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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11) 한 생명에 대한 관심

누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345 추천 수 0 2013.11.05 21: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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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5:1-7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회복(11) 한 생명에 대한 관심
눅15:1-7

“원씽(THE ONE THING, 게리 켈러·제이 파파산 지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상이 복잡한데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것은 단순함에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반전을 불러오는 것은 단순함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단 하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 최종 승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성과는 초점(focus)을 얼마나 좁힐 수 있느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을 파고들게 되면 단 하나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멀티태스킹은 곧 능력이다”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클리포드 나스가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262명의 학생들을 통해 실험을 해 보니까 멀티태스킹을 잘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관련 없는 일에 푹 빠져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고 모든 일에 엉망이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겨누지 않으면, 아무것도 맞출 수 없고, 모든 것을 겨누면, 보통은 아무것도 맞출 수가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다가서려고 하면, 대개는 아무에게도 다가설 수 없는 것입니다. 표적(Target)이 분명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사업하는 사업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성공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핵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왜 제자들을 불러 훈련시켰습니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사람 낚는 어부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나라를 언약의 백성으로 삼았습니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이것을 붙들어야 행복할 수 있고 이것을 붙들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신앙생활에서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가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요즈음 극도의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생명의 고귀함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부산에서 13살 여중생이 자기 집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고, 흉기로 살해한 뒤 상자에 넣어 버렸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난해 9월 인터넷 채팅에서 알게된 10대 남성과 수차례 성관계를 가진 뒤 임신하자 영아살해를 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한 해에 낙태로 죽어가는 생명은 34만 건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거문도에서는 술을 마시다가 상대가 욕한다고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서울에서는 유명 숯 가공업체 사장이 여직원이 "에이 씨" 하며 신경질을 냈다고 해머로 머리를 쳐 살해했습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살인과 강도, 강간·강제추행, 절도, 폭력 등 5대 범죄가 54초마다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올해 1∼7월 발생한 5대 범죄는 모두 33만 9186건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너무 생명을 경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보거나 업신여깁니다. 인간의 생명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폭력으로 짓밟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의 편리대로 하려고 덤벼듭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힘을 통해 상대의 존엄성과 인권, 생명을 무참하게 짓이겨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너무나 생명 경시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의 인권이나 생명의 존엄성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비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 불명예스런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상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와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금을 거두는 세무서 직원들, 바람 피우며 몸 팔아 돈버는 창녀들, 귀신들려 헛소리하며 돌아 다니는 미치광이들, 문둥병 걸려 고름을 질질 흘리며 추방되어 집단 생활하는 문둥이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병들었다고 생각하는 각종 병자들, 앉은 뱅이, 눈먼자. 혈루증, 중풍병자, 귀머거리 등의 장애자들을 사람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자 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냅니까? 2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수군거립니다. 쉴 새 없이 불평불만을 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영접하고 왜 같이 음식을 먹느냐는 것입니다. 정결법을 어긴 부정한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너도 공산당이라는 것입니다. 너도 종북주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전쟁나면 자기 아들 공산주의 자와 싸우기 위해 군대에 보냅니까? 더 안 보냅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경건한 자가 아니니까 예수님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시대 마다 권력자들은 상대를 제거하기 위한 통치 이념을 만들어 냅니다. 당시 사회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인 정결법을 통해 편가르기를 하고 정죄하여 대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늘 생명을 경시하는 권력자들이 어느 시대나 써 먹는 방법입니다. 허위의식을 만들어 국민을 현혹하여 자신의 정적들을 죽이는 방법입니다. 오늘날 이데올로기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상대방을 매장하고 처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 예수님을 세 가지 비유를 들어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돈의 많고 적음을 통해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권력이 있고 없고, 외모가 좋고 나쁘고, 명예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생명이라도 그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진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왕따시키고 매장한 사람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5명의 남편을 둔 여인을 인간답게 다정하게 대하여 주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였으며 살려 주었습니다.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문둥이를 고쳐 주었고 혈루증 앓는 자, 눈먼 자, 귀먹은 자,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가 고쳐 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땅의 백성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자기 딸을 꽁꽁 묵어서 사자 앞에 내놓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돈을 맡겨서도 안 되고 비밀을 나누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같이 여행을 가서도 안 되고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금지하였습니다. 음식 잔치에 참여해서도 물론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인의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하늘에 기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말살되면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창기의 친구, 세리의 친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몸값에 대하여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라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어떤 생명이라도 생명 그 자체로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진정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가 본질을 잃어 버리니까 세상이 교회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빛의 역할 소금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원규 교수는 오늘날 교회 문제를 7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① 기복신앙의 만연과 기독교의 무교 화 현상, ② 교회의 계층화, ③ 개인구원의 강조로 인한 탈사회적 교회의 조장, ④ 물질에 대한 축복에 중점을 둔 물질주의 가치관의 만연, ⑤ 교회의 성장에만 치중하여 교회의 궁극적 목표를 잃어버리는 목적 전치 현상, ⑥ 개교회주의의 폐해, ⑦ 교회의 대형화와 그에 따른 비인격적인 인간관계의 형성.” 왜 이런 소리를 듣겠습니까? 한 영혼의 귀중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수가 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호주의 저널리스트 토마스 케넬 리가 쓴 소설을 영화화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실존 인물이었던 오스카 쉰들러(Oscar Shindler)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독일 나치 당원으로 폴란드에 가서 무기 공장을 하여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비록 젊은 시절 술과 돈에 심취되어 살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이 개 취급을 받으면서 아무데서나 아무렇게 대량 학살되는 것을 보고는 점점 인간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고 막대한 돈을 들여서 독일 군인들과 흥정을 하여 유대인들을 사서 자기 공장에서 일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1,1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구해 준 것입니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생명을 살려내지 못한 것을 참으로 가슴아파합니다. 친구가 사준 자기의 승용차를 보면서 그것을 팔았더라면 유대인 열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자기 가슴의 금배지를 팔았더라면 유대인 두 명, 아니 세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안타까워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유태인들이 쉰들러에게 감사의 표시로 반지를 만들어 주면서, 탈무드의 글귀를 새겨 주는데 거기에 적힌 말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자가 전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추석 명절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가슴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한 영혼이 돈보다, 권력보다, 명예보다, 쾌락보다 사상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 죄지은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병든 사람들, 무엇보다 영혼이 병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밖에 불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들어본 일이 없는 자. 혹은 미련해서 하나님을 떠나 방황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다가 타인의 잘못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안의 불신 자들고 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아무런 감격도 없이 교회에 나와서 앉아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시험에 들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2. 우리가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어떻게 찾습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99마리 양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닙니다. 사람들은 99마리를 놓아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면 너무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99마리에 시간과 정열을 투자하지 왜 한 마리냐는 것입니다. 몇 시간 찾다 찾지 못하면 어리석을 양에 대하여 관심을 꺼 버릴 수 있습니다. ‘멍청하게 곁길로 가서, 욕심 많게 저 혼자 풀을 쫓다가, 혼자 잘난체 하며 대열을 이탈하여’라며 양을 탓하며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잃어버린 생명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안주하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일평생 전도 한번 못한 것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워서 더 늦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꼭 전도하려고 결심을 하셨답니다. 그래서 집 근처에 혼자 사시는 80이 넘은 할아버지를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였답니다. 한 상 잘 차려 할아버지를 초대하여 식사를 하는데 '어르신, 제가 명색이 교회 다니는 집사인데, 식사 전에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식사해도 괜찮겠죠?'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다짜고짜 화를 내시면서, '만약 당신이 음식을 먹기 전에 기도하면, 자신은 밥을 안 먹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답니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혼자 기도하고 식사를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식사하는 시간 내내 기독교인들을 욕하고 교회를 비방하는 이야기를 하였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교회를 비방하고, 목사와 성도들을 비난하기에, 너무 화가 나서 그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할아버지 그만 하세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세요.' 라고 말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마음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답니다. "네가 지금 쫓아내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을 나는 80년 동안을 기다렸다. 그런데 너는 한 시간, 밥 먹는 시간조차도 기다려 주지 못하느냐?" 너의 사랑의 수준이 고작 밥 먹는 한 시간도 기다려 주지 못하면서 네가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느냐? 나는 이 아들이 돌아오기를 80년 동안 기다렸다”는 주님의 슬픈 음성을 듣게 되었답니다. 결국 이 집사님은 식사하는 도중 계속해서 울었답니다. '하나님, 몰랐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저 분을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고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요. 저는 1시간도 불쌍한 영혼을 위해 기다리는 긍휼함도 자비도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제게 사랑이 없습니다." 하면서 계속 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고 또 찾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핑계를 대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다는 말입니다.
지존파를 회개시킨 모 교회 집사님은 영혼만이라도 구원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작 무려 열 두 번이나 교도소를 방문했답니다. 사랑의 편지를 40여 통이나 보냈답니다. 결국 집사님의 포기하지 않은 지속적인 관심이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지존파의 두목격인 김기환은 열한 살 때 교회에 다니다가 중단했다면서 만약 계속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자신의 삶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편지를 통해 밝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단정하고 배척했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죄인에 대한 소망을 포기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결코 죄인을 포기하지 않고 찾을 때까지 찾고 찾으십니다. 이 땅에 소외되고 사람들이 싫어하고 비난하는 자, 돈이 없다고 못났다고 재능이 없다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들, 심지어 부모까지 싫어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을 결코 싫어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목자는 포기하지 않고 양을 찾습니다. 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지 않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아 나섭니다. 길은 위험과 고통이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찾기까지 인내하며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합니다. 우리도 생명 구원에 대한 목표를 세웠으면 그 영혼 구원받을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영혼 구원에 전력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지속적으로 영혼 구원을 위해 집중하고 있습니까?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Why not the best?)”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 되자마자 내놓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bestseller)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 전에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전도 집회에 10년 동안 참가했었다고 합니다. 매년마다 전도 집회가 열렸는데 매년마다 14가정을 책임지고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답니다. 10년 동안 140가정에게 복음을 증거한 겁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1년에 한 명, 아니 평생 동안 한 명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1년에 14가정, 10년에 140가정에 복음을 전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열정입니까?
그래서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10년 동안 140가정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예수 믿은 사람도 있다."라고 하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1966년도에 조지아 주지사로 출마하여 선거운동을 하였는데, 3개월 동안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지사에 당선됐는데, 그의 마음에는 부끄러운 가책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3개월에 30만 명을 만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14년 동안 겨우 140가정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니... 이것은 보통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카터 전 대통령이 신앙 양심의 가책이었답니다. 꿀벌은 한 스푼의 꿀을 따기 위해 6만 송이의 꽃을 60번씩, 곧 36만 번을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 구원 사역을 하면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라고 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으며 생명을 구원하는 사역에 지속적으로 집중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찾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즐거워 어깨에 메고 옵니다. 조금 모자라 길을 잃은 양일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아, 혹은 독립심과 자존심이 강해 홀로 있기를 좋아한 양일 수도 있습니다. 며칠 동안 목자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 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찾는 것 자체로 기뻐합니다. 6절에 보십시오. 집에 와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잃은 양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돌아 온 것을 기뻐하는 목자의 모습니다. 한 생명이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한 생명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돈 많이 버는 것도 기뻐할 일이고, 권력과 명예와 인정을 받는 것도 기뻐할 일이지만 무엇보다 한 생명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는 지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우리도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보며 이런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것 가지고 취득하여 자기들 끼리끼리만 기뻐하려고 합니다. 부자되어 기쁘고, 권력 얻어 기쁘고, 좋은 친구 만나 기쁘고, 건강하여 기쁘고, 명예 얻어 기쁘고, 취업하여 기쁘고, 결혼하여 기쁘고 이런 식의 기쁨에 취해 살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기 이런 기쁨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죽은 영혼 돌아 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교회도 이런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매주 우리가 불신자를 전도하여 교회에 등록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 생명이 주님께 돌아오면 그 생명이 천국 백성이 되고 인생관과 가치관이 바뀌게 됩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까? 영혼을 구원시키는 기쁨이야 말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자신들의 삶의 수준에 맞지 않다고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을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정죄의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전라도라고, 경상도라고, 충청도라고, 장애인이라고, 가난하다고 같이 예배드리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정관념, 편견, 아집,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인인데도 믿는 않는 사람들이 하는 권력 놀음에 편승해 자격 미달이라고 정죄하고 교회에서 몰아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 논리로 서로 편 가르기를 합니다. 보수는 진보를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여 추방시키려 하고 있고 진보는 보수를 독제라는 딱지를 붙여 격리시키려 합니다. 교회가 그런 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는 안 됩니다. 브론펜브레너라는 미국의 문화 심리학자는 사회를 그 진보수준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일원적 사회, 아노미적 사회, 그리고 다원적 사회가 그것입니다. 일원적 사회에서는 지배계급(왕이나 독재자)의 가치관과 가치가 막강한 무력과 경찰력에 의해서 강제되는 사회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70년대 초를 정점으로 한 80년대 초까지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경찰이 장발 단속까지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일원적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막강한 힘이 약화되기 시작하면, 그동안 억눌려왔던 많은 욕구가 일시에 해방되고, 분출되기 시작하면서 아노미적 사회에 돌입하게 되는바, 이 시기의 범죄는 향락성이 주종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80년대 후반부터 야기된 상황인 바, 개인과 집단들의 욕구발산을 억제하는 제도권의 힘이 약화일로를 걷는 시기입니다. 사회의 각 계층이 안정된 공존을 할 수 있게 될 때, 이를 다원적 사회라 부릅니다. 교회의 사명은 궁극적으로 불신 사회에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가난과 기아, 불의와 전쟁의 종식, 파괴와 오염으로부터 환경 보호. 사회악과 부도덕에 대항하여 변화를 추구하는 일, 인신매매, 유괴, 폭행근절. 물량주의, 쾌락주의, 인본주의적 우상적 철학과 싸워야 합니다. 지역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주민 스스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도록 돕는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민들을 위한 권익사업과 생활 상담 사업, 탁아 사업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제도를 만드는 사람, 한 생명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변화시키면 그들을 통해 세상이 변화됩니다. 문제는 자꾸 자기들끼리 모여 즐거워 하는 클럽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하워드 클라임벨 박사가 그의 책 성장상담교제에 이런 이야기를 써 놓고 있습니다. 어느 외딴섬 조용한 해변가에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옵니다. 인명 구조대원들이 열심을 다해 생명을 걸로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섬이 안전한 해수욕장으로 소문이 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인명구조대원들이 너무 헌신적으로 애쓰니까 사람들이 기부금을 많이 냈습니다.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니까 인명구조원들이 모여 허름한 구조시설을 헐고 좋은 건물을 지었습니다. 쉴 수 있는 침대도 놓고, 심심할 때 친교할 수는 당구대도 놓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카페도 만들고 또 술도 한 잔 할 수 사교클럽도 만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임명구조대원들은 당구를 치다가 사람들이 빠졌다고 하면 요 당구 이게 마지막인데 이것만 치고 뛰어가지, 술 먹고 취해 가지고 제대로 구조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 여름 수많은 사람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휴양지에는 괴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여기만 가면 일 년에 몇 명씩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발길은 끊어지고 그 섬은 흉물스러운 폐가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섬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풍자한 것입니다.
교회는 극장처럼 공연 보며 구경하는 곳이 아닙니다. 콘서트홀이 아닙니다. 무슨 발표 들으러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설교 발표, 찬양 발표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교 클럽이 아닙니다. 교회는 학원이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의 사람, 도시, 사건, 역사들을 딸딸 외워 시험 쳐서 자격증 따려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 구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생명 구원에 집중하고 생명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곳입니다. 구원의 방주가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생명 구원에 집중하였습니다. 하루에 삼천이 회개하고 돌아왔고(행2:41), 남자만 오천 명이(행4:4). 심히 많은 사람이(행6:7), 수다한 사람들이(행11:21), 수만 명이(행21:20) 돌아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것은 공동체의 기쁨입니다.(6) 한 드라크마 찾은 여인도 이웃을 불러 잔치를 합니다.(9) 아들이 돌아 올 때도 (23,24)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입니다(6,9,24) 한 생명이 돌아오는 것은 개인의 잔치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잔치입니다. 하늘나라의 잔치입니다. 생명 구원에 대한 회복이 고통하는 세계의 해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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