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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5: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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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sermon/724709 |
희망의 하나님
롬15:4-13, 대림절 둘째 주일,
2013년 12월8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초기 기독교 당시에는 로마가 유럽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달려갈 수는 없습니다. 일단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에 후원금을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그 일이 예정대로 잘 처리되면 로마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 뒤로 스페인까지 가고 싶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설립한 교회는 아닙니다. 그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교회입니다. 기원 후 40년대에 유대 기독교인들이 로마로 이주해오면서 교회 공동체가 시작되었고, 50년대 중반부터는 이방 기독교인들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게 바로 이때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원후 56년 고린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로마 교회 방문에 앞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선교계획을 밝히려고 로마서를 썼습니다. 그게 역사에 살아남아서 로마서라는 이름으로 신약성경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2 독서로 읽은 본문은 로마교회 신자들 사이에 벌어진 어떤 문제에 대해서 충고하는 내용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었습니다. 로마교회 교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채식만 먹었고, 어떤 사람은 육식도 먹었습니다. 당시 육식을 한다는 것은 이교 신전에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걸 꺼림칙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롬 14:3)고 말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실정에서 말한다면 술을 마시는 신자와 마시지 않는 신자의 갈등과 비슷합니다. 당시 로마 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해서 교회 공동체를 위태롭게 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똑같이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런 먹을거리 문제 하나로 서로 상처를 낼 정도로 대립한다는 것은 인격적인 수준이 낮은 탓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실존적 한계라면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가 충고를 통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노력해서 잠시 갈등을 봉합할 수는 있겠지만 기회만 되면 그 갈등은 다시 불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본질적인 부분을 언급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 롬 15:4-13절입니다. 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여기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의 영적 교훈은 희망과 연관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단순히 ‘소망을 가지게 함’이라고 했는데, 루터는 더 강하게 표현했습니다. die Hoffnung festhalten, 즉 희망을 단단하게 붙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본문 마지막절인 13절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여기서 희망을 기독교 영성의 핵심으로 말하는 게 분명합니다. 희망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이 희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 희망으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이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도 희망을 말합니다. 내년에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이 잘되기를,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수 있기를, 새로운 직장에서 즐겁게 생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심지어는 복권에 당첨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나 바라는 것들이기에 좋다, 나쁘다 말할 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희망은 그런 것과 차원을 달리합니다. 희망을 본질로 하는 하나님만이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줄 수 있는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그것은 메시아 희망, 즉 구원론적 희망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을 거라고 믿습니다. 어떤 구원일까요? 구원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런 구원이 오늘 우리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구원은 죽어서 천당 가는 거니까, 그리고 그건 죽어봐야 아는 거니까 더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고, 이 세상에서는 그냥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한 삶을 살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말할 분들은 없겠지요. 기독교인들의 삶은 메시아적 희망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 근원적인 능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메시아적 희망을 통해서 로마교회 신자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도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바울은 본문 9-11절 사이에서 구약성경을 여러 군데 인용합니다. 시 18:49, 신 32:43, 시 117:1,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 11:10절입니다. 여기에 공통되는 단어는 열방입니다. 열방은 ‘여러 나라’라는 뜻인데, 원래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이 인용구절에 따르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말이 쉽지, 이건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적대적입니다. 서로를 원수처럼 생각했습니다. 특히 늘 약자로서 따돌림을 당하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가 그들의 역사에서 반복되었기에 이방인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의 불쏘시개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방인을 만드셨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메시아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사상이 유대인들에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마지막에 인용한 구절인 사 11:10절만 공동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돋아 이방인들을 다스릴 분이 나타나리니 이방인들은 그분에게 희망을 걸리라.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이새의 줄기라는 말은 다윗 가문이라는 뜻입니다. 다윗 가문에서 나신 메시아를 통해서 이제 이방인들도 희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희망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도 차고 넘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런 희망을 로마교회 교인들이 깨닫게 된다면 그들 공동체를 깨뜨릴 위험성이 있었던 교인들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겁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네 번째로 인용한 구절이 포함된 사 11:1-10은 오늘의 제1 독서입니다. 거기에 메시아 개념이 좀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거기서 이사야는 메시야를 심판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심판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들리는 소문으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기준으로 심판합니다. 그런 심판에 의해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됩니다. 이사야는 그 세상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 11:6-9절입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이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자적 상상력이 마음에 그려집니까? 모든 적대적인 일들이 해체되는 세상입니다. 이사야는 제가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 잠시 설명했듯이 말일에, 즉 메시야가 올 때 사람들이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사 2:4b). 오늘 말씀과 연관됩니다. 당시는 근동의 패권을 휘두르던 앗수르 제국이 주변 나라를 정복해가는 시대였습니다. 앗수르의 군사력 앞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박한 순간에 이사야는 예루살렘에서 메시아 희망을 선포한 것입니다. 궁극적인 평화이며, 참된 안식에 대한 외침입니다. 그가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이었나요? 포식자인 이리와 표범과 사자가 양이나 염소와 함께 평화롭게 지낸다는 게 인간 세상에서 말이 되나요?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앗수르가 나중에 바벨론에게 망하지만 스스로 작은 나라와 평화롭게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사자가 배고프면 양을 잡아먹듯이 강한 나라와 강한 사람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서 약한 나라와 약한 사람을 폭력적으로 지배합니다. 아무리 옆에서 뜯어 말려도 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나라와 나라가 서로 힘을 겨루고 있습니다. 지긋지긋합니다. 남북한은 60년 이상 싸우고 있습니다. 육이오가 끝났지만 종전이 아니라 휴전상태일 뿐입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그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로 실력으로 대결하고, 때로는 헐뜯고 모함합니다. 배운 사람은 배운 방식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은 배우지 못한 방식으로 다툽니다. 가족끼리도 싸우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이사야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메시아 희망을 품었습니다. 포식동물과 초식동물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처럼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모든 인류와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그런 시대를 꿈꾸었습니다. 그걸 희망했습니다. 그런 시대를 갈망했습니다. 그런 조짐이 전혀 없는 현실에 살면서 그는 미래에 그런 때가 온다고 믿고 선포했습니다. 그런 궁극적인 평화를 실현할 이가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 올 메시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살아있을 때는 아직 그런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어둠의 시절이 지났습니다.
이사야의 메시아 희망을 알고 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 온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 즉 참된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그를 통해서만 모든 적대 관계가 해체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목자 전승을 전하면서 천군 천사의 노래를 이렇게 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리스도이신 아기 예수를 통해서 참된 평화가 시작되었으며, 그런 평화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갈등을 겪고 있던 로마교회 신자들을 향해서 희망의 하나님이 희망을 가득히 부어주기를 바란다고 말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메시아 희망을 아는 사람만이 다툼과 갈등의 질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다툼과 갈등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자도 배가 부르면 옆에 토끼가 지나가도 잡아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배가 불러도 싸웁니다. 동물보다 문제가 더 많은 겁니다. 그걸 성서는 죄라고 합니다. 사람의 평화는 육체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배부름을 필요로 합니다. 영적인 만족, 영적 풍요가 그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인 만족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곧 죄와 죽음의 해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와 죽음이 해결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류가 짊어지고 있는 죄를, 그리고 모든 인류가 숙명적으로 가야될 죽음을 믿음 안에서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만족을, 즉 궁극적인 배부름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다른 이들과 다퉈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배부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밥을 더 먹겠다고 싸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문제는 이게 실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죄와 죽음의 극복이라는 말에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그게 느껴지다가도 세상살이에 파묻히면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오락가락하며 삽니다. 식당이나 공장에서 일하거나 장사하는 어떤 기독교인이 있다고 합시다. 일주일 내도록 그런 일에 시달리다가 한번 갑자기 첨단 물리학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면 이질감을 느낄 겁니다. 지난주일이 지난 다음날 둘째 딸에게 설교를 알아들었냐고 물었습니다. 딸은 ‘멍 때렸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설교만이 아니라 예배 전체가 그랬을 겁니다. 그날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주일을 그렇게 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딸의 영혼을 울릴 수 있도록 설교를 설득력 있게 전하지 못한 저의 책임도 있겠지만, 딸의 마음이 평소에 기독교 영성의 중심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예배와 설교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 책임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경험을 하실 겁니다.
바울도 그 메시아 희망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4절에서는 인내와 성경의 위로를 통해서 주어진다고 했고, 13절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우여곡절이 많겠으나 구도적인 태도로 신앙생활에 참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만족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메시아 희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것보다 더 귀한 경험은 없습니다. 거꾸로 이것 이외에 더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기억하고 재림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절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간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중간시기의 특징은 불안입니다. 절대적인 평화를 가리키는 메시아 희망이 여전히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세상살이가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못마땅해 보일 수도 있고, ‘될 대로 되라’ 하는 생각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피로가 누적된 이 세상을 볼 때 더 낙심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원수처럼 여겨졌던 이방인들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절대적인 평화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대림절의 평화이며 희망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저는 바울과 똑같은 심정으로 말씀드립니다. 희망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메시아 희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도록,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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