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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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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sermon/716633 |
하나님 앞에서 ‘옳음’의 문제
눅18:9-14, 창조절 아홉째 주일,
2014년10월27일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제3독서인 눅 18:9-14절에 아주 잘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제가 굳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내용도 간단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극과 극에 속합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 손가락질 받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당시에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요즘으로 바꿔 말하면 바리새인은 법관이나 대학 교수라고 한다면 세리는 고리대금업자쯤에 해당됩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들을 나열했습니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에 반해 세리는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듯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못난 사람입니다.
이런 비유를 읽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저렇게 뻔뻔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겸손한 세리로 살아야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도 14절에서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자기를 낮추면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되지 않는다는 걸 번번이 깨닫습니다.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기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 자신이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자신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세리의 영성으로 살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는 바리새인처럼 살고 있다는 욕망이 동시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생각이 더 강할 겁니다. 이렇게 질문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되는 게 좋을지, 아니면 세리 같은 되는 게 좋을지를 말입니다. 저의 두 딸도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바리새인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많은 사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신약성서에, 주로 복음서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긴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어떤 종교적 특권의식에 사로잡혔던 제사장들과 달랐으며, 또한 정치적으로 친(親)로마적이면서 경제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사두개인들과도 달랐습니다. 서민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부활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보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듯이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종교적으로도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정직하게 바치고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들 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정체성과 민족적인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도 필요합니다. 개별 교회도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만 건강하게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삶을 아무도 폄하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세리들은 실제 삶에서 별로 인정받을만한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정권과 계약을 맺은 다음에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둬 그 차이를 자신들의 수입으로 삼았습니다. 로마 정권은 계약 기간이 될 때마다 입찰을 붙여서 가장 많은 액수를 제시한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을 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비리가 개입되었을지는 뻔합니다. 세리를 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성도 커서, 세리와 죄인이 동의어로 사용될 지경이었습니다. 우리의 경우, 일제 강점기에 자의반타의반으로 친일활동을 한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되기 원하시나요, 아니면 세리 같은 사람이 되기 원하시나요? 당연히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우들도 모두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비난하고 세리를 칭찬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이런 평가는 바리새인들은 물론이고 모든 유대인들의 동의를 얻을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시 상식에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이었으니까요. 오늘 우리의 상식에도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이유와 근거로 상식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신 걸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의가 뭐냐, 즉 옳음의 본질이 뭐냐 하는 질문을 먼저 해야합니다. 옳음에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사람이 보는 옳음과 하나님이 보는 옳음이 다릅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의 옳음은 제한적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뚫어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옳음이야말로 참된 것입니다. 이게 보기에 따라서 애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취업시험이 있다고 합시다. 지원자 중에서 합격하는 사람도 있고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기준이 대개는 점수입니다. 높은 점수를 받은 지원자는 합격합니다. 그게 우리의 판단 기준입니다. 성서용어로 말하면 율법을 통한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점수가 낮은 지원자가 사실은 더 적합한 인재일 가능성도 열려있습니다. 사람의 평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사람 앞에서의 옳음을 포기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완성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옳음에 관심을 두라고 가르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율법 준수에 근거한 자신의 옳음을 절대화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안 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사회도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자기(만)이 옳다는 확신은 본문 9절 말씀이 말하듯이 결국 타인을 멸시하게 됩니다. 자기의(義)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을 다시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기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을 끌어들였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흐뭇해했겠지요.
그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즉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에 몰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으나 실제 관심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그럴듯하게 살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를 포함한 현대인들이 자기를 의롭게 여긴 바리새인처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상대적인 우월감에서 만족해합니다. 기업들은 우리의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합니다. 그렇게 살도록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고 강요합니다. 그 결과는 영혼의 훼손입니다.
세리의 기도를 다시 보십시오. 그는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근처에 오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눈을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기가 죽은 걸 텐데, 가슴을 치면서 14절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실제로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게 자랑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세리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은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걸 인정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것이 유일합니다. 그분의 자비만이 우리를 살린다는 사실을 영혼의 차원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이 문제를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내세운 내용들을 보십시오. 그가 윤리 도덕적인 모범을 보였으나 그것이 얼마나 초라한지는 스스로 알고 있을 겁니다. 모른 척 할 수는 있으나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적인 수고와 노력을 통해서 삶의 모양을 바꿀 수 있지만 삶 자체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경건한 모양은 흉내 낼 수는 있지만 그 능력으로 살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말이 바로 본문에 나온 세리의 고백입니다. 퀴리에 엘레이송!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96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비텐베르크 성당의 사제이자 비텐베르크 신학대학교 교수였던 마틴 루터 박사는 1517년 10월31일 성당 출입구 위 벽에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가 적힌 대자보를 내다 걸었습니다. 훗날 교회사 학자들은 그 날을 종교개혁일로 정했고, 지금 모든 개신교회가 그 결정을 따르고 있습니다. 루터가 핵심적으로 전하려고 했던 주장 가운데 하나가 ‘솔라 피데’입니다. 솔라 피데는 ‘오직 믿음’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게 너무 당연한 주장 같지만 당시 교회에서는 당연한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의를 얻는데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면죄부 사건도 이런 행위에 포함됩니다. 루터는 이런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의로움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밀고 나갔습니다.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교황에 의해서 파문당했습니다.
루터가 오직 믿음을 주장했다고 해서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선행 행위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루터가 볼 때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온전하게 의로워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행위는 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이미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죄의 지배를 받습니다.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죄를 행한다는 뜻입니다. 인간 스스로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야만 인간은 의를 회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았고, 루터도 역시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한 바리새인과 달리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세리의 태도와 같습니다.
그래서 세리가 실제로 달라진 게 뭐냐, 또는 그로 인해서 세상이 달라졌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위선적이라고 하더라도 바리새인의 삶이 실제로는 더 옳은 것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지하는 삶을 공허하게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게 손에 잘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 경험도 공허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실수 하고, 늙고, 죽는 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교회생활에 열광적으로 매달려도 영적인 만족은 안 될 겁니다. 신앙의 세월이 늘어나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이 점점 더 시시해보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에만 완전히 의지하는 세리의 신앙도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다시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바리새인의 문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자기만족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입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상대적인 우월감을 확인하는 방식으로는 영혼의 만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하나님께만 두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자기 삶을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영적인 만족을 얻은 사람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 말고 우리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이, 더 실질적인 것이 있을까요?
설교를 시작하면서 저는 이 비유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 하고 물었습니다. 설교를 끝내면서 다시 똑같은 질문을 드립니다. 혹시 ‘내가 바리새인이 아닌가?’ 하고 걱정 되시는지요. 또는 ‘나는 아무리 죽었다 깨도 세리와 같은 영성에 이를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건 아닌지요. 본문도 그렇고 저의 설교도 그렇고 바리새인의 신앙과 세리의 신앙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말씀드렸지만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서로 겹쳐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신앙이 깊어진다고 해도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를 내세우는 마음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모두 동의하실 겁니다. 그럴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다시 주님의 용서를 구하곤 합니다. 어떤 때는 바리새인이 되었다가, 또 어떤 때는 세리가 되기도 합니다. 은근히 교만한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솔직히 겸손한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자기에게 집중하다가 또 하나님께 집중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락가락하면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한 평생을 살아갑니다. 죽어야만 이런 갈등과 긴장이 끝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그걸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체념하지는 마십시오. 오르락내리락하는 순간이 있겠지만 평생 전체를 놓고 본다면 우리의 신앙은 앞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삶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 전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집중하는 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인 바울이 이미 그런 길을 갔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 길을 꾸준히 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인정을 받게 될 것이며, 더 나가서 본문의 세리처럼 지금 여기서 이미 그 옳음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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