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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빛

이사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540 추천 수 0 2013.12.20 23: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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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2:1-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sermon/723188 

jys.jpg 여호와의 빛

사2:1-5, 대림절 첫째 주일,

2013년 12월1일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선지자는 이사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가 기록한 이사야 서(書)의 길이가 자그마치 66장이나 됩니다. 이사야와 더불어 대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각각 52장과 48장으로, 이사야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길이만이 아니라 신약성서기자들이 이사야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사야는 분명히 다른 구약성경과 구분됩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사야 66장은 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게 아니라 시대를 달리하는 세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겁니다. 그래서 편의상 제1 이사야, 제2 이사야, 제3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사야로 부르는 선지자는 사 1-39장을 쓴 제1 이사야로서 기원전 736년부터 701년 사이에 남유대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대략 30 여 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그 시대는 격동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시대에 민심이 떠난 북쪽 지파들이 여로보암 장군을 중심으로 독립해나갔습니다. 그렇게 분열된 채로 수백 년 지나면서 북 왕국과 남 왕국 모두 국력이 쇠퇴했습니다. 앗수르라는 초강국이 패권을 행사하면서 주변을 정복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북 왕국과 남 왕국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북 왕국인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패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애굽과 블레셋의 압력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반(反)앗수르 동맹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721년 북 왕국은 결국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은 앗수르에게 포위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남 왕국은 멸망만은 모면했습니다. 그 이후로 앗수르의 피식민 국가로 지냈습니다. 이처럼 나라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엄중했던 시절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대림절 첫 주일을 맞아 제1 독서로 읽은 본문 사 2:1절에 따르면 이사야는 유대와 예루살렘을 향해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사야는 왕족의 한 사람이거나, 또는 예루살렘 왕실과 가까운 귀족 계급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실과 국제 정세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시온과 다윗 왕조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그는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였습니다.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산이 가장 높은 산이 될 것이고, 온 세계가 여호와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그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말일’에 이루어집니다. 이 말일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그 하나님의 때는 지금 숨어 있으나 결국 드러나게 될 겁니다. 그때에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를 확연하게 알게 되어 모두 여호와의 전에, 여호와의 산에 모여들 것입니다. 3a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이방사람들이 여호와께 모여드는 이유는 ‘율법이 시온에서 아오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기’(3b) 때문입니다.

 

유대와 다윗 왕조의 입장에서 세계 역사가 이렇게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와 이방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우습게봅니다. 시온산을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율법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포식자가 토끼나 노루를 노리듯이 남 유대를 엿보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듣고 있는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도 이사야가 지금 한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지금은 말일에 일어날 일을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라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들을 모색할 때입니다. 외교정책도 잘 수립하고 군사력도 증강해야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변의 패권국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만합니다.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도 않은 여호와의 승리를 말할 게재가 아닙니다.

 

누가 옳을까요? 여호와의 승리를 믿고 기다리라는 이사야의 주장이 옳을까요? 아니면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서 건져낼 구체적인 방안들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옳을까요? 각각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주장들입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승리를 말한다고 해서 두 손 놓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준비할 건 당연히 해야 합니다. 문제는 역사의 주인이 누구냐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의 차이입니다. 당시 정치인들은 앗수르를 비롯한 여러 패권 국가들이 역사의 주도권을 행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는데 급급했습니다. 반면에 이사야는 앗수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힘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국가들은 힘이 있을 때 잠시 힘을 쓰다가 다른 힘에 의해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패권 국가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역사를 홀로 주관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옳을까요?

 

당시 모두가 벌벌 떨던 앗수르를 이사야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하나님 경험이 놓여 있습니다. 사 6장은 이사야의 소명 장면입니다. 성전에서 그는 천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는 찬송을 들었습니다. 사 6:3절은 이렇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거룩한 하나님을 경험한 이사야는 자기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자기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외칩니다. 왜냐하면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완전히 부정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한 겁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이사야는 앗수르라는 패권 국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의 승리가 드러나는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놀라운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역사의 완전한 변혁을 노래하는 겁니다. 4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와 똑같은 메시지를 미가 선지자도 선포했습니다(미 4:3). 사 2:2-4절과 미 4:1-4절은 약간의 단어와 문구만 다르지 전체적으로 비슷합니다. 미가는 보습과 창 이야기를 한 다음에 다음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고대인들에게 전쟁과 제국들은 두려움 자체였습니다. 이사야와 미가는 평화로운 일상이 보장된 세계를 하나님께서 이루실 미래로 제시한 겁입니다. 이를 위해서 일단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문명의 극치를 달리는 21세기에도 이런 일들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칼과 창에 매달려서 살아갑니다. 모두가 강제적인 힘으로 다투고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현재 국방예산의 반만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생각해보십시오. 반이 너무 많으면 30%만 생각해보십시오. 줄잡아 10조원은 될 겁니다. 이 예산으로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몇 개나 만들 수 있을지 계산해보십시오. 연봉 3천만 일자리 30만 개 이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교육과 복지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게 현실적인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을까요?

 

반론이 가능합니다. 국방 예산이 줄어서 최신 전투기를 구입하지 못하면 군사력의 약화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주변의 중국이나 일본, 특히나 호전적인 북한을 맞설 수 없습니다. 주변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게 되고, 그런 위협은 경제적인 경쟁력도 약화시킵니다. 결국 국방비를 줄여서 강화해보려고 했던 복지 국가 실현도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지금과 같은 남북분단 체제와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이사야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현실화되기 어렵습니다.

 

이사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단순히 낭만적인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국제 정세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정치와 군사 문제를 직접 거론하는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실 일의 비전을 전하는 겁니다. 보습과 낫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죽었다 깨도 그런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일이기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일지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그 일이 바로 우리의 궁극적인 현실(ultimate reality)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칼과 창이 없는 세계가 오고 있다는 설렘과 희망이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 현실이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에게 현실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루실 장래의 일을 현실로 경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만 본다면 하나님의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을 무조건 적대적으로, 냉소적으로, 현실 도피적으로, 또는 영합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현대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증상들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불안과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전혀 다른 현실에 대한 경험이 그 답입니다. 앞에서 이사야가 성전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경험한 것과 같은 경험이 바로 다른 현실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은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서 행하자.

 

여호와의 빛은 이사야의 영혼을 지배한 현실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빛에서 그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현실과 질적으로 다른 현실에 눈을 뜨는 것이 바로 영적인 경험입니다. 마치 국악에서 창을 하는 분들이 득음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눈이 없으면 우리는 잘해야 합리적인 현실주의자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그냥 착하게 세속적인 가치로 사는 겁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성서의 세계가 남의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여호와의 빛은 실제로 무엇일까요? 빛은 하나님의 힘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가시덤불의 불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천둥과 번개, 또는 화산폭발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불과 빛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일반 사물과는 그 성격이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사물을 태우기도 하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갑자기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대인들에게 불과 빛은 질적으로 다른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불과 빛이라는 메타포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여호와의 빛에서 행하자는 이사야의 말은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방식으로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그런 시각 앞에서는 앗수르 제국도 하나님의 손에 들린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는 힘이 있지만 하나님이 버릴 때는 그냥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오늘은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이를 상징하는 의미로 하나의 촛불에 불을 붙였습니다. 앞으로 대림절이 반복되면서 촛불이 늘어나다가 네 번째 주일에 네 개의 촛불을 붙이게 될 겁니다. 대림절에 촛불을 켜는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전통을 단순한 종교의식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왜 세상의 빛인지를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칼을 보습으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드는 놀라운 일들이 여호와의 빛에서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그것보다 더 큰 세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라는 빛에서 죄와 죽음을 극복했다고 하면서도 온갖 종류의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할까, 가난하게 될까, 전세와 월세 신세를 면치 못할까 등등, 염려와 걱정이 태산과 같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원망도 많고 적대감도 많습니다. 병적인 증상입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그런 증상을 앓고 있습니다. 북한 포비아(phobia), 즉 북한 증오와 공포 현상이 만연합니다. 자신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종북 좌파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북한이 여러 면에서 불량국가이기에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포와 증오와 적대감은 생명의 빛를 거스르는 죄와 죽음의 열매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에 대한 공포가 큽니다. 그들을 마녀처럼 미워합니다. 심지어는 자연과학과도 싸웁니다. 진화론을 적대시하고, 동성애자들을 미워합니다. 이런 모습은 빛에 들어간 사람들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들입니다. 여전히 죄와 죽음의 공포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생명의 빛을 무시하고 부정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칼과 창을 준비해서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세상의 요구에 제압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시대도 사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앞에서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여호와의 빛으로 경험하는 게 칼과 창의 질서, 즉 죄와 죽음의 질서로부터 해방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한 빛인 부활의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믿는 사람들은 앗수르의 패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않아야 합니다. 않게 될 겁니다. 오히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되는 하나님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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