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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슥6: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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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교회를 아끼는 삶의 축복 (스가랴 6장 9-13절)
어느 날, 바벨론에서 건출 헌금을 모아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다(10절). 그때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그 집에 가서 그들로부터 은과 금을 취해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대제사장이 천으로 된 관이 아닌 왕관을 쓴다는 말은 대제사장과 왕을 겸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상 한 사람이 왕과 대제사장을 겸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왕관을 쓴 대제사장은 누구를 상징하는가? 오실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결국 본문에 나오는 성전 건축은 당시의 성전건축과 관련된 말씀이 아니라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주는 교회와 관련된 교훈은 무엇인가?
1.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본문에서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다.”는 말은 메시아인 예수님이 언약대로 유다와 다윗의 혈통을 통해 이 땅에 오실 때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섬기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졌는가?”라는 질문이다. 교회는 돈이나 유력한 사람이나 유능한 목사를 통해 세워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
2. 교회를 세울 때 영광을 얻는다
교회를 섬기면서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하라. “내가 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부끄러움이 되는가?” 그런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살면 한 번이라도 더 근신하고 참게 된다. 살면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만날 때가 있다. 그래도 교회를 세우는 소명을 감당하려면 참아야 한다. 참지 못하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지만 참으면 나중에는 본인도 “참 잘 참았다.”는 생각이 들고 하나님의 넘치는 보상도 있게 된다.
3. 교회를 주님이 지키고 보호한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교회를 다스리고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교회를 변호한다. 결국 예수님이 교회의 왕과 제사장이란 말은 예수님이 교회를 철저히 지키고 보호한다는 말이다. 그처럼 교회를 잘 지키고 섬기는 삶은 가장 복된 삶이다. 그런데 교회를 지키고 섬기는 자신의 손길이 거의 교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육신은 재미를 느껴도 영혼은 의미를 잃고 소외되면서 참된 복과 행복도 놓치게 된다.
< 교회를 소중히 여기라 >
본문은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잘 말해준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교회의 부족한 모습으로 시험에 들 때도 있다. 그래도 교회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는 마음은 후퇴하지 말라. 이 세상에 부족함이 없고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교회에 출석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아내를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점차 실망스런 모습이 보였다. 교회에 오면 최고의 주인공 대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한 사람들끼리만 주인공 그룹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자기도 봉사하고 싶은데 기존 성도들이 봉사할 틈을 안주었다. 또한 교인들이 정직하게 살 줄 알았는데 불신자들과 별 차이가 없었고, 교인들끼리 다투는 장면도 가끔 목격했다.
그 모습에 실망해서 구경꾼처럼 교회를 다니다가 신도시로 이사 갔다. 마침 집 앞에 작은 교회가 있어 등록했는데 등록하자마자 교회의 감투란 감투는 다 씌워주었다. 그때부터 신나서 목사님과 손발을 맞춰가며 목사님을 도와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1년도 되지 못해 상처 받는 일이 자주 생겼고 목사님도 그를 목회의 걸림돌로 생각했다. 서로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환멸도 컸다.
결국 교회를 옮겼지만 거기서도 실망과 상처를 경험했다. 그래서 잦은 부부싸움 끝에 부부가 합의해 당분간 교회에 가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그러나 그 가정예배도 몇 주 만에 흐지부지 되었다. 그래도 신앙은 있었기에 교회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어딘가 좋은 교회가 있겠지.” 하고 매주 여기저기 교회를 순례했지만 다 비슷했다. 그런 식으로 그 동안 다닌 교회가 20개가 넘은 사람이 있었다.
왜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생기는가? 자기중심적인 교회관 때문이다. 사람들은 처음 교회를 다닐 때 천국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천국도 펼쳐지지만 동시에 상처와 아픔도 겪는다. 그런 경험들이 많아지면서 점차 자기중심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교회의 부족한 모습을 비판하는 성향이 생길 수 있다. 문제는 그 비판으로 교회가 바르게 되기보다 먼저 비판하는 자신의 심령이 황폐해질 때가 많다는 것이다.
신학생 때는 모든 교회들이 문제가 있어 보이고 선배 목사들이 속물로 보인다. 그래서 신랄하게 교회와 선배 목사들을 비판한다. 그러다가 자기가 목회를 시작하고 점점 세월이 흐르면 자신이 더 웃기는 목회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교인 10명만 되어도 거기에는 교회관 10개가 있기에 목회가 이론처럼 쉽지 않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때서야 “선배 목사님들이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하면서 점차 다듬어진다.
교회의 부족한 모습을 쉽게 비판하지 말라. 교인들은 더 그래야 한다. 불신자들과 언론이 교회를 난도질할 때 그 비판을 진리로 알고 교인들까지 쉽게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상처를 내면 안 된다. 어떤 교회와 목회자가 정말 비판 받을 모습을 보이면 ‘그 교회’와 ‘그 목회자’와 ‘그 사안’을 가지고 목적 있는 비판을 해야지 교회와 목사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면 안 된다.
교회문제는 두렵고 떨림으로 주의 깊고 지혜롭게 접근해야 교회의 고결성이 손상되지 않고 자기 영혼도 손상되지 않는다. 교회문제는 비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원래 교회는 불완전하다. 교회에 완벽함을 요구하면 교회생활은 힘들어진다. 교회는 천사들의 공동체가 아닌 죄인들의 공동체이기에 허물과 약점도 많다. 그 약점과 허물을 자기 마음과 취향에 안 맞는다고 쉽게 비판하면 입이 가벼운 존재가 된다.
입이 가벼우면 그 영혼에 진리와 행복이 머물기가 쉽지 않다. 약점이란 비판을 위해 있는 것만이 아니다. 부부가 이상만을 좇다가 서로의 허물을 마구 들추면 가정의 행복은 깨진다. 나라의 교육정책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공부 못하는 자기 자녀는 ‘비판의 대상’이기보다는 ‘격려의 대상’이다.
교회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 지상 교회는 ‘천국 개념’보다는 ‘병원 개념’을 가진 믿음의 공동체이다. 만약 완벽한 지상천국을 이룬 교회를 찾으면 그 교회에는 절대 등록하지 말라. 역설적인 의미에서 그 교회를 자신이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죄인들이 안식처를 찾는 곳이기에 교회 안에는 병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므로 교회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충격 받지 말고 그때는 더 애정과 애틋함을 가지고 교회의 부족함을 보충하려고 하라.
교회에 약점과 허물과 상처가 많아도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하신다. 아무리 부족해도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영광스런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그 신부의 얼굴에 상처를 내거나 그 신부의 옷을 찢고 더럽히지 말라. 지상 교회가 못나 보여도 교회는 성도가 섬겨야 할 최상의 대상이다. 그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지킴으로 그 동안 꿈꿔왔던 아름다운 교회의 비전을 이루는데 자신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고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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