인간의 실존에 적중되는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위대한 영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왜 그렇게 서구에서 무능하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왜 서구 교회는 몰락하고 있습니까?
솔제니친은 1976년 3월에 BBC파노라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서구의 갑작스런 몰락, 그리고 임박한 서구의 멸망에 대하여 그리 놀라지 아니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핵전쟁을 준비하지 아니해도 될 것이다. 서구는 곧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망할 것이니 말이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을 무시해 왔다고 왓슨은 지적했습니다.
복음은 세상으로 나가 전진해야 합니다. 선교 역사 중에 뉴 헤불리지스 제도의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영국 선교사이며 학자인 존 윌리암즈가 1839년 11월 20일에 처음으로 상륙합니다. 그러나 상륙 즉시 해변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해리스 목사가 들어갔는데 3일도 안 되어 학살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존 골든 내외가 들어가 원주민과 사귀는 데 겨우 성공했지만, 역시 백인을 증오하는 토인에게 암살되었습니다. 그후 맥네어 선교사가 도전했지만 결국 1년도 못 가서 암살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상륙한 사람은 수년 전에 순교한 존 골든의 동생이었습니다. 골든 목사는 무사히 받아들여져 현지의 언어를 연구하고 신약성경 번역을 착수했습니다. 그의 피가 마침 번역하고 있던 사도행전 7장, 즉 스데반의 순교 부분 원고를 적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일곱 번째 선교사인 로버드슨 목사가 상륙했으며, 40년 뒤에는 30개 섬에 있는 전 주민이 기독교인이 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들 많은 선교사들의 공통 이념은 초대 순교자인 윌리암즈 목사의 신앙을 계승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의 전진은 중지될 수 없다. 나는 내 뜻으로 이 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므로 나는 갈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 대장에게 신문기자가 질문하였습니다. "다가올 미래와 말세에 어떠한 위험이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부스 대장의 대답은 유명한데 "중생이 없는 용서를 제공하는 철학적 기독교,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 성령이 없는 종교, 하나님이 없는 정치, 지옥이 없는 천국, 이런 것들이 위험한 요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없는 교회와 기독교의 위험성"을 지적한 셈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생애는 복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였지만, 복음이 그로 하여금 성도의 으뜸이 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보잘것 없고 비천한 어부였지만, 복음이 그를 위대한 전도자로 만들었습니다. 존 번연은 서투른 땜쟁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복음이 그를 위대한 전도인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루터는 엄격한 의식주의자였지만, 복음이 그를 위대한 개혁주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복음은 그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역사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교회 안에나 성도의 가슴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향하여 교회 밖으로 나아가고, 그 어떤 지경을 넘어가서, 그 복음의 영향이 멀리멀리 파급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가서 세상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실만큼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하시려는 사랑, 큰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세상(소년가장, 장애우, 외국인 다문화 나그네, 기타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면 교회와 사회가 하나로 어울어져서 소망을 이끌어내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교회와 사회 속에 가득하게 담겨지도록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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