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빛의 사자 | 2013.10.30 13:04:4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4:16-30
설교자
한태완 목사
참고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누가복음4: 16- 30절,

찬송가479장<통> 290장

 

미국의 문학가 ‘토마스 윌트’의 소설 중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젊어서 꿈꾸던 소원을 모두 성취했습니다. 부자가 되었고, 명예도 얻었고, 자녀들도 똑똑하고, 가정은 화목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주인공은 오래 동안 그리워했던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에쉬빌’이라는 조그만 마을의 기차역에 내리는 순간 그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거리는 과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대화되었고, 옛 친구들은 세상을 떠났거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고향에서 자신은 낮선 이방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곳은 이미 자신이 꿈꾸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돌아오는 기차에 올라 슬프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추억만큼 황혼을 풍요롭게 하는 요소는 없습니다. 바쁘게 달리는 삶속에서도 추억할 고향과 옛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늙어가는 삶의 길목에서 아름다운 동행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고향이 있습니다. 원래 고향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거기에는 안정과 휴식이 있고 동정과 사랑과 향수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요,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고향!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뒷동산 소나무도 죽었고 느티나무 아래 개울물도 말랐지만 고향은 아직도 우리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풍성한 그늘로 안아주던 동구밖 느티나무는 우리 마음의 고향 속에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상처난 마음도, 지친 몸도 쉬게 해주던 내 고향의 따뜻한 품이 그립습니다.

 

 

이은상 시, 김동진 작곡 ‘가고파’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곱아라 가고파 어릴 때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곱아라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우고 지나자 그날 그 눈물없을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연어는 산란을 위해 험한 물길을 거슬러 고향을 찾아갑니다. 사람은 명절 때가 되면 부모와 옛친구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전국의 길이 죄다 막히고 다섯 시간 열 시간이 걸려도 참고 갑니다.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신앙수련입니다. 열심히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복한 수련입니다.

 

 

중국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의 항우가 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유방이 항우의 10만 군사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유방은 가을 달밤에 자기 군사들로 하여금 퉁소로 구슬픈 초나라의 가락을 불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초나라 군사들은 고향의 구슬픈 가락을 듣고 향수병에 걸려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퉁소 가락으로 유방은 대승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고향이란 인간에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전통 명절인 추석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아갑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깊은 향수를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아늑한 품과 같고 동경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동심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막상 고향을 찾으면 허무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고향을 가보아도 내 마음의 빈 공간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또 다른 고향, 영원한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이 우리의 본향이요, 돌아갈 나라입니다.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잠27:8)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으로 입원해 있는 한 달 동안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아내에게도 묻지 못했고 아내조차도 그의 병명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소리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조차 하지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사람! 그런데 그 사람처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였습니다. 1980년 4월 16일, 그는 입원한 지 한 달만에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한 신문사에 이런 기사를 투고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비그리스도인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4- 16)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옛날 자기 고향을 찾아간 내용입니다. 고향을 찾은 예수님의 심정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을 완전히 그 동네에서 보냈고, 30세가 되기까지 살아온 고향입니다. 이제 군중 속에서 시달릴 대로 시달린 예수님께서 휴식처로 찾았던 곳이 고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은 예수님에게 휴식을 주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려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누구든지 고향은 있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고향입니다. 또한 누구에게든지 흘러간 과거가 있지만 다시 돌아갈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고향을 떠난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은 계속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어차피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난 이상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75년 동안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미지의 개척지를 향해서 출발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아브라함은 계속 앞으로만 전진해 나갔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고향삼아 안주하여 있는 롯의 가정을 탈출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정든 고향이지만 심판 받을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고향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결국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서서 고향을 바라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세상을 등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고향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누렸던 환상적인 고향의 추억들이 오늘 우리들 속에 있습니다. 이 고향을 향해 뒤돌아서서 바라보고 있으면 롯의 아내처럼 우리들의 영적인 모습이 소금기둥 화석처럼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고향으로 돌아가 보았지만 돌아갈 만한 고향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이제 진리를 발견하고 인생의 새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출애굽을 시켰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적으로 괴롭고 힘들기만 하면 애굽을 그리워하였고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정말 저들은 몸만 출애굽을 하였지 마음과 정신은 출애굽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애굽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의 신앙이란 무덤에 갇혀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무덤에서 살아나야 하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약동의 신앙인 것입니다. 신앙이란 한 번 깨닫고 머물러 있는 상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끝나버린 정적인 상태도 아닙니다. 신앙은 동적인 것으로 움직이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은혜 받고, 결단하고, 회개하고, 깨닫고, 노력하고, 전진해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 1).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내 육신 장막이 땅속에 묻히고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나의 구원은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까지 앞으로 전진하여 나가는 그 사람은 결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머물러 뒤를 돌아보는 사람입니까?

 

나는 아직도 아침마다 눈을 뜨며 새롭게 부활합니다. 나는 아직 나의 고향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나의 고향은 내가 죽어야만 비로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고향. 그 날을 위하여 나는 오늘도 빈 몸으로 고향에 돌아가도 결코 부끄럽지 않을 그런 귀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기도: 영원히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신앙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깨어서 믿음에 굳게 서게 하시고 우리의 영적 생활이 승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주의 장막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소서. 이 세상에 살지만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집을 바라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축복으로 풍요와 안락한 삶을 누리지만 주님계신 본향을 사모하며 사나 죽으나 주님의 기쁨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갈릴리공동체)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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